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4화. 양국의 형세 (2)
뜰에 들어서자 희미한 약 냄새가 풍겨왔다.
곧이어 집사가 입구에서 이목청이 왔음을 고했고, 잠시 후 노설영이 나와 이목청에게 인사를 올렸다.
“이 대인, 안으로 드시지요. 아버지께서 약을 드시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우시니 이 대인께서 좀 타일러 주세요.”
이목청은 옅게 미소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침상에 반쯤 기대 있는 좌상은 며칠 새 엄청나게 야위어져 있었다.
“좌상 대인, 괜찮으십니까?”
이목청이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자 좌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답했다.
“조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어서 가보시게. 난 괜찮으니.”
이목청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째 몸져누워계셨는데도 호전되질 않으셨잖습니까. 약도 안 드시겠다고 하셨다기에 마음이 놓이질 않아 이리 찾아왔습니다. 연지루를 지나오던 길에 사봉 부인도 뵀고요. 제게 말씀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좌상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슨……, 말?”
이목청은 곧 사봉이 했던 말을 그대로 좌상에게 전해주었다.
잠시 후, 좌상의 안색은 급변했고 그는 몸까지 덜덜 떨다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 이목청은 서둘러 그에게 물을 건넸지만, 좌상은 손을 내저으며 눈을 감고 잠시 말이 없었다.
이어, 이목청이 한쪽 의자에 앉아 말했다.
“사봉 부인 말씀이 옳습니다. 20년이 지난 일인데 대인께선 어찌 그리 지난 세월에 목을 매십니까.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은 생이별이냐, 사별이냐일 뿐 아니겠습니까.
대인께선 이미 생이별의 아픔을 느끼셨으니 사별까지 느끼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사봉 부인께선 북제에 가신 후에야 회임하신 걸 아셨습니다. 아이를 지울 수도 있었지만, 북제의 황후마마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며 대인과의 아이를 낳으신 겁니다. 그럼 두 분의 연정도 헛되지 않은 것 아닙니까?”
눈을 꼭 감은 좌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봉 부인은 거대한 대의를 품으신 분입니다. 이 천하에 그런 인물이 몇이나 될까요? 부인이 바로 그런 분이셨기에 지금의 결과도 만들 수 있었던 겁니다. 대인께선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믿으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믿습니다. 대인과 사봉 부인의 인연은 그리 깊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좌상은 계속해서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인생을 살면서 가장 무서운 것이야말로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발밑엔 깊은 못이 있고 고개를 들면 푸른 바다와 하늘, 또 아래엔 땅이 끝없이 펼쳐져 있지요. 대인, 잘 생각해 보십시오. 사봉 부인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전하신 것만으로도 이미 그 속은 말이 아니실 겁니다.”
좌상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빛엔 수많은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고, 입술 사이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국세가 이리도 긴장된 상황에 자네에게 짐까지 떠안게 만든 것도 모자라 모범을 보여야 할 윗세대가 자네의 위로까지 듣고 있으니 참 면목이 없네.”
“대인,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어서 일어나시어 저와 함께 짐을 떠안아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이목청이 웃으며 말하자 좌상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내오거라!”
좌상의 외침에, 밖을 지키던 이들은 드디어 약을 먹겠단 의지에 기뻐하며 서둘러 약을 가지러 향했다.
이내 좌상은 약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뒤, 이목청에게 말했다.
“경가가 내 친아들이란 게 아직도 믿기질 않아.”
“강 소왕야, 소왕비마마, 폐하까지 알고 계신 사실이니 틀림없습니다.”
좌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 날 저버리진 않았던 거야. 북제로 시집가기 전까지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그 사람을 붙잡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했어. 그리고 이 긴 세월 나 홀로 의미 없이 한을 품어 왔으니 참으로 미안하군. 그래, 벌써 20년이나 지났는데 내려놓지 못할 게 있나? 나만 내려놓으면 되는 거지.”
이목청은 말이 없었다.
“자네 말대로 우리 인연이 깊지 않았던 탓이겠지. 남진으로 돌아왔어도 북제의 황후인 사람이고 내게도 아내와 첩실이 있으니.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또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이대로 가야겠지.”
“예, 대인께서 편안해지신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겁니다.”
“경가 일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겠네. 그간 바깥 형세는 좀 어땠나?”
이목청이 간략히 이야기하자, 좌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변경으로 가시는 게 탁월한 선택이셨군. 그걸 계속 막기만 했다니 나도 참 진정 늙은 것 같아.”
“좌상 대인, 어서 기운을 차리시는 데에만 신경 쓰십시오. 대인께서 계시질 않으니 빈자리가 큽니다.”
좌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목청도 이제 좌상의 안색이 많이 나아진 듯해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 * *
방을 나서자마자, 노설영이 다가왔다.
“이 대인,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목청도 노설영이 할 말이 있음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맙습니다.”
노설영은 좌상부 대문까지 이목청을 배웅했다.
“아버지께선 그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어머니께서도 아버지께 쫓겨나시면서 몇 번이나 욕을 먹고 눈물로 밤을 지새우셨어요. 이 대인이야말로 아버지 방에서 가장 오래 머물다 가시는 분이네요.”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좌상 대인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노설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말입니다. 대체 아버지께서 왜 그러시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는데 이제야 알겠습니다. 전 아버지를 이해해드릴 순 있지만, 어머니께서 상처받으시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간 어머니께서도 정말 힘드셨거든요.”
이목청이 말했다.
“좌상 대인께서도 멀리 내다보실 테니 더 이상 걱정 마세요.”
노설영도 그의 말뜻을 이해한 것인지 더는 무엇도 묻지 않았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살펴 가세요, 이 대인.”
이목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상부를 떠났다.
* * *
이튿날, 좌상은 마침내 조정에 올랐다.
역시 마음의 병은 지극한 위로로 치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젠 이목청의 짐도 한결 가벼워졌고, 설성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가고 있지만 이목청, 좌상을 더불어 대신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남진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에 반해, 북제는 더없이 긴장된 분위기였다.
남진의 황제 진옥이 출정해 전선에서 무차별적으로 거센 공격을 퍼붓자, 북제도 좀처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인관이 아무리 북제의 천험지라도 함락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겠는가.
그러다 설성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에, 북제는 다시 기대에 들끓었다. 언신이 이 기회에 설성을 수복한다면 그래도 승산이 있지 않겠는가. 이마저 실패로 돌아간다면 북제는 정말 위태로워질 터였다.
북제 황제도 곧 자신이 나가 직접 정벌하겠다는 뜻을 선포했다. 남진의 황제도 변경에 나와있는데, 그가 어찌 북제 황성에만 머물 수 있겠는가.
황태자 제언경도 줄곧 옥가의 지지를 받으며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이 살아왔지만, 중상을 입으니 진옥의 적수로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아마도 진옥과 제언경의 차이는 자라온 환경과 큰 연관이 있는듯했다.
진옥은 어릴 적부터 사촌 형제 진강과 허다하게 힘을 겨루고 다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제언경은 사운계가 북제로 돌아와 신분을 밝히기 전까진 북제 황제의 유일한 자손이었고, 태후와 옥 귀비, 옥가의 대폭적인 지지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존귀하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그래도 제언경 역시 모략을 꾸미는 데에 재주가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진옥에 비하자면 태평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가 이 서슬 퍼런 전쟁터 위에 감히 진옥의 상대가 되겠는가.
이대로 진옥의 거센 공격이 계속 이어진다면 어인관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언신이 설성을 탈환한다고 해도 결과를 되돌리기엔 큰 어려움이 있을 듯했다.
북제 제일의 천험지, 어인관까지 기세가 이어지자 북제도 더는 쉽게 넘어갈 순 없는 상황이 됐다. 그에 북제 황제도 직접 정벌의 뜻을 밝힌 것이고, 반대하는 이들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곧 북제 황제도 철저한 계획 끝에 병사들을 이끌고 어인관으로 향했다.
* * *
설성 사야가 파견한 이들은 언신은 막진 못했지만, 나름 효과는 있었다.
언신은 예정보다 반나절 늦게 북제로 도착했으나 어인관은 이미 반 시진 전에 남진에게 함락된 뒤였다.
어인관에 남진의 깃발이 걸린 것을 보자 언신은 일순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말은 입에 거품을 물고 숨을 거뒀다.
말이 죽을 정도로 질주했지만, 어인관은 이미 남진의 지반이 된 것이었다.
설성도 남진을 돕지 않았지만, 진옥은 끝내 자신이 거느리던 병사들만으로 어인관을 손에 넣었다. 이는 언신이 알던 남진의 병력으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남진에 또 다른 지원군이 있었다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언신은 어인관에 걸린 남진의 깃발을 한참 바라보다 뒤쪽을 향해 말했다.
“여봐라!”
“예, 공자님.”
“북제 상황은 어떠냐?”
“태자전하께선 군사를 이끌고 옥하파(玉霞坡)로 철수하셨답니다.”
“어인관에서 200리나 떨어진 옥하파로 철수했다고? 북제가 어찌 순식간에 200리까지 철수했단 말이지?”
언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태자전하께서도 어인관까지 후퇴한 뒤 만반의 계획을 세우고 있으면 공자님께서 돌아오시기까진 충분히 남진 황제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어마어마한 병사들이 막강한 기세로 공격을 가세했고, 사상자가 늘어 저항할 여력도 남지 않자 할 수 없이 후퇴하셨던 겁니다.
어인관으로부터 100리 이내는 모두 평지라 거처를 마련할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 상태로는 남진의 사기를 버텨낼 방법이 없어 태자전하께서도 결국 옥하파까지 철수하시기로 한 겁니다.”
말없이 듣고 있던 언신이 입을 열었다.
“남진에 대체 어떤 지원군이 있는 건지 속히 알아내도록 하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언신은 쓰러져 죽은 말과 어인관을 보다가, 산길을 돌아 옥하파로 향했다.
* * *
한편, 어인관을 쟁취한 진옥은 그 누구라도 북제 백성들을 억압해선 안 될 것이며 이를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 명했다.
진옥의 명령을 따라, 사묵함도 군령을 따라 엄격히 집행할 것을 분부했다.
어인관이 너무 빨리 함락된 지라, 북제 백성들도 어인관이 이제 남진의 지반이 됐다는 걸 인지하는데 꽤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백성들은 공포와 슬픔에 사로잡혔고, 때로는 서글픈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나라가 망하면 백성들도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남진의 황제 진옥이 북제 백성들을 억압하지 말라며 군기를 지키게 하자, 공포에 질려 이리저리 울부짖던 백성들도 차츰 마음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남진의 기율이 엄격하다고 느끼는 동시에 남진의 황제가 백성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걸 느끼자 공포심도 차츰 옅어졌다. 그리하여 완전히 긴장은 놓지 못하더라도, 평소와 같은 생활은 유지할 수 있었다.
진옥은 이렇듯 어인관을 손에 넣었지만, 승리에 따른 기쁨도 없었고 술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없이 평소처럼 정비하란 명만 내렸다.
사묵함도 밤늦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진옥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