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6화. 100리를 철수시키다
설성으로 향하는 길엔 간간히 세상 소식도 들려왔다.
먼저 북제에서 들려온 소식은 옥언신이 북제 군을 접수했고, 태자 제언경을 대신해 병권을 장악했다는 이야기였다. 한 차례 크게 당한 적이 있던 북제 군은 언신의 지휘 덕에 사기를 빠르게 회복했다고 하며, 제언경의 병세도 나날이 호전되어간다고 했다.
또 북제 옥가에선 옥조천이 옥조연이었음을 알리고 국구의 무공이 다해 앞으로 검을 들 수 없음을 밝혔으며, 그간 대를 이어 설립해온 장로당을 없앴다는 소식을 공표했다. 이로 인해 세상은 아주 떠들썩해졌다.
그런데 두 소식의 열기가 가라앉기도 전, 북제 황궁에서 옥 귀비의 회임 소식이 들려왔다. 북제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옥 귀비와 옥가에 큰 하사를 내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방화는 옥 귀비가 회임했다는 소식에 한참을 멍하니 있다, 진강을 바라보았다. 몹시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진강, 옥 귀비가 회임을 했단 게 사실일까요?”
진강도 미간을 찌푸렸다.
“글쎄.”
“옥 귀비가 영강후 부인보다 나이가 많았던가요?”
“비슷했던 것 같소.”
사방화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고모 말씀대로 북제와 남진이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어느 정도로 번질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고모께선 남진 사람이고 조부님 따님이라 돌아오신 거지만, 어쨌든 북제 황제의 돌 같은 마음도 달아오르기 마련이겠죠. 어디까지나 남편이니 기다려 보겠다고 했지만, 고모도 이 소식을 들으시면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어요.”
“당신과 난 고모님이 아니니 절대 알 수 없을 것이오. 그렇지만 지금껏 조용하던 옥 귀비가 고모님께서 남진으로 돌아온 이달에 갑작스레 회임했다는 것도 시기상으로 참 미심쩍소.”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짜 소식일까요?”
진강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짜라면 북제 황제도 참 유치하네. 고모님께선 벌써 20년 가까이 북제에 계셨으니 그만큼 북제 황제를 잘 아실 것이오. 만약 북제 황제가 고모님을 겨냥해 퍼트린 가짜 소식이라면 고모님도 사실인지 아닌지 단번에 아시겠지.”
사방화는 진강을 바라보다 미간을 문질렀다.
“고모도 참 한평생 고생만 하시네요. 지금껏 남진을 위해 북제로 떠나 아들들을 직접 기르시지도 못했는데 이리 돌아와도 좌상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 거기다 북제 황제도 전쟁을 벌이며 적대시하고 있으니.”
진강이 사방화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모든 이에겐 자신만의 길이 있는 법이오. 고모님께서 좌상을 버리고 북제로 시집간 것도 고모님 선택이셨고, 다시 남진으로 돌아오신 것도 마찬가지지. 고모님은 보통 분이 아니니 혼란에 빠질 일도 없으실 것이오. 그러니 걱정 마시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부님이 계시니 우린 아무 소용도 없어요.”
“우리 부인은 말도 참 잘 듣지.”
진강이 계속 머리를 쓰다듬자, 사방화는 결국 그의 손을 잡아내렸다.
“강아지 달래는 것도 아니고, 그만 해요.”
진강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 *
3일이 지나, 막북 변경에서 북제 군이 대거로 막북 군영을 공격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병사를 이끈 것은 옥언신, 제언경은 여전히 요양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이 소식에 사방화는 깜짝 놀랐다.
“당신이 제언경을 공격하고 북제 군을 제패한 지도 20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금방 사기를 회복한 거죠?”
“옥언신이 있으니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진강의 말이 옳았다. 언신의 엄청난 수완이라면, 예상보다 열흘 앞당겨 북제 군을 움직이게 하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연 소후야가 이끄는 지원병이 아직 막북에 도착하려면 멀었겠죠? 오라버니가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진강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암.”
“예, 소왕야.”
“형님께 이만 막북 군은 성을 버리고 철수하라고 전해드리거라.”
청암은 깜짝 놀랐고, 사방화 역시 놀란 듯 진강을 바라보았다.
“철수요? 우리 남진의 첫 번째 방어선인데 이대로 철수한다면 되찾아 오긴 정말 힘들 거예요.”
“사람과 병력만 있으면 문제없어.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 20일 만에 병력을 배치해 총출동시켰으니 막북 군영이 당해낼 리가 없지. 연석이 도착한다고 해도 먼 길을 왔기에 쉬지 않고 맞서는 건 불가능해. 그럴 바엔 잠시 후퇴해 실력을 기르고 다시 싸우는 게 낫소.”
사방화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네요.”
“어서 가거라!”
청암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사방화는 이내 막북 군영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면 설성은 나중에 가고 우선 오라버니와 합세하는 건 어때요?”
“그럴 필요 없소.”
“걱정돼서 그래요.”
진강이 사방화를 바라보며 연하게 웃었다.
“전쟁은 도박처럼 반드시 한쪽이 이기거나 지게 돼 있소. 수비만 할 바에는 힘을 키워 새로운 길을 뚫는 게 나아.”
“어떤 새로운 길을 말하는 거예요?”
진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설성을 바라보았다.
“몇백 년간, 심지어는 남진과 북제가 건국되기 훨씬 전부터 그 어느 쪽도 감히 전쟁으로 설성의 경계를 어지럽히진 못했소. 그러나 이 일대에선 설성이 내게 병사 1만을 내준 적이 있기도 하고 우리 추측대로 매족과 연관이 있다면 아마 돌파구가 있을지도 모르잖소.”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청암은 진강의 분부대로 막북 군영에 매를 날려 보냈다.
사람은 3, 4일은 걸리는 거리라도, 매는 막북까지 자유로이 비상할 수 있기에 이날 늦은 밤, 사묵함에게 서신이 전해졌다.
사묵함은 서신을 보곤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그 뜻대로 분부를 내렸다.
“전군을 막북 군영에서 철수시키고 100리 후퇴하도록 한다.”
그의 명령에 왕귀, 진의와 장수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북제 소국구가 출전해 사상자가 상당할 것 같으니 이대로라면 내일 저녁 무렵도 안 돼 대패할 것 같다는 소왕야의 서신이다. 막북을 지킬 수 없는 이상 무의미하게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해선 안 되니 어서 전군은 철수하라!”
장수들은 내키지 않았지만, 북제의 기세에 버티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기에 사묵함의 명령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동틀 무렵, 남진 군은 성을 버리고 막북 군영을 떠나 100리 후퇴했다.
그리고 북제 군은 남진의 막북 진영을 점령했다.
* * *
이튿날, 남진이 성을 버리고 후퇴해 대패했다는 소식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북제는 소국구 언신의 책략을 찬양하고 당세의 천재라 환호했다.
반면 남진 조정과 백성들은 당황스러운 충격에 휩싸였다.
조회 시간이 되기도 전, 영친왕과 좌상, 영강후를 비롯한 최고 대신들이 우상부 대문으로 모였다.
그러나 이목청은 남진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나왔다.
대신들은 서둘러 이목청에게 다가갔고, 좌상이 제일 먼저 불쑥 물었다.
“이 대인, 폐하께서 소식을 전하셨는가?”
이목청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럼 폐하께선 아직 막북에 다다르지 못하셨다는 거 아닌가? 남진 군이 후퇴했다는 소식은 들었는가?”
“대인들 모두 소식을 접하셨으니 저도 당연히 들었지요.”
이목청이 말했다.
“막북은 남진의 첫 번째 방어선일세. 그 방어선이 무너졌는데 이 대인은 다른 대책이라도 있으신가?”
이어진 좌상의 말에 이목청이 웃음을 보였다.
“막북에서 철수하긴 했지만, 인명피해가 크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쯤이면 폐하께서도 도착하실 거고요. 사 후야께서 철수시키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왕야와 대인들께서도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계시는 한 남진의 안위는 걱정 없을 겁니다.”
대신들도 이목청의 말에 비로소 마음을 좀 놓는 듯했다.
* * *
한편, 언신은 남진이 성을 버리고 철수했단 소식에 아무 말이 없었다.
“막내 숙부, 이대로 기세를 몰아 남진 군을 단번에 박살 내버리면 어때요?”
옥운수가 가까이 다가와 묻자, 언신은 그를 담담히 쳐다보았다.
“대군을 정비하고 내 명령 없이는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 분부해라.”
옥운수는 곧장 불만을 드러냈다.
“지금이야말로 기회잖아요! 남진이 지원군을 얻기 전에 이 기세로 몰아붙이면 쉽게 이길 텐데 무슨 걱정이세요?”
언신이 안색을 굳혔다.
“지금껏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으면서 이젠 병법에 대해 좀 안다는 거냐?”
옥운수가 말했다.
“물론 장로당에서 가르침 받은 적은 없지만, 줄곧 태자전하 곁에 있었기에 병법에 대해선 아는 게 있지요. 막내 숙부, 절 그리 무시하진 마세요.”
“나도 널 무시하고 싶진 않다만, 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 그렇게 만드는구나. 남진이 성을 버리고 100리 철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100리 밖이 어딘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냐?”
“평산곡(平山谷)이 있는 게 전부지 않나요?”
언신이 픽, 웃으며 옥운수를 힐끗 노려보았다.
“그게 전부라고? 가서 지형도나 살펴보거라.”
옥운수는 입술을 삐죽이며 지형도를 펼쳐보았다. 그리고 그도 한참 후에야 뭔가를 크게 깨달은 듯 말했다.
“막내 숙부, 이제 알겠어요! 이곳은 말 그대로 평탄한 지세와 험난한 산봉우리가 있고 깊은 골짜기가 있는 곳이네요. 병사의 험지예요.”
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알아보는 걸 보니 그래도 영 나쁘진 않구나. 뭇사람들은 남진에 막북 변경과 청운관이란 2개의 천험이 있다고만 알고 있지. 그러나 막북 변경이 그저 남진 군영을 가리키는 곳이기만 한가? 틀려도 아주 틀린 생각이다.
청운관이 수비하긴 쉽고 공격은 어려운 험한 지세라면, 바로 이 평산곡은 들어가면 결코 돌아 나올 수 없는 험한 골짜기다. 만반의 준비 없이는 절대 함부로 움직여선 안 돼.”
옥운수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감탄했다.
“그런 뜻이 숨어 있었군요. 막북 군영 하나에만 눈이 멀었어요. 그럼 사묵함의 대군은 아직 물러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군요.”
언신이 말했다.
“100리를 후퇴했으니 후퇴한 것이긴 하나 아직 패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옥운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막내 숙부, 그럼 언제 출병할 수 있을까요? 이대로 남진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있을 순 없잖아요.”
“태자와 상의해볼 테니 우선 군중을 정비하고 있거라.”
옥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향했다.
* * *
언신은 한참 지형도를 살피다 막사를 나와 제언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제언경은 언신의 치료 덕분에 침상에서도 내려올 수 있었고, 지금은 또 한창 탁자에 앉아 군 보고서를 살펴보던 중이었다.
언신이 오자 문 앞을 지키던 이가 그에게 예를 갖췄고, 언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제언경도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막내 외숙, 이틀째 눈도 붙이질 못해 많이 피곤하시지요?”
언신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제언경은 의자를 가져와 그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언신은 자리에 앉는 대신, 탁자에 올려진 보고서와 지형도를 바라보다 제언경에게 물었다.
“태자전하, 전하께선 언제부터 남진 강산을 원하셨습니까?”
제언경은 언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잠시 넋을 잃은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