소설리스트

955화 (955/978)

955화. 고심하다

사묵함은 연일 쉬지도 못하고 일했던 탓에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진옥도 즉위 후 밤낮으로 조정 일에 매달리다, 이제는 또 거친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지라 사묵함보다 딱히 나은 상태도 아니었다.

사묵함이 진옥에게 인사를 올린 후,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이제 며칠간은 움직임이 없을 테니 당분간 마음 편히 쉬시지요.”

사묵함이 말했다.

“소등자가 진강과 방화의 소식을 전해 왔네. 매족 천계산이 설성 뒤편에 있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그 천계산에도 들어가질 못하고, 혈맥 천도 규훈을 해결할 방법도 찾지 못한 채 나날이 살날만 줄어들고 있다고 하더군.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날이 올 것 같아.”

진옥의 말에, 사묵함이 깜짝 놀랐다.

“예?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진옥은 소등자가 이야기를 전해주던 무렵, 정신없이 바빠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사묵함에게 진강과 사방화의 근황을 간략히 알려주었다.

사묵함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말도 안 됩니다.”

진옥도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방화가 아이를 위해 죽어도 천계산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니 진강도 방법이 없었다고 하더군.”

“줄곧 아이만 바라던 방화가 천계산 윤회지에 간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긴 할 겁니다. 하지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두 사람 목숨을 바꿔야 한다니요. 제겐 하나뿐인 동생입니다.”

“그래, 사 후작뿐만 아니라 짐도 받아들일 수가 없어.”

“폐하, 어찌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지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사묵함의 안색이 급변했다.

“누이가 절대 그렇게 두지 않을 텐데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방화 몰래 일을 꾸며야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방화와 진강의 죽음만 기다리자니, 이를 누가 받아들이겠는가. 백부님? 백모님? 노후야? 우리는 물론 목청도 견딜 수 없겠지.”

사묵함도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어쨌든 약물이 필요할 텐데, 의술에 정통한 누이가 그걸 눈치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약물 말고 다른 방법을 쓰면 돼.”

“다른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회임한 사람 곁에 두고 며칠 냄새를 맡게 하면 유산이 되는 물건을 하나 아네.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 해도 절대 알아챌 수 없어.”

사묵함은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그건 너무…….”

“사 후작, 누이를 지키고 싶지 않은 건가? 짐은 솔직히 방화 뜻대로 따라준 진강도 이해가 가질 않아. 그냥 같이 죽겠다는 것밖에 더 되나? 한날한시에 죽는다면 퍽 감동적이긴 하겠다만, 한평생 같이 사는 것보다 좋을 리는 없잖은가. 짐이 보기엔 진강도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사묵함도 결국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말씀이 옳습니다. 누이를 잃을 순 없지요. 아이는 나중에 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도 내 조카에게 차마 이런 방법까지 쓰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 방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고 보네.”

“그 물건이 뭡니까?”

진옥이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꺼내 보였다.

“여기, 어젯밤 사람을 보내 얻은 거라네.”

“이 무색무취한 물건을 위해 폐하께서도 분명 엄청난 고심을 하셨겠군요. 이제 어떻게 주면 됩니까?”

“소등자에게 전하면 되네. 설성을 위기에서 구해낼 방법을 찾았는진 모르겠지만, 만약 문제가 해결된다면 거기서 좀 더 머무를 것이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찾아 합류할 수도 있어. 어쨌든 소등자가 방화 곁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많을 테니 태아에게도 분명 영향이 미칠 것이네.”

사묵함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누이가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 그 방법밖엔 없겠습니다.”

“방화에게 들키는 날엔 우리를 죽도록 미워하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것까지 생각할 시간은 없네.”

진옥도 짙은 한숨을 쉬다, 소등자를 불러 물건을 건넸다.

“짐에게 때맞춰 지원군을 데려와 준 네 공이 크니 이걸 주도록 하마. 궁에서 급히 나오느라 마땅히 챙겨온 것이 없구나. 악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는 것이니 항시 몸에 지녀 방화의 곁을 잘 지키도록 해라.”

소등자는 연신 감사의 뜻을 표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반드시 소왕비마마를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진옥이 머리를 조아리는 소등자에게 손을 내저었다.

“사람을 붙여줄 테니 어서 설성으로 돌아가 두 사람에게 소식을 전해라. 짐과 사 후야 모두 무사하고 어인관으로 빌려준 병마도 사상자는 몇 없다고. 또 남은 병마 5만도 남은 날까지 잘 쓸 테니 부디 몸조심하라고 전해라.”

“예! 반드시 빠짐없이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소등자는 진옥에게 받은 물건을 보배처럼 챙겨 자리를 떠났다.

이내 사묵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등자에게까지 숨기시는 걸 보니 단단히 마음먹으신 듯합니다.”

“마음이 약해서 저 물건의 용처를 아는 순간, 겁에 질려 이실직고할 게 뻔하니 숨기는 게 낫다네.”

사묵함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진옥이 어인관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온 세상에 퍼졌다.

남진 백성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문무백관들도 기뻐했다.

그러나 이제 막 병사들을 이끌고 북제 황성을 떠난 북제 황제는 이 소식에 기함하는 동시에 깊은 분노를 드러냈다.

설성의 지원군도 받지 못한 상황에 이리 단숨에 어인관을 점령할 줄이야. 대체 어떤 후수가 남아있었기에 어인관을 함락시킨 것인가!

북제 제일의 천험지, 어인관은 황태자 제언경이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패배의 쓴잔만 들이키고 말았다.

북제 황제는 제언경이 집안이 닦아놓은 길에 발만 올렸단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부단히 무예를 익히고 타고난 기질도 있기에 큰 기대치를 품고 있었다. 장차 한 나라의 제왕이 될 사람이라면, 아무리 중상을 입었어도 북제 황제가 어인관으로 갈 때까진 버텨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단 하룻밤 사이 진옥에게 어인관을 빼앗기고, 200리 떨어진 옥하파로 후퇴해버린 데다 사상자도 엄청났다.

혹 남진에 설성 말고도 기병을 얻을 곳이 있었던 걸까? 그 가능성을 제외하곤 도저히 이 패배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북제 황제는 화가 치솟았지만, 그래도 20년 넘게 황위를 지킨 제왕답게 애써 감정을 삭이며 명령했다.

“여봐라! 남진이 대체 어떻게 어인관을 점령한 것인지 알아봐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북제 황제는 그렇게 밤새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북제에서 가장 충격에 빠진 곳을 꼽자면 조정도 아닌 옥가라 말할 수 있었다. 지금껏 모든 수를 계산해가며 계략을 짜왔던 옥가는 남진은 결코 북제의 발끝조차 따라오지 못할 상대라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이 짧은 교전에서 북제에 이 정도로 승리를 거두리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북제 변경 대영, 어인관이 잇달아 함락되자 북제 신하들과 백성들 민심도 점점 흉흉해 져갔다. 이에 북제의 태후와 승상도 국세를 살피며 조정에 모습을 드러냈고, 나라의 분위기를 다 잡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 * *

설성에도 진옥의 대승 소식이 들렸고 사방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폐하께선 우릴 실망시키지 않으시네요.”

진강이 콧방귀를 뀌었다.

“한 사람당 백은 거뜬히 상대할 병마 5만을 가지고도 어인관을 함락하지 못하면 그거야말로 폐물이지.”

사방화는 새초롬하게 눈을 떴다.

“좋은 병사도 훌륭한 장군을 만나야 하는 법이에요. 폐하께서 계획을 잘 하셔서 완승을 거두신 건 확실하잖아요.”

진강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고 사방화를 품에 안았다.

“나였다면 훨씬 더 빨리 이뤘을 것이오.”

사방화도 웃으며 진강을 꼭 안아주었다.

“맞아요, 우리 낭군님이 얼마나 대단한데요. 폐하는 비교도 안 되죠.”

진강도 금세 마음이 다 녹아내렸다.

“역시 우리 부인밖에 없소.”

부부가 한참 웃으며 농담을 나누던 그때, 설성 사야가 황급히 달려왔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소왕야께서 말씀하신 분들은 나타나질 않으십니다. 벌써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나고 전염된 이들도 늘어갑니다. 소왕야, 제발 좀 나서주십시오.”

진강은 살짝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곤 말했다.

“뭘 그리 급하게 구시오? 올 사람은 올 텐데.”

“백성들이 쓰러져가고 있으니 문제지요. 설성은 지금껏 백성들의 안위를 지켜왔는데, 그분만 오시길 기다리다가 죽는 백성이 있을까 걱정입니다.”

진강이 사방화를 바라보자, 사방화가 사야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위중한 사람을 이리로 보내줘요. 내가 한번 봐주지요.”

진강은 즉각 반대했다.

“안 되오! 그러다 당신이 옮으면 어쩌려고?”

“그럼 멀리서 보기만 할게요. 언신의 의술보단 못해도 어느 정도는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겠어요? 살리진 못하더라도 우선 방법은 생각해 내야죠. 어쨌거나 당신과 언신이 내기를 하면서 벌어진 일에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니 이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진강도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 * *

진강과 사방화는 사야를 따라 상태가 위독한 환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진강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 멈춰서, 사방화를 안전히 보호했다. 사방화 역시 진강의 손을 잡고 멀찍이서 환자들을 보며 말했다. 

“미간 양쪽이 까맣게 변한 걸 보니 분명 중독은 맞는데 그 외에 다른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간 양쪽이 까맣게 변하고 온몸이 나른한데다 손발이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초반엔 힘겹더라도 걸음은 뗄 수 있는 정도였지만, 하룻밤이 지나자 아예 걷질 못하고 있습니다. 소왕비마마, 해독법이 있겠습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증세를 유발하는 독은 나도 처음 봤어요. 섣불리 약을 썼다간 부작용을 일으킬 것 같아 감히 시도하진 못할 것 같네요. 언신은 내 의술 실력을 매우 잘 알고 있죠. 내 실력까지 고려해 독을 썼을 테니 내겐 절대 해결책이 없단 것과 마찬가지예요.”

사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근데 하루 정도 더 버틴다고 큰일이 날 것 같진 않아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만약 해가 지기 전까지 아무도 오지 않는다면 언신에게 도움을 구하고 나랑 서방님은 설성을 떠나도록 할게요.”

사야는 떨리는 눈으로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방화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낭군님도 지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은 아니에요. 곧 죽어도 설성의 용병을 얻어내고자 하는 건 아니니까요.”

진강도 사방화의 말에 화답하듯,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를 뒤흔들 위력을 가진 설성의 10만 용병을 가진다면 좋긴 하겠지만, 아직 제대로 보질 않았으니 없어도 상관없소.”

진강은 그렇게 사방화의 손을 잡고 머물던 거처로 향했다.

사야는 떠나는 부부를 바라보며 참으로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곧 진 영감이 다가와 사야에게 말했다.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선 다 깊은 인의를 지니신 분들이십니다. 또 천하를 품은 도량과 백성을 아끼시는 마음도 지극하시지요.”

사야도 진 영감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저분들을 따르는 거였습니까?”

진 영감이 조용히 말했다.

“꼭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요. 천계산에서 빠져나온 뒤, 반평생을 지옥같이 살아오다 소왕비마마를 뵙게 된 후에야 진정한 현자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두 분께선 당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살아가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설성에 있는 사야와 많은 분들은 스스로 뭘 원하는지, 살아가는 이유가 뭔지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

사야는 살짝 콧방귀를 뀌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부러 어수룩하게 행동하기란 쉽지 않지요. 천계산이 불바다가 된 마당에 굳이 삶의 이유까지 알아서 어디다 쓰겠습니까?”

“천계산이 불바다가 됐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선 아무런 관계가 없지요. 어쨌거나 전 남은 반평생은 소왕야와 소왕비마마 곁에서 생사를 함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야는 다시 또 콧방귀를 뀌었다.

“회임한 지도 벌써 3달이 넘었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겁니다. 근데 무슨 반평생까지 기대하는 겁니까?”

“그럼 좀 어떻습니까? 한평생 지옥을 살아가는 것보단 낫지요. 제 두 눈으로 직접 매족의 진정한 멸망을 볼 수 있으니 그 또한 복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 매족인에게 천계산의 불바다는 마음에 자리 잡은 큰 산과 같습니다. 그 산이 진정 멸망한다면 우리도 더는 힙겹게 살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사야는 더 이상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고, 진 영감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곤 자리를 떴다. 

사야는 진 영감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상념에 젖었다. 진 영감은 자신과 동년배지만 어쩐지 그가 더 젊게 느껴졌다. 그 또한 사람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려나. 지금껏 설성에 있던 사야는 편안히 삶을 살아온 기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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