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9화. 조국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다
정효양은 금연을 품에 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황성에서 내쫓았다면 다른 사람을 좋아했을 거라느니, 한가할 때 옷을 수놓아 달라느니, 자신이 돌아오면 곧장 혼인을 올릴 테니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둥 이목청이 잘 돌봐주겠다곤 했지만 일이 바빠 제대로 챙기지 못할 거라며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다.
금연은 일일이 그의 이야기를 받아주다 결국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일이 뭐 이렇게 많아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도 끝내지 못할듯한데요?”
정효양이 웃으며 말했다.
“그만큼 바쁘면 헛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 좋잖소. 내 생각 하는 것도 힘들 테니 한가할 땐 생각할 필요 없소. 내가 당신 생각하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금연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당신 생각을 한다 그래요?”
정효양은 그 후로 한동안 금연의 규방에서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다 두 시진이 지나서야 대장공주부를 떠났다.
괜찮다고 했지만, 금연은 그래도 침상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정효양은 대문 입구에서 입꼬리를 실룩이며 금연을 꼭 껴안고 말했다.
“금연, 당신을 두고 떠나기 참 아쉽소.”
금연도 정효양에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후로 매일 그를 만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 서운한 건 사실이었다. 갑자기 양국이 교전하는 상황에 저 멀리 막북 변경으로 간다는 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금연은 정효양이 득의양양할 것을 생각하며 감정을 한껏 억눌렀다.
“일주일마다, 늦어도 열흘마다 서신 한 통씩은 보내야 해요.”
정효양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당신도 나와 헤어지기 아쉬운가봐요.”
금연은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께서 걱정하실까 봐 그러죠. 당신 서신이라도 오면 어머니께서 절 귀찮게 하시진 않을 테니까요. 가서 짐도 꾸려야죠. 어서 가요.”
정효양은 금연에게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곤 곧바로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금연은 대문 앞에 서서 정효양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밤이 되자, 진옥은 정효양과 암위 일행을 데리고 비밀스럽게 남진 황성을 빠져나와 막북으로 향했다.
* * *
다음날, 문무백관들은 차례로 금란전에 올랐다.
그러나 조회 시간이 다 됐는데도 진옥은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즉위 후, 진옥은 여태 단 한 번도 말없이 조회를 무른 적이 없었다. 대신들은 무슨 일인가 수군대기 시작했다. 진연이 돌아온 이래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진연이 황궁으로 돌아오자마자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단 이야기는 이미 파다하게 퍼진 뒤였다.
그러다 대신들은 진옥뿐 아니라 이목청도 보이지 않는단 걸 깨달았다.
좌상과 영강후는 눈치를 살피다 영친왕을 바라보았다.
영친왕은 평소와 달리 아침부터 어딘가 정신이 나가있는 듯했다. 기쁜 듯하다가도 미간이 찌푸려지기도 하면서 진옥이 제때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듯 내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좌상과 영강후는 그렇게 한참동안 영친왕을 살펴보다, 가까이 가서 그를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좌상이 영친왕의 팔을 살짝 톡톡, 두드렸다.
“왕야?”
영친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웅성거리는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응, 좌상. 무슨 일인가? 조회가 끝난 건가?”
좌상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아직 안 오셨습니다.”
“그렇군.”
영친왕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영강후가 물었다.
“왕야……,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무슨 일이라니?”
영친왕이 영강후에게 물었다.
“표정이 좋았다가 어두웠다가 평소랑 많이 달라 보이는데 왕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영친왕은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 있긴 해.”
두 사람이 물었다.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영친왕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도울 수 없는 일이네.”
두 사람은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무슨 일이기에 왕야께서 이리 정신을 놓으시고 우리도 도울 수 없다는 겁니까? 어서 말씀해주시지요.”
영친왕은 말을 하려다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황상은 어찌 안 오시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목청도 안 온 걸 보니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듯도 합니다.”
영친왕은 고개를 끄덕이다, 얼른 말해주길 기다리는 두 사람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며늘아기가 회임을 했네.”
좌상이 깜짝 놀랐다.
“우리 영이가요? 당분간은…….”
“설영이 말고, 방화 말일세.”
좌상은 더더욱 깜짝 놀랐다.
“소왕비가 회임을 했다고요?”
영강후도 크게 놀라 말했다.
“소왕비가 회임을 했단 말입니까? 이……,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입니까! 근데 왕야께선 어찌 표정이 그러십니까? 기쁨이 극에 달하신 겁니까?”
영친왕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방화의 몸이 좋지 않다는 걸 자네들도 잘 알잖나. 왕비도 밤새 뒤척이며 잠 한숨 못 이뤘고 나도 덩달아 걱정이 돼서 그렇다네.”
“걱정할 만하긴 하군요. 얼마나 됐답니까?”
좌상이 물었다.
“2달.”
“소왕야와 소왕비가 황성을 떠난 지도 꽤 오래됐지요? 언제 돌아온단 말은 없습니까? 어제 우리 람이도 연 군주가 돌아왔단 말에 황궁에 들어 소왕비의 근황을 듣겠다고 난리였는데 우리 부인에게 잡혔지요.”
영강후의 말에 영친왕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 돌아오겠다는 말도 없었어. 양국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해야 할 일들이 차고 넘치니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하겠지. 그게 너무도 걱정이야.”
“저 멀리 막북에 있으니 황성에서도 어찌할 방법은 없지요. 어쨌든 좋은 일이니 너무 염려 마십시오. 왕비마마께도 이 기회에 부처님께 보살펴달란 기도를 올리라고 하시지요.”
“영강후도 부처를 믿으십니까?”
좌상의 말에 영강후는 고개를 젓다 이내 끄덕였다.
“이럴 땐 믿는 편이지요.”
영친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왕비에게 매일 열심히 기도를 올리라 해야겠어.”
세 사람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목청이 들어왔다. 그의 뒤로는 진옥의 측근, 2번째 총관과 태후궁의 여의가 따라 들어왔다.
“이 대인, 폐하께서도 오고 계시오?”
“오늘 조회는 없는 것이오?”
대신들이 하나둘씩 이목청에게 묻기 시작했고 영친왕, 좌상, 영강후도 이목청을 바라보았다.
이목청은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곤 대신들에게 공수를 올렸다.
“폐하께선 막북에 가셨습니다.”
대신들은 동시에 아연실색했다.
영친왕도 순간 사방화에 대한 걱정까지 싹, 달아났다.
“목청! 황상이 어찌 막북에 갔다는 말이냐?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언제 떠나신 거냐?”
이목청은 소매에 넣어둔 성지를 꺼내 영친왕에게 건넸다.
“저도 조회 전에 폐하께서 보내신 성지를 받고 알게 됐습니다. 어젯밤에 떠나셨더군요. 모두 직접 성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영친왕은 서둘러 성지를 펼쳐보곤 화를 냈다.
“어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좌상도 성지를 살펴보고는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영강후는 걱정스레 말했다.
“아이고, 폐하께선 어찌 그 먼 막북에 효양만 데려가신 겁니까? 하늘 같은 폐하께 만일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남진 강산은 어떡한답니까?”
대신들도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수군거릴 뿐이었다.
이목청은 대신들 모두가 성지를 읽기까지 기다린 뒤, 입을 열었다.
“왕야, 그리고 대인들께서도 잘 들어주십시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성지에 따라 조국을 안정적으로 다잡고 폐하께서 소식을 주시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영친왕은 말을 하려 입을 달싹이다 잠시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겠어.”
좌상도 이목청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어찌 이리 늙어버렸는지.”
영강후도 따라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마저 우릴 버리셨어요.”
그 순간, 이목청이 말했다.
“폐하께선 문무를 겸비하신 기재에, 영명하신 천자로서 남진과 북제가 전쟁을 치르기 전부터 전쟁에 나서실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대인들의 반대로 뜻을 거두셨던 것뿐이지요.
하지만 이젠 폐하께서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북제에게 남진의 황제는 문예뿐 아니라 무예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이지요. 이 어마어마한 패기로 전쟁에 나가 직접 싸우시겠다는 폐하를 모실 수 있음에 자랑스러워해야 할 때입니다.”
대신들은 서로를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 대인 말씀이 옳소.”
“감국 직무를 받들게 되었으나 여전히 덕이 얕고 능력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실망시켜 드려선 아니 되겠지요. 오늘부로 폐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 전 대인들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저희는 다 같이 한배를 타고 조정의 기강을 다지며 폐하께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시길 기다릴 것입니다.”
이목청이 대신들에게 공수를 올리자 여기저기서 찬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이 대인이시오!”
“이 대인, 분부만 내려주시지요.”
“폐하께서 감국이란 중대한 임무를 훌륭한 이 대인께 넘겨주셨으니 과연 옳은 선택이십니다. 모든 건 다 이 대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영친왕, 좌상, 영강후도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목청처럼 젊고 훌륭한 인재는 당연히 일심으로 보좌해야지. 나라에 불상사가 생겨 황상이 걱정하지 않게 우리도 모두 최선을 다하겠다.”
영친왕의 말에, 이목청이 정중히 인사했다.
“왕야, 감사드립니다. 좌상 대인, 영강후 대인께도 감사드립니다.”
대신들 모두가 엷게 웃는 이목청을 바라보았다.
현재 이목청은 승상사직에 올라 있지만, 황제 진옥의 중임을 받아 감국을 이어가게 됐다. 이는 아버지 우상보다 더할 수 없이 뛰어난 업적이었다.
젊은 황제가 출정하고 젊은 대신이 나라를 다스리니 그야말로 완벽한 상부상조였다. 문무백관들도 이젠 다들 계산이 나왔을 것이다.
아직 사직하지 않은 윗세대 대신들은 오늘로써 진정한 젊은 세대의 천하가 시작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도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젠 힘이 턱없이 부족한 세대가 돼버린 것이었다.
반면 젊은 세대들은 황제의 성지를 받들어 만인지상의 위에 선 이목청이 오늘 이 사실을 일찍이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에야 알게 된 척을 하고 있음을 다 눈치챘다. 이런 인재를 조정의 우두머리로 둔다면 미래는 틀림없이 전도유망할 터였다.
또 정효양은 황제가 데리고 떠난 유일한 사람으로서 앞으로 그 위세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갈 테니 앞으로 그에게 절대 밉보여선 안 됐다.
대신들은 각자 여러 생각에 잠겼지만, 진옥이 막북에 갔으니 앞으론 필히 이목청의 뜻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목청은 반드시 남진의 후방과 수도를 견고히 세울 인재였다. 이젠 황제가 황성을 비웠으니, 모두가 신중히 행동하며 한 치의 실수도 범해선 안될 것이다.
이목청은 대신들과 각자 할 일들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어젯밤 진옥이 떠나기 전 중요한 상소는 모두 읽어뒀기에 이목청은 영친왕, 좌상, 영강후를 필두로 대신들과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고 계획을 세운 뒤 조회를 파했다.
진옥이 떠났다는 소식에 조정은 한바탕 충격에 빠지긴 했지만,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