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0화. 뒷일 걱정 없이 (1)
조회가 끝나고 이목청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정명을 찾으러 갔다.
정명은 연석이 떠나기 전까지 그에게 붙들려 죽자사자 일을 했더니 지쳐 죽을 지경이었다. 조정에 들지 않겠다는 그의 결정은 옳았다. 그러나 녹봉도 받지 못하고 붙들려 가 노동만 했으니 그다지 아름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연석이 지원군을 데리고 떠난 지금, 정명은 이제야 진정한 여유를 즐기고 있던 참이었다.
이목청은 집으로 찾아갔다가, 현재 정명이 찻집에서 노래를 듣고 있단 말에 허탕을 치곤 다시 찻집으로 향했다.
정명은 송방과 함께 한가로이 앉아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이내 이목청이 맞은편에 앉자 그들은 한껏 들떴던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우리 이 대인께서 오늘 어찌 이럴 여유가 다 생기신 겁니까?”
이목청이 픽, 웃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막북에 가셨다.”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언제? 어찌 아무 소식도 없이?”
“어젯밤에 몰래 떠나신 거라 다들 조금 전에야 알았어.”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단한 재주를 황궁에서만 썩히기는 참 아까웠는데 잘 됐군.”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명령을 남기셨어. 자네 둘도 조정에 들어 양초(*糧草: 병사들과 말들이 먹을 양식)를 감독하라고.”
정명은 즉각 눈썹을 들썩였다.
“뭐? 일찍이 조정에 들지 않겠다고 말씀드렸고 거기 동의까지 하셨으면서 어찌 갑자기 명령을 내리셨단 말인가? 조정엔 관심 없으니 장사를 크게 해 3분의 1을 급료로 내는 조건으로 맞춰 주셨으면서 어찌 이제 와 말을 바꾸신단 말이야?”
이목청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법이지. 본래는 효양 공자가 맡으려던 일인데 폐하를 따라 막북에 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어젯밤 함께 떠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 둘이 아니고선 이를 맡을 만한 사람이 없어.”
정명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연석 그 썩을 녀석이 날 얼마나 굴려 먹었는데, 안 할 거다! 성지고 뭐고 소용없어. 이제 겨우 숨 좀 트이나 싶었는데 다시 그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진 않아.”
송방도 고개를 저었다.
“아직 쉰 지 얼마 되지도 못했단 말이다.”
두 사람이 단호하게 나오자, 이목청도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소식 하나가 있는데 들어볼래?”
“무슨 소식? 좋은 거, 나쁜 거? 빙빙 돌려서 말할 생각은 말게.”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강 소왕야와 소왕비마마에 대한 이야기.”
“그거라면 당연히 들어야지.”
정명이 즉시 응했다.
“두 분이 떠나고 찻집 이야기꾼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서신 한 통도 없고 어찌나 서운한지.”
송방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목청이 픽, 웃다 말했다.
“자네들 폐하께서 왜 막북 군영에 간 줄 아는가?”
“어찌 또 그 이야기로 넘어가는 거야?”
“강 소왕야와 소왕비마마와 관련있기 때문이지.”
“어서 말해 보게.”
이목청이 천천히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소왕비마마께서 회임하셨다.”
“회임이 무슨 말이야?”
어리벙벙한 정명을 보고, 송방이 그의 팔을 툭, 때렸다.
“바보야, 아이가 생겼다고.”
정명은 그제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게 정말인가?”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응, 정말.”
정명이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으며 말했다.
“우린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아버지가 되는 건가? 너무한데?”
“어서 배필을 찾자고! 지금 아니면 강 소왕야 아이와 정혼하기도 늦어.”
송방이 말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이목청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다 웃으며 말했다.
“2달째 접어들었지만, 몸 상태가 좋질 않아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야.”
순간 장난을 치던 두 사람도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폐하께선 군사 문제도 그렇고 두 분이 걱정돼 직접 막북으로 떠나신 거다. 소왕야, 소왕비마마께서 이 남진 강산을 짊어지고 있단 건 잘 알고 있지? 근 1년간 두 분은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어. 오로지 이 강산을 위해 고난을 겪고, 남진의 국토와 백성들을 훌륭히 지켜낸 이 모두가 두 분이 짊어진 짐이었지. 아무리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지금껏 두 분이서만 이겨냈어.”
진강과 사방화가 남진 강산을 위해 해온 일을 일일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정명과 송방도 그들이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는 익히 다 알고 있었다.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폐하께선 남진의 제왕으로서 조정을 잠시 내려두고 막북으로 떠나신 거야. 또 막북의 군사 문제는 마음 편히 내려둬야만 두 분도 할 일을 제대로 마치고 소왕비마마와 태아도 평안히 잘 지킬 수 있으니까.
현재 우리 남진은 연석과 의지가 지원군을 데리고 막북에 다다르기만 한다면 병력으로는 북제와 대등해 보이는 상황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보기에 그렇다는 걸 기억해야 해.
자네 둘도 연석과 군량미 일을 맡아봐서 알듯 남진은 올해 각지에 홍수 피해를 입은 데다 다년간 준비를 해오지도 않아서 국내의 군량미를 합치면 겨우 1년 치 밖에 나오질 않아. 하지만 북제는 오랜 준비를 해와서 속전속결로 북제와 겨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양쪽 병력이 대등한 상황에서도 승전을 이루긴 쉽지 않아. 며칠 전 우리가 북제 군을 이긴 것도 북제 태자가 적을 얕봤기 때문이었어. 이젠 그도 교훈을 얻었을 테니 다시 전쟁을 치른다면 만만치 않을 거란 말이지?
게다가 북제 소국구도 이젠 북제를 위해 제언경을 전심전력으로 도울 거야. 옥언신이 누군진 자네들도 잘 알지? 언신 공자의 실력은 강 소왕야께 조금도 뒤지질 않아. 그러니 폐하께서 막북에 가시더라도 짧은 시간 내엔 당해내기 힘드실 거다.”
두 사람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자네들에게 조정에 들지 않아도 허락하신 건 맞지만, 내 제의로 할 수 없이 약조를 바꾸셨다. 하지만 자네들이 조정 일은 끔찍이 싫어하는 걸 알고 있으니 폐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군량미만 맡아주게. 다른 이에겐 도저히 맡길 수가 없어. 폐하께서 돌아오시고 강산이 안정을 되찾으면 그땐 얼마든 관직을 내려놓아도 좋아.”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목청도 충분히 알아듣도록 상황 설명을 했기에 두 사람이 결정을 내려주기만 기다렸다.
잠시 후, 정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도 안 들어주면 그건 사람도 아니지. 나라가 있어야 집도 있는 법이니 우리 남진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다 한들 어찌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래, 앞으로 이런 여유는 잠시 접어둬야겠어.”
이내 이목청도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혼인할 시간 정도는 있기 마련이야.”
“아이를 낳을 시간도 있나?”
이어진 송방의 말에 이목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지.”
정명이 하하, 웃자 송방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럼 이렇게 결정하는 거다?”
두 사람도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자네와 함께하겠네.”
이목청은 웃으며 공수를 올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매달 녹봉도 맞춰줄게.”
* * *
정명과 송방은 그날 바로 이목청을 따라 병부에 입직했다.
소식을 접한 영친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목청이 있다는 건 10만 용병이 있는 거나 다름없지.”
좌상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상도 참, 이리 훌륭한 아들을 남겨두고 떠나다니. 앞으로 몇 년 뒷면 이 대인의 명성이 천하에 다 알려질 겁니다.”
영강후도 감탄했다.
“아래 세대들이 저리도 패기와 힘이 넘치니 우린 늙은이들은 이제 무용지물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친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말게. 우린 아이들보다 경험이 있으니 아직 쓸모가 있어.”
좌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 훌륭한 아들 하나 없습니다.”
“부인께 하나 더 낳아 달라 하시지요.”
영강후의 말에, 좌상이 눈을 부릅떴다.
“영강후! 우리가 어디 영강후 부부 같은 줄 아는 겁니까? 다 늙어서 낳겠다고 불쑥 낳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내 영강후는 좌상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좌상이 지금껏 누굴 마음에 품고 있는지 우리도 다 압니다. 부인과도 합방하지 않고 부에 있는 여인들도 그저 겉치레일 뿐이란 것도 말이지요. 그게 아니면 진즉에 지금보다 자녀가 더 차고 넘쳤겠지요.”
좌상의 안색이 구겨졌다.
“누구 말입니까? 잊은 지가 언제인데.”
영강후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위대한 충용후부의 딸로 더 큰 대의를 품은 여인이었다는 걸 탓할 수밖에요. 무엇보다 좌상도 강 소왕야처럼 죽기 살기로 데려오려 하진 못했으니, 이리 한 평생 고생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좌상이 차갑게 웃었다.
“내가 그 어떤 수단도 안 써봤을 것이라 생각합니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요. 갖은 수를 써봤지만, 아무것도 먹히질 않았습니다.”
영강후는 영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당시 좌상은 그다지 간절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도 있듯 좌상의 능력이 열 번엔 못 미쳤다고 볼 수밖에.”
좌상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대체 얼마나 해야 넘어오게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좌상부터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얘기해 보세요. 시간도 몇십 년이 흐르고 저희 셋뿐이니 더 숨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어서 말씀해보세요.”
좌상은 순간 말이 없어졌다.
“그거 보세요, 없잖아요? 그러면서 무슨 여인을 사로잡으려 했단 겁니까?”
그때, 좌상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순결을 가져갔다면 대단한 일이라 칠 수 있겠습니까?”
영강후도, 내내 조용히 있던 영친왕도 깜짝 놀랐다.
순결? 좌상이…… 사봉의 순결을 가져갔다니? 대대로 예의와 전통을 지켜 온 사씨 충용후부 적통 아가씨에겐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내 영강후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북제로 시집가기 전이란 말씀입니까?”
“그래요. 그래도 붙잡질 못했으니 단념하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영강후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봉이 북제로 시집가기 전, 이미 거사를 치렀음에도 붙잡지 못했다면 정말 단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친왕도 좌상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20년이 흐른 지금, 사봉이 북제로 시집간 후 좌상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다.
좌상과 가까웠던 이들은 당시 좌상과 사봉이 당연히 부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범양 노씨 가문 사람인데다 능력까지 대단한 좌상은 사봉의 배필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장공주가 죽어도 북제로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자, 사봉이 대신 그 길을 택할 줄은 몰랐다.
그 당시 좌상은 한동안 미치광이처럼 살았다. 지금껏 좌상이 각박하게 칼끝을 드러내며 조정에서 우상과 옥신각신할 때도, 선황제는 불만이 있었지만 그에게 몇 마디 한 것이 전부였다.
내막을 잘 아는 이들은 모두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피해 다녔다. 속사정을 아는 이들은 사봉과의 이별이 그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 또한 좌상의 능력이었다.
한참 후, 영강후가 좌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좌상, 정말 미안합니다. 일부러 좌상의 상처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좌상이……, 아이고, 하필 그 대단한 여인을 사랑한 탓이지요. 그 여인을 좋아한 사내 중 잘된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지금 저렇게 버려진 북제 황제를 봐도 알지 않습니까. 어찌 사람이 진심도 없고 대의 하나로만 똘똘 뭉쳐 있는지,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좌상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곧이어 영친왕도 입을 열었다.
“20년도 더 지난 일에 이리 나이도 들었는데 이제 와 내려놓지 못할 게 뭐 있을까. 이제 우리 사돈 어르신과 돌아올 테니……, 마음의 준비라도 해두시게나. 황상이 막북으로 가셨으니 우리 셋이 목청을 도와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 잡아야 할 때 아닌가. 벌써 우상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 큰 충격을 받았네. 더는 그런 충격을 당할 재간이 없는데, 혹시 좌상은 그런 생각 없겠지?”
좌상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붙잡지 못했던 걸로 이미 단념한 지 오래입니다. 나이도 나이인데 이제 와 뭘 어린 애들처럼 그런 걸 따지겠습니까? 아이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생각도 없고, 이젠 그때의 철없던 사내가 아니니 염려들 마십시오.”
영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좌상이 그리 생각하면 다행일세.”
“사봉 아가씨가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겠군요.”
영강후의 말을 끝으로 좌상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 할 일을 하러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