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0화. 또 다른 속셈
잠시 후, 드디어 언신이 들어섰다.
그는 휘장과 등불을 따라 안으로 걸어오다가, 한편에 앉아 있는 진강과 사방화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진강은 먼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언신 공자, 여전히 무탈하시지요?”
언신은 그냥 진강을 무시한 채 사방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회임한 지 석 달이 넘으니 이제 사방화의 아랫배도 눈에 띄게 볼록해져 있었다. 거기다 한시도 아랫배에서 손을 내리지 않는 모습을 보니, 아이를 무척이나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곧 사야가 앞으로 나가 언신에게 공수를 올렸다.
“소국구, 이리 늦은 밤에 방문해 주셨는데 성주께서 계시질 않아 송구합니다.”
언신도 이내 사방화에게서 시선을 떼고 공수를 올렸다.
“나야말로 이 심야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와 폐를 끼쳐 송구하오.”
“별말씀을요. 안으로 드시지요.”
언신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진강에게 물었다.
“주인님과 정화곡으로 가시던 것 아니셨습니까? 어찌 설성에 계십니까?”
“운란 형님과 제운설을 못 찾았습니다. 설성의 병력을 쟁취하는 것이야말로 이 싸움의 관건인데 언신 공자께서 채가실까 서둘러 왔지요.”
언신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우리 사이에 숨길 건 없겠지요. 저도 설성의 병력을 위해 온 것입니다.”
“실망시켜 드릴 것 같아 미리 말씀을 좀 드려야겠군. 공자에게 절대로 설성 병력을 넘겨줄 의향은 없습니다.”
언신은 사방화를 힐끗 보고는 천천히 말했다.
“지금쯤이면 주인님께서도 회임한 지 석 달은 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일심전력으로 남진의 군사에만 힘쓰면 두 분 일은 언제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따로 떨어져 움직이지 않고 이대로 죽을 작정입니까?”
“목숨도 중요하지만, 나라를 잃어서도 안 되지 않을까?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거라면 일전에도 많이 해왔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목숨 하나를 위해 온 사기를 다 하고 있긴 하다만 이 정도야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요.”
“그럼 제게 지금 빈손으로 돌아가라 이 말씀입니까?”
“뭐 그럼 내 눈앞에서 설성을 어떻게 해보기라도 하려고?”
진강이 눈썹을 들썩였다.
“저보다 먼저 오신 걸 보니 일찌감치 설성에 계획을 세워두었던 것 같군요. 이제 와 어떻게 해보려 해도 어렵겠네요.”
“어려운 게 아니라 아예 시도조차 못 하는 거지. 말은 똑바로 합시다.”
언신이 고개를 저었다.
“미리 계획이 있었다 해도 너무 그리 자신만만하게 굴진 마십시오. 제게도 계획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소왕야 앞에서 설성을 건드리긴 그리 쉽지 않겠지만, 완전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절 빈손으로 가볍게 돌려보내는 것만큼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럼 어쩌자고?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날 순 없지요.”
“좋지. 아주 거하게 상대해 드리리다. 내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난 언신 공자가 설성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데 걸겠습니다. 만약 공자가 내 눈앞에서 설성을 움직인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꺼져주겠습니다.”
“반대로 제가 설성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제가 물러나야겠지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예, 해봅시다.”
“3일 기한으로 합시다. 부족한 거 같으면 시간을 더 줄 수도 있고.”
“괜찮습니다. 3일로 하시지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고. 사야께서도 성주와 연락이 닿는다면 한시라도 빨리 알려주시오. 늦게 왔다간 설성이 무너지고 없을지도 모르니까. 난 절대 이 내기에서 설성을 두고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소.”
사야는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은 곧 사방화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사야, 뜰 하나만 내주면 고맙겠소. 우리 소국구도 한 자리 필요하시겠군.”
사야는 고개를 끄덕인 후 진강과 사방화, 언신에게 머물 곳을 내주었다.
* * *
두 거처는 멀찍이 떨어진 곳이 아닌, 상대적으로 가깝게 붙어 있었다.
사방화는 결국 오랜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언신, 넌 북제를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어?”
언신은 발걸음을 멈칫하다 사방화에게 말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 힘과 마음이 닿는 곳까진 하게 되지 않을까요.”
진강이 픽, 웃음을 지었다.
“웃기고 있네. 그날 내가 도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막아서기에 난 제운설을 끌어들였었지. 뭐 그 정도는 진정한 싸움이라고도 볼 순 없지만, 만약 이번에 공자의 능력으로 내 눈앞에서 설성을 빼앗는다면 다시는 설성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조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더 이상 설성 병마에는 손도 댈 생각 마시오. 북제를 지키고 싶다면 쓸데없는 생각은 금물입니다.”
“알겠습니다.”
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공자가 어떻게 나올지 두고 보겠습니다.”
진강은 그렇게 사방화의 손을 잡고 뜰로 들어섰다.
언신은 잠시 멈춰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 그보다 더 쓸쓸해 보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 * *
사방화는 방으로 들어와 세욕을 하고, 창가에 서서 밖을 쳐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어두컴컴한 밤이었지만, 곳곳에 켜진 설성의 등불이 환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남진과 북제보다도 더 오래된, 몇백 년 전부터 이 땅에 우뚝 솟아 흔들림 없는 자리를 지켜온 설성은 칠흑 같은 이 밤도 이토록 번성했다. 그러나 이 천성은 진강과 언신 앞에서 어떤 운명으로 치닫게 될까.
사방화는 좀처럼 생각해도 도무지 상상도 되질 않았다.
그때, 진강이 뒤에서 사방화를 꼭 안아왔다.
“무슨 생각 하시오?”
사방화도 천천히 진강의 가슴에 기댔다.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겐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있잖아요. 저도, 당신도, 언신도. 세상 그 어느 누구라도. 수천 년간 이 자리를 지켜온 설성도 그 존재의 신념이 있을 거예요.
설성 성주가 당신과 언신이 설성을 걸고 내기를 한다는 소식에 곧장 돌아올까 생각 중이었어요. 어쨌든 성주가 돼서 설성이 남의 손에 넘어가도록 두고 볼 수만은 없는 거잖아요. 지금껏 설성도 명성을 거저 얻은 게 아니라 양국 사이에 우뚝 설 만한 진정한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진강이 순간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떻게든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고 그랬던 것이오.”
사방화는 깜짝 놀랐다.
“언신과 내기를 한 게 그래서였어요?”
진강은 편안히 사방화의 머리 위에 턱을 괴고 창밖을 보며 말했다.
“굳이 설성의 병력을 가질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고 북제가 갖게 할 수는 없소. 지금껏 오래도록 외정에 간섭하지 않은 이상 계속 그 뜻을 이어나가는 게 나아. 원하는 게 없다면 설성을 놓아줄 수도 있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어?”
* * *
진강과 언신이 내기를 건 그날 저녁, 사방화는 진강에게 또 다른 속셈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어 금세 잠들었다.
진강은 잠들어서도 아랫배에서 손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방화를 보고, 가슴이 미어졌다.
사방화는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일지 모른다. 아무리 고단한 짐을 짊어지고 있어도, 복잡한 세상사를 가슴속에 품고 있다 하더라도, 사방화는 언제나 신념을 고수하며, 강인하고 또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충용후부, 사씨, 남진 강산, 아이까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사방화는 늘 의연하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진강은 다시 한번, 이 사방화란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 다시 없을 최고의 행운이라 생각했다.
이제 두 사람 앞에 아무 미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진강은 사방화의 신념을 지켜주기 위해 승부수를 던지고 싶었다.
진강은 그렇게 사방화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침상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사방화는 잠들어 있었음에도 순간 자신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진강의 손을 잡았다.
진강이 멈칫하며 돌아보자, 사방화가 말했다.
“어디 가세요?”
진강은 허리를 숙여 사방화의 귓가에 살포시 속삭였다.
“편히 주무시오. 잠시 밖에 나갔다 올 테니.”
사방화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놓았다.
진강은 다시 사방화에게 입을 맞추곤 방을 나섰다.
사방화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또 잠이 들었다.
이내 진강은 밖으로 나가 청암을 불렀다.
“청암.”
“예, 소왕야.”
청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굴 좀 만나고 올 테니 방화를 잘 지키거라.”
청암이 인사하자, 진강은 뜰을 빠져나가 모습을 감추었다.
* * *
진강이 백방으로 신경 써 주긴 했지만, 사방화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이튿날 정오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곁엔 곤히 잠든 진강이 누워있었다.
사방화는 일어나려다 옷을 입고 잠든 진강을 보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어젯밤에 나갔던 그는 너무 피곤해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 한듯했다.
진강은 잠든 모습마저도 무척 아름답고 어여뻤지만, 무명산에서 막 돌아와 처음 만난 그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야윈 것이 느껴졌다.
그때의 진강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찬란했었다. 그러나 지금 진강은 여전히 아름답긴 하나, 왠지 모르게 좀 날카로운 빛이 깃들어 있었다. 꼭 거대한 호수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처연해 보이기도 했다.
진강은 편히 잠들 수조차 없었다. 그에 사방화는 자신이 짊어진 짐은 그에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날이 갈수록 그가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소왕비마마.”
그때, 밖에서 시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화가 곧 고개를 돌리니 창과 문이 굳게 닫혀있음에도 고요히 스며든 햇살이 보였다. 해는 이미 중천에 뜬 것 같았다.
이내 사방화는 천천히 진강의 손을 놓고 침상을 내려와 옷을 챙겨입었다. 막 밖으로 나가려는데, 짙게 깔린 진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진강은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시화가 불러서요.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주무세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는 문을 꼭 닫아준 후 밖으로 나갔다.
* * *
“응, 시화야. 무슨 일이야?”
“마마, 조금 전 폐하께서 평산곡 대영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뭐? 폐하께서 황성을 나오셨다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변경에 가셔서 사 후야와 합류까지 하셨대요. 어젯밤 축시(*丑时: 새벽 1~3시)에 대거로 흥병(*興兵: 군사를 일으킴)하시어 막북 군영을 탈환하고 단숨에 북제 대영까지 점령하셨다고 합니다. 북제는 후퇴해 어인관(渔人关)까지 물러났지만, 폐하께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인관을 치고 계신다고 해요.”
사방화는 옆 뜰을 힐끗 봤지만, 높게 쌓인 담장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럼 어제 언신과 우리가 앞다투어 설성에 도착했을 때쯤, 폐하께선 막북 군영을 공격하셨다는 거야?”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때쯤일 겁니다. 소인도 좀 전에 들은 소식입니다.”
사방화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다 말했다.
“한밤중 남진이 북제 어인관을 쳤다고? 폐하께선 지원군을 데려오셨어?”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 소후야와 최 시랑의 병마가 도착했고, 폐하와 사 후야께서 즉시 출병하셨답니다.”
“지원군이 하루 앞당겨 도착해 암암리에 다듬었던 게 분명해. 그게 아니면 그 먼 길을 달려온 지원군이 쉬지도 않고 곧장 북제 군영을 넘어 북제 군이 후퇴한 어인관까지 쳐부술 수 있겠어?”
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는 한숨을 내쉬었다.
“언신도 이건 몰랐겠지? 제언경도 아직 완벽하게 몸을 회복한 게 아닌 데다 옥운수라면 더더욱 감당할 수가 없으니 말이야. 폐하께서 정말 신의 한 수처럼 시기를 잘 잡으셨어. 남진이 기회를 잡았으니 이대로 폐하께서 사기를 올려 어인관까지 점령하게 된다면, 이제 언신이 설성의 10만 병마를 손에 쥐더라도 어인관을 탈환하긴 힘들 거야.”
시화가 말했다.
“이제야 마마께서도 마음 편히 복중 아기씨를 돌볼 수 있게 되셨네요.”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언신이 좌절하는 건 별로 원치 않지만, 북제가 무너졌으면 좋겠어. 소등자는? 어서 불러와.”
“부엌에서 보양식 준비하는 걸 지켜보고 있는데 바로 불러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