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9화. 설성에서 만나다
내원 객실에 다다라, 사야가 진강, 사방화에게 차를 대접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지금 정화곡에서 오신 겁니까?”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야가 말했다.
“천계산엔 들어가지 않으셨지요?”
다시 이어진 질문에, 진강이 사야를 바라보았다.
“어찌 아셨소?”
“사실 설성은 천계산과 연관이 있습니다. 외세에 있었던 분족이 바로 천계산에 있었지요. 하지만 1,100년이래 천계산 혈맥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면서 더는 천계산 사람이 아니게 됐습니다. 하늘이 천계산을 멸하려 불바다로 만들었으니, 천계산 정통 혈맥인 소왕비마마께선 들어가지 못하시는 겁니다.”
“사야께서도 천직당에 계셨던 분이오?”
진강의 물음에, 사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왕야께서 천직당을 아시는 걸 보니 진위(陈炜)가 말해준 것 같군요. 지금까지 설성에 한 번도 오질 않아 살아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날 있었던 재난에 견디지 못하고 죽은 줄 알았지요. 물론 당시 장로들께서 지켜주시긴 했지만, 현재 남아있는 사람은 몇 안 됩니다.”
진강은 곧 고개를 돌려 진 영감을 찾았다.
“진 영감, 들어오게.”
사야도 특별히 말리지 않았기에, 진 영감이 들어와 사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말을 이었다.
“특별한 이유로 뒤늦게 천직당에 합류한 데다 술법도 익히지 못해 천계산의 내무와 바깥 상황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습니다. 며칠 전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걸 듣고 비로소 설성과 천계산이 연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지요. 일찍이 알았다면 지금껏 밖에서 그리 떠돌지 않았을 겁니다.”
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그 당시 살아남은 사람은 몇 없었습니다. 난 란 장로와 함께 설성으로 와 살아남게 됐고 어린 왕자님, 어린 성녀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드디어 그 행방을 알아냈지만 도착했을 땐 이미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그때, 진강이 물었다.
“그 어린 성녀님이 방화의 어머님을 말하는 것이오?”
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강이 다시 또 물었다.
“그럼 왜 방화를 데리고 설성으로 오지 않았소? 힘들게 찾아낸 두 사람의 후손을 데리고 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운 도장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는 박릉 최씨 가문에서 성녀의 행적만 찾아냈을 뿐, 왕자의 행적은 몰랐습니다. 자운 도장께선 알고 계셨지만 죽어도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지요. 자운 도장께선 이 또한 하늘의 뜻이니 거역할 수 없다며 운명을 거스른다면 천계산뿐만 아니라 설성도 지켜내지 못할 거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와 란 장로도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요.”
“그 왕자라는 사람이 매족 왕실 후계자 혈맥이었소?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소?”
다시 진강이 묻자, 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운 도장께서 그리 꼼꼼히 숨기셨던 왕실 혈맥이 청운관 왕가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왕의안이 매족 왕실 후계자라는 걸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오?”
“한 달 전이었지요. 자운 도장께선 임종을 앞두고도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란 장로께서 아드님을 살리기 위해 천라반의 술법을 쓰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몰랐을 겁니다. 그로 인해 란 장로께선 세상을 떠나셨지만요.”
사야의 답변을 듣고, 진강이 물었다.
“어째서 성주 얘기는 없는 것이오?”
“성주께선 이 일에 단 한 번도 신경 쓰신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뭐?”
“소왕야께선 언제든 설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계시고 소왕비마마께선 성녀 일맥 후계자의 신분을 타고 나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전부 말씀드렸습니다. 설성을 지키는 것이 성주의 책임이니 그 밖의 일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지요.”
“지금껏 설성의 성주들에겐 자식 하나 없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떻게 대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거지?”
“설성 후계자들은 운명에 따라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선 설성의 비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진강이 눈썹을 들썩였다.
“그럼 현재 설성의 성주는 나이가 어떻게 되오?”
사야가 고개를 저었다.
“소왕야, 그 또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성주께선 줄곧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셨을뿐더러 외부 세계에 물들지 않길 원하셨어요.”
“그래? 근데 정화곡에 있던 병기 창고는 신문물이나 다름없던데.”
“정화곡의 병기 창고는 설성의 생존을 위해 지어진 겁니다. 남진과 북제 양국이 설성을 손에 넣으려 앞다투고 있는 게 사실이잖습니까. 설성에 병마 세력마저 없었다면 일찌감치 양국에 먹혀 사라지고 없었을 겁니다.”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소왕야, 더 물으실 남았는지요? 궁금증이 풀리셨다면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 하룻밤 머무시고 내일 아침 설성을 떠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성주의 명령이 있었지만, 이미 두 분을 안으로 모셨다는 자체만으로도 저는 명을 어긴 것이니 말이지요.”
“내가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니 그리 쉽게 떠날 순 없소.”
“소왕야께선 10만 병마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지만 성주께서도 그 부탁은 들어주시지 않았을 겁니다.”
“내게 병마를 빌려준다면 설성이 무사하도록 지켜주겠다 약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설성이 무너지는 꼴을 보게 될지도 모를텐데?”
“소왕야, 아무리 성주께서 덥석 병마 1만을 내주셨다지만 소왕비마마께서 천계산 성녀 일맥의 후계자란 걸 생각하셔야지요. 혈맥의 뿌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설성을 이리 위협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소인 이미 성주의 명을 어겨가며 두 분을 안으로 모셨고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다 알려드렸습니다.”
“충분히 설성을 무너뜨릴 힘이 있지만, 사야 말씀대로 그 부분을 생각해 손쓰지 않고 있는 것이오. 하지만 내가 손쓰지 않는다고 다른 이도 나서지 않을 거란 법은 없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히 말씀해주시지요.”
“남진과 북제 양국 전쟁에 있어선 어느 쪽이 설성의 병력을 쥐느냐가 관건이오. 내가 물러나면 당연히 누군가 취하려 하겠지.”
“북제도 설성 병력을 탐내고 있단 말씀입니까? 감히 북제에서 누가 설성의 병력을 손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설성은 전쟁은 물론이고 외부 분쟁에도 관여하지 않았고 양국 교전에도 끼어든 법이 없었습니다. 300년 전, 남진과 북제가 피 터지게 전쟁을 치를 때도 무사했던 설성을 누가 어찌하겠습니까?”
사야가 살짝 코웃음을 치자, 진강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300년 전은 300년 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지. 북제 소국구는 이름을 날리진 못했다만, 결코 얕잡아 봐서는 안 될 상대요. 300년 전에 무사했다고 이번에도 과연 그럴 수 있겠소?
30만 병마에 상등 병기까지 더한다면 그 위력이 엄청나긴 하겠지만, 무너뜨리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오. 내 추측대로면 옥언신은 남진이 평산곡으로 후퇴하고 난 뒤 반드시 설성으로 향했을 것이오. 시간상으로 보자면 오늘 안에 어김없이 오겠군.”
진강은 사야가 말을 잃고 미간만 찌푸리고 있자,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방화와 진 영감 역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던 중 누군가 밖에서 외쳤다.
“사야! 성 밖에 북제 소국구 대인께서 오시어 성주를 뵙고자 하십니다.”
“지금 말이냐?”
사야가 깜짝 놀라 말했다.
“그렇습니다. 성주께서 안 계신다고 말씀드렸사오나 주사를 뵈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진강은 나른히 사야를 바라보며 엷게 웃어 보였다.
사방화는 순간 생각에 잠겼다. 이리 밤늦은 시각, 설성까지 찾아오다니. 언신은 당연히 설성의 병력을 위해 이 수고를 아끼지 않은 것일 터였다.
언신은 아버지 옥조천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그는 북제의 존귀한 소국구였다. 설령 옥가가 원하는 옥언신은 아니라고 해도, 옥가의 숙원을 받들어 성장한 또 다른 옥언신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순간, 사방화는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결국 다 얄팍한 운명이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인가.
그때, 사야의 목소리가 사방화의 생각을 깨웠다.
“북제 소국구께서 오셨다니 두 분께선 잠시 자리를 피해 계십시오.”
하지만 진강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피할 게 뭐 있어? 우리도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데. 그냥 여기 있겠소. 방화, 어떻게 하겠소?”
“응, 좋아요.”
사방화도 동의하자, 진강은 즉각 알아서 결정을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합시다.”
사야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밖을 향해 소리쳤다.
“북제 소국구를 모셔오너라.”
* * *
깊은 밤, 사방화, 진강, 언신이 앞다투어 설성에 와 서로를 만나게 된다는 건 참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양국이 서로 바라는 바가 다르다는 건 모두가 분명히 아는 사실이었다.
사방화는 남진을 위해 흥병을 일으키려 하고, 사묵함도 군의 사령탑이기에 사방화는 반드시 남진의 입장을 굳건히 관철할 것이다.
언신 역시 그의 신분과 현재 북제 군에서의 지위가 말하듯 북제의 입장을 공고히 할 것이다.
이렇듯 각자 입장이 다른 셋은 결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진강도 사방화의 마음을 느끼고 손을 꼭 잡아주자, 사방화는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사람은 언신이니, 지금의 옥언신은 저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진강은 애틋한 눈빛으로 사방화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사방화는 또 즉각 그를 째려보았다.
“당신이 이렇게 사람을 잘 달랠 줄은 몰랐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아가네요.”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전엔 당신이 내 장점을 몰랐던 것뿐이야.”
사방화가 실소했다.
“장점이 채 보이지도 않을만큼 단점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 저더러 어떻게 알아보란 말이에요?”
진강은 이내 나른하게 자신의 턱을 괴며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내 장점을 온 세상에 알릴 수 있을지 연구를 좀 해봐야겠군.”
사방화는 웃으며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한편, 사야는 두 사람이 현재 농담을 나누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진 영감은 한쪽에서 여전히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곧 사야가 진 영감에게 다가가 물었다.
“왕의안을 만나본 적 있소?”
진 영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겼소?”
진 영감이 왕의안의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해주었다. 그러자 사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계산의 불이 언제쯤 꺼질지 모르겠군. 벌써 몇십 년째 저러니, 원.”
진 영감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천계산에 붙은 불을 끌 수 있습니까?”
“강력한 통천술로 불바다를 없애버리거나 매족의 혈맥이 끊기면 불도 자연스럽게 꺼진다오. 근데 그 강력한 통천술을 쓸 수 있는 자가 어디 있겠소? 자운 도장께서도 해내지 못하셨는데 오늘날은 어림도 없지. 매족 혈맥을 끊어버린다면…… 매족도 영원히 사라지게 될 테고.”
진 영감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때, 사방화가 물었다.
“통천술이 뭐죠?”
사야는 곧장 공손하게 답했다.
“예, 매족의 천술에서도 가장 강력한 술법입니다. 하늘의 힘을 이용해 별을 움직이고 천지를 뒤바꿀 수 있지요. 하지만 지금껏 아무도 써본 적은 없었습니다. 자운 도장께서도 타고나신 엄청난 힘으로 운명을 바꾸시긴 했지만, 매족이 천벌을 받게 될 운수는 바꾸지 못하셨지요.”
자운 도장도 해내지 못한 일이라면 이 세상에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방화도 그래서 더는 무엇도 묻지 않았다.
이번엔 사야가 잠시의 정적을 깨고 물었다.
“소왕비마마께선 매술을 어느 정도 익히셨습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수차례 몸을 다쳐 현재 남아있는 매술도 혈맥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는 것일 뿐, 진정한 수련을 거친 건 없어요. 어느 정도라고 말할 것도 없네요.”
사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회임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3달 좀 넘었어요.”
사야는 다시 진강을 보며 말했다.
“참으로 잘 이어진 인연이긴 하나 안타깝게도 천도에서 어긋나는군요.”
진강은 즉각 코웃음을 쳤다.
“천도에 어긋난다는 그런 것 따위는 믿지 않소.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에 달렸을 뿐, 이 세상에 풀지 못할 난제는 없다는 말을 믿소, 난.”
“자운 도장께서도 소왕야의 이런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하신 듯합니다.”
진강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