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화. 다시 만난 의안
진강이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이번엔 진 영감이 그를 불러세웠다.
“소왕야, 주인님께서 깨어나신 걸 보니 더 이상 앞으로만 가지 않으면 별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우선 여기서 기다려 보시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 산에 있던 자가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진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멈췄고, 일행은 큰 바위 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계절은 늦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이곳은 여전히 여름에 멈춰버린 듯 선선한 바람에, 괴석들과 무성한 수풀도 가득했다.
그리고 사방화는 그새 다시 진강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진강은 그런 사방화가 안쓰러워서 가슴이 미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품속의 정인은 점점 더 가벼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진 영감도 근심에 가득 찬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시화, 시묵 역시 사방화에게 행여 큰일이라도 날까 싶어 숨도 죽인 채 사방화만 주시했다.
* * *
반 시진이 지나, 청암이 한 사람과 함께 돌아왔다.
진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서늘한 눈빛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의안?”
시화, 시묵, 소등자도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청운관에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방화에게 속박술을 쓴 그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하지만 그가 정말 진정한 매족 왕실 후계자라면 여기 있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왕의안은 얇고 소박한 푸른 옷을 입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론 고요한 숲 전체가 산바람에 스친 듯 이리저리 휘어져 떨고 있는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때, 사방화도 뭔가를 느꼈는지 즉각 눈을 떠 왕의안 쪽을 돌아보았다.
“왕의안이에요?”
“그렇소.”
진강은 뭔가 감정을 억누르는 듯 마음이 몹시 불안정해 보였다.
왕의안이 정말로 매족 왕실 후계자라면, 왕의안이야말로 사방화와 끈끈하게 연결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사방화 역시 진강의 마음이 편치 않으리란 걸 직감했다. 그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뻗어 나와 심장을 움켜쥐는, 저항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꼭 잡았고, 사방화도 있는 힘을 다해 진강의 손을 잡아주며 그의 마음속 불안을 위로했다.
“저 사람이 누구든, 당신은 하나뿐인 제 남편이에요.”
진강은 이내 손에 힘을 빼곤 사방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시각, 왕의안도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푸른 산을 뒤에 두고 커다란 바위에 앉아 서로를 끌어안은 두 연인은 정말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듯했다. 왕의안은 그렇게 말없이 둘을 바라보았다.
진강도 어느덧 불안함을 덜고, 고개를 들어 담담히 왕의안을 바라보았다.
이내 청암이 진강의 뒤로 다가와 아뢰었다.
“소인이 산을 오르던 중, 왕 공자님께서도 내려오고 계셨습니다.”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사방화가 입술을 뗐다.
“의안?”
왕의안은 일순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리는 듯했지만, 담담히 답했다.
“아직 날 기억하는군.”
이 한마디로 왕의안에게도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매족 왕실 후계자인 그는 사방화와 혈맥이 이어져 있었다. 자운 도장은 관련한 자들을 모두 함께 엮어 운명을 바꿨을 테니, 왕의안에게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도 당연했다.
이는 사방화나 진강도 마찬가지였고, 사운란 역시 매족 왕실 후계자는 아니지만, 자운 도장과 란비의 아들이기에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일 터였다.
그래서 진옥과 이목청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에겐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
이내 사방화가 진강의 품에서 나오려 하자, 진강이 다시 고쳐 안았다.
“움직이지 마시오.”
사방화는 그대로 진강의 품에 안겨 말했다.
“의안, 청운관에선 당신이 왕 장군의 친 아드님이 아니라는 건 몰랐어요. 그땐 그냥 당신을 더 끌어들여선 안 된단 생각에 피했을 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또 온몸에 힘이 빠져버려 한 번 더 실례할 수밖에 없겠네요.”
“더 이상 전생에서 봤던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아니군.”
왕의안은 웃고 있지만, 분명 그 안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사방화 역시 전생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떠올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강은 안색을 굳히고 나섰다.
“네가 도성에 머물던 3년간 나도 네가 왕가 사람이 아닌 건 몰랐다. 우리 황조모님께선 네게 살뜰히 대해주셨는데 황조모님도 알고 계시는 거냐?”
“알면 어떻고 모르면 뭐 어떻습니까. 덕자 태후마마께서 승하하신 후, 강 소왕야 뜻에 따라 황성에서 쫓겨나지 않았습니까? 소왕야께서 원하시던 대로 사방화를 만나지 못했고, 지금 그렇게 꼭 안고 계시기까지 하면서 왜 내게 안색을 굳히는 겁니까? 소왕야 품에서 목숨이 꺼져가는 데도 속수무책이면서 뭐 잘난 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진강의 안색이 더 차가워졌다.
“기척도 없이 속박술을 쓰고 여기 있었단 건 우리가 올 줄 알았던 거냐?”
“그건 모르겠고, 내 뿌리가 있는 곳에 내가 와 있다는 게 이상할 건 없지요. 속박술을 쓴 건 그저 사방화가 죽으면 내 목숨도 끝이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어요. 부활해 이 세상을 다시 살아가는데, 내 마음마저 뜻대로 할 수 없다면 헛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진강은 입술을 깨물며 안색을 폈다.
“벌써 천계산에 들어갔었나?”
왕의안이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면 죽는다는 걸 아는데, 뭐 하러 들어가겠습니까?”
진강은 사방화를 꼭 껴안고 눈썹을 들썩였다.
“분명 살 방법이 있을 테지.”
“있긴 하지요.”
진강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무엇이냐.”
왕의안은 더없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소왕야의 목숨이라면 가능합니다.”
“내 목숨?”
“네, 당신이 죽으면 사방화는 살 수 있습니다.”
사방화가 즉각 고개를 젓는데, 진강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살 거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지, 혼자 살게 내버려 둘 순 없다. 방화가 날 끌고 가든, 내가 방화를 이끌든 우린 황천길에서도 떨어질 수 없어.”
왕의안이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가슴 절절한 사랑이군. 소왕야의 그 간절한 마음에 자운 도장께서도 감동 받아 운명을 바꿔주신 겁니까? 소왕야껜 참 아낌없이 잘 대해주셨군요.”
“의안 네게 베풀어준 건 모른 척 묻는 것이냐? 운란 형님은 너 대신 한 몸 바쳐 온갖 수모를 겪어왔다. 운란 형님이 사부님의 친아들이었단 건 몇이나 알고 있었겠느냐?”
왕의안은 순간 말이 없어졌다.
그때, 사방화가 왕의안에게 물었다.
“의안, 운란 오라버니를 만난 적 있나요? 아니면 어디 있는지라도 아나요?”
왕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운설과 란 장로의 시신을 수습해 천계산으로 들어갔소.”
“천계산? 두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건가요?”
왕의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과 날 제외하곤 누구든지 천계산에 들어갈 수 있소.”
“그게 전부……, 우리 혈맥 때문인가요?”
왕의안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말했다.
“하늘이 당신과 내가 가진 전승 혈맥을 끊어놓으려 하고 있으니, 우리가 매족의 토지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혈맥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오. 혈맥이 모두 고갈되면 그냥 꼼짝없이 죽게 되는 거고.”
사방화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이내 진강도 왕의안에게 물었다.
“그럼 천계산에 가지 않아도 죽고, 가도 죽는단 말이냐?”
“죽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소왕야께서 기필코 혼인을 하셨잖습니까.”
진강은 격해진 감정을 참지 못하고 결국 화를 냈다.
“그럼 사부님께 운명을 바꿔 달라 부탁까지 하며 살려낸 사람인데, 혼인도 하지 않고 뭘 하라고! 죽는다고 해도 같이 죽을 것이니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자 왕의안이 비웃음을 흘렸다.
“사실을 말한 건데 뭘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자운 도장께 운명을 바꿔 달라 부탁했다 한들 한평생 함께할 재량은 있으신지요?”
진강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한번 죽어봤으니 다시 죽는다고 해도 겁날 건 없어요.”
왕의안이 담담히 말했다.
“뭔가 좀 아는군.”
이내 사방화가 물었다.
“당시 자운 도장께서 외조부님을 모시고 천계산에 들어갔고, 또 지금 운란 오라버니와 제운설이 란 장로를 모시고 들어갔다고 했죠? 그 외에 또 누가 들어갔나요? 지금껏 매족의 땅은 북제와 남진 접경에 있었는데, 어째서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거죠?”
“란 장로께서 천계산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정화곡에 머물며, 시시각각 천계산 입구를 지켜보고 계셨는데 누가 들어갈 수 있었겠소? 매족의 땅은 지금껏 세간에 만 리 너머 외진 땅에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 누구도 북제와 남진 접경에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거요.”
“모두 소문에 속았던 거네요? 의안, 그럼 우린 정말 들어갈 방법이 없나요? 그냥 이렇게 죽기만을 기다려야 해요?”
“그렇게 천계산에 들어가 보고 싶소?”
왕의안의 물음에, 사방화가 결연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다고 해도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써서 살아봐야죠. 누가 죽길 원하겠어요? 이 아이가 자라 장가가고 아이를 낳는 것까지 보고 싶어요.”
이내 왕의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내아이란 건 어찌 안 것이오?”
“우리 진강과 꼭 닮은 아들일 거란 내 직감이에요.”
아이 이야기에 사방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웃음을 머금었다.
왕의안은 콧방귀를 뀌며 말없이 천계산 방향을 바라보았고, 진강은 사방화의 눈가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 당신이 아들이라면 분명 날 닮은 아들일 것이오.”
사방화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왕의안이 말했다.
“사서 고생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들어가죠.”
진강이 물었다.
“천계산에 가까워질수록 정신을 잃고 깨어나질 않는데,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이냐?”
“내게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까?”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있는 것 같군. 방화랑 나뿐 아니라 의안 너까지 우리 셋의 운명은 하나로 엮여있다. 우리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는 거겠지. 사부님께서 친아들 운란 형님을 방패로 세우면서까지 어렵게 널 지켜낸 건, 분명 네가 살아남아 매족 혈맥을 이어주길 바라는 마음때문이었을 거다.”
순간 말이 없어진 왕의안을 보고, 사방화가 또 한 번 물었다.
“의안, 정말 방법이 있나요?”
왕의안은 곧 두 사람을 바라보다,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가능할지는 장담 못 하오. 실패하면 우리 셋은 훨씬 일찍 염라대왕을 만나겠지. 아니, 그 아이까지 네 명인가?”
사방화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쌌다.
“의안, 무슨 방법인지 어서 말이나 해라.”
진강이 말했다.
“매족의 금기된 술법인 봉령술(封灵术)을 이용해, 나랑 사방화의 매술 기운을 감춰 천계산에 들어가는 겁니다. 천계산의 천직당 아래엔 윤회못(轮回池)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 우리 혈맥을 씻어내면 됩니다. 그럼 우리에겐 더 이상 매족의 피가 흐르지 않게 되고, 매족 사람도 아니게 되는 것이지요.”
진강이 깜짝 놀랐다.
“윤회못? 거긴 어떤 곳이냐?”
왕의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모릅니다. 자운 도장께서 생전에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일지 모른다고 하셨었지요.”
“매족 혈맥을 이어주길 원하신 사부님께서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지? 윤회못의 물이 혈맥을 씻어낼 수 있다면, 이제 매족 사람은 더 없는 거잖느냐.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강 소왕야, 그러고도 정말 그분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까? 오만방자하게 재주를 뽐내는 것만 가르쳐 주시고, 사람 마음을 읽는 능력은 가르쳐주시지 않았던가요?”
왕의안의 말에, 진강이 안색을 굳혔다.
“마음을 읽어서 뭐 해? 평생 방화랑 내 마음만 읽을 수 있으면 되지.”
왕의안이 다시 실소를 터뜨렸다.
“치정엔 약도 없다는 말이 진짜였네.”
“그냥 네가 말해주면 될 것 아니냐!”
왕의안은 또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우리에게서 매족의 피가 사라지면 매술의 영혼도 사라지게 되고, 이 세상에 더 이상 매족 사람은 없게 되겠지요.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혈맥이 사라져도 뿌리는 이어지지요. 소왕야께서 그 아이를 낳고, 나도 아이를 낳게 되면 매족 왕실이든, 성녀 일맥이든 상관없이 후세를 이을 수 있습니다. 매족의 피가 없을 뿐, 매족의 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뜻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