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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7화 (937/978)

937화. 뜻을 거역할 수 없다

진옥은 다시 두 사람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도성에 돌아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냐?”

두 사람은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그간 자네들을 너무 편하게 대해준 거지. 그렇지?”

그래도 말이 없자, 진옥이 다시 옥안을 내리쳤다.

“전부 말도 다 잊어버린 것이냐!”

이목청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강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서 절대 말하지 말라며 간곡히 부탁하시기에 저희도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정효양도 서둘러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희도 비밀을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화가 난 진옥은 소매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여봐라, 곤장 50대씩 내려쳐라!”

소천자가 깜짝 놀란 사이 누군가 들어와 두 사람을 끌고 나가려 했다.

이목청과 정효양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영친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50대고 100대고 숨길 건 숨겼을 겁니다. 강이와 방화가 부탁하지 않았다면 숨기지도 않았을 테지요.”

이목청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마마 말씀이 옳습니다. 소왕비마마 몸이 좋질 않으니 폐하와 왕비마마께서 아신다면 걱정하실까 싶어 숨겼던 겁니다.”

정효양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전 강 소왕야께 제 약재 창고도 빼앗겼습니다! 비밀을 지켜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빼앗긴 거나 마찬가지지요.”

우상이 죽고 난 뒤 이목청은 이제야 조금 기운을 차린 듯했지만, 여전히 제대로 쉬지 못해 한눈에 봐도 매우 야위어 있었다.

정효양은 이목청보다야 나았지만, 아주 낮은 계급의 사관직에 있으면서도 진옥이 맡긴 잡다한 일들로 그 짐을 떠안느라 야위어버린 건 마찬가지였다.

영친왕비는 다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큰일을 숨긴 건 사실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잖습니까. 조정에 이리도 중요한 중신들을 때렸다는 게 알려지면 세상의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화가 나신 게 있다면 저처럼 강이와 방화에게 다 떠넘기도록 하세요. 두 아이가 돌아오면 그때 결판을 내면 됩니다.”

영친왕비는 말없이 굳은 진옥의 뒷모습에서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것이 느껴지자 말을 더 덧붙였다. 

“두 사람을 때렸다는 게 방화에게도 전해져 혹여 태기를 건드린다면…….”

진옥은 한껏 굳은 얼굴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용서해줄 수는 있다만 도성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라. 조그마한 것이라도 빠트렸다간 웃음거리가 되는 건 고사하고 짐의 어서재가 다 망가지더라도 곤장을 때릴 것이다.”

이목청이 정효양을 쳐다보며 말했다.

“효양 공자, 공자가 말하시오. 난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강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서 회임하셨다고 말씀하신 게 전부야.”

정효양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체면 떨어지게 곤장을 어찌 맞습니까! 근데 정말 기억이 잘 안납니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기억이 날 때까지 생각해.”

진옥이 말했다.

정효양은 할 수 없이 머리를 쥐어 싸매고, 황성으로 돌아오기 전 진강과 사방화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효양은 충분히 자세하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했으나, 진옥의 표정은 여전히 한없이 어두웠다.

“그게 끝이냐?”

정효양은 그 후로 몇 마디를 덧붙이고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폐하, 정말 더는 없습니다. 더 생각해 내보라 하신다면 차라리 곤장을 맞겠습니다.”

영친왕비도 곁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걱정이 돼 마음이 놓이질 않는구나.”

그에 이목청이 얼른 이야기했다.

“왕비마마, 아이를 데리고 무사히 돌아오겠다 약속했으니 왕비마마께서도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분명 그리 말했습니다.”

정효양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좋은 일이긴 하니 마음이 좀 놓이는구나. 도성과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소식을 전하기도 어렵고 어쩔 수가 없군. 먼저 소식을 전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황상, 그만 노여움을 거두세요. 황상께서 걱정하실까 그랬다고 하질 않습니까.”

영친왕비가 부드럽게 토닥이자, 진옥도 마음이 좀 가라앉긴 했지만 미간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백모님, 정오도 됐으니 궁에서 식사하고 가십시오.”

“아닙니다. 왕야께서도 방화의 회임 소식을 들으면 분명 기뻐하실 테니 지금 바로 가서 알려드려야겠어요.”

영친왕비는 서둘러 어서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진옥은 천천히 이목청과 정효양을 바라보며, 더 이상 따지고 들 것도 없단 생각에 손을 내저었다.

* * *

이목청은 웃는 얼굴로 황궁 밖을 향해 걸어갔다.

정효양은 어서재를 나와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목청의 팔을 툭, 쳤다.

“이 대인, 왕비마마께서 우릴 구해주지 않으셨다면 폐하께서 정말 우릴 때리셨을까요?”

“그랬을지도.”

정효양은 순간 발끈하며 눈을 부릅떴다.

“멋대로 화를 내고 사람을 때려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으니 황제가 참 좋긴 좋습니다.”

그러자 이목청이 바로 그를 째려보았다. 

“어마어마한 자리이긴 해도 매번 삼경(*三更: 밤 11시 ~ 새벽 1시)까지 앉아있어야 하는데 그래도 황제가 좋은 자리 같소?”

정효양은 즉각 딴청을 피우며 말했다.

“좋기는 개뿔!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답답해 죽겠습니다.”

“효양 공자, 정명과 송방도 불러서 깜짝 놀라게 해주는 게 어떻소?”

“좋습니다!”

정효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서재가 조용해지자 진옥은 간이침상에 올라 지친 듯 눈을 감았다. 

이내 소천자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피곤하시면 침전에 가 쉬시지요. 근래 들어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잖습니까. 이대로라면 이 대인보다 폐하께서 더 야위실 겁니다.”

진옥이 고개를 저었다. 

소천자는 진옥이 고개를 저으면 그 누가 와서 무슨 소리를 해도 먹히지 않을 거란 걸 알기에 할 수 없이 부채를 가져와 선선하게 부쳐주었다.

잠시 후, 진옥이 물었다.

“소천자, 짐이 지금 막북 군영으로 간다면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소천자가 깜짝 놀라 말했다.

“폐하! 절대 아니 됩니다.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선 막북 군영에 계시지도 않는데 어찌 가시려는 겁니까!”

“변경이 신경 쓰여 어차피 일을 끝내고 나면 다시 막북 군영으로 돌아올 테니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다.”

소천자가 고개를 저었다. 

“존귀하신 폐하께선 황성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변경엔 사 후야, 왕귀 장군님, 유겸왕부 세자까지 계시잖습니까. 게다가 연 소후야와 최 시랑께서도 가셨습니다. 물론 가는 길마다 사고가 끊이질 않아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적어도 보름에서 20일쯤 지나면 지원군과 함께 막북에 다다르실 겁니다.”

“짐이 그들과 같을 순 없지.”

소천자는 목이 메었다. 

“폐하, 그래도 여기 계셔야 합니다.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서 숨기신 것도 전부 폐하를 생각하셔서 그런 겁니다. 양국이 전쟁을 앞두고 있으니 폐하께선 황성에서 나라를 안정시켜주셔야지요.”

진옥이 미간을 문질렀다.

“언제부터 백부님과 좌상처럼 짐에게 허울 좋은 말만 하기 시작한 거지?”

소천자는 목을 움츠렸지만, 그래도 열심히 설득했다.

“폐하, 떠나셔선 아니 됩니다.”

진옥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폐하, 절대 아니 됩니다!”

“그 입 다물라. 한마디도 더하지 마라.”

소천자도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진옥은 어서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소천자는 분명 그가 무슨 계획을 짜고 있을 거란 생각에 내딛는 한걸음마다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떤 일을 결정짓기 전 진옥은 늘 어서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다.

잠시 후, 진옥이 걸음을 멈추고 소천자에게 말했다.

“소천자, 가서 목청과 효양을 다시 불러오너라.”

소천자는 애원하는 표정으로 진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진옥이 안색을 굳히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서 가라. 목이 달아나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소천자는 서둘러 어서재를 빠져나갔다. 

* * *

이목청과 정효양이 황궁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천자는 열심히 말을 타고 두 사람을 뒤쫓았다.

“대인들!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소천자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다시 궁으로 들라 하십니다.”

이목청과 정효양은 서로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큰일입니다. 어서 가시지요.”

소천자의 재촉에, 두 사람도 다시 황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목청, 정효양이 어서재로 돌아오자 진옥이 말했다. 

“목청, 자네는 오늘부로 감국(*監國: 제왕이 없을시,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던 이)을 맡게. 효양은 병부의 군량미 관리를 맡고. 보정왕이신 우리 백부님과 좌상, 영강후께서도 함께 보정(*輔政: 정사를 보좌함)을 맡을 것이다. 짐은 이제 막북에 다녀오려 한다. 이는 성지이니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

황제의 성지라는 말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효양은 이 큰일을 성지 하나로 끝내겠단 진옥의 패기에 할 말을 잃었다. 

이목청은 잠시 멍해 있다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홀로 막북을 가시는 건 도저히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대신들이 이리 많은데 한두 사람 정도는 데려가시지요.”

“왜, 목청. 너도 가고 싶은 건가? 안 돼. 다른 이에게 감국을 맡기는 건 짐이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 이리도 깊은 신임을 받다니 참으로 영광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두 사람 정도는 데려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진옥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굴 데려가라고?”

“군량미에 관한 일은 굳이 정 대인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정 대인을 데려가시지요.”

정효양이 깜짝 놀라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 절 데려가라는 말씀입니까?”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정 대인께선 그간 1년 넘게 바깥 생활을 하며 세상 물정도 잘 알고 있잖소. 물론 형양 정씨는 사라졌지만, 절반이 넘는 세력들을 정 대인께서 다 수복했으니 정 대인이 폐하를 따라간다면 나도 마음이 좀 놓일 듯하오.”

정효양이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이 대인께서 절 잘 아시는군요. 하지만 아직 우리 정혼자와 얼마 지내지도 못했는데 막북의 모래바람과 피비린내에 피부라도 상하면…….”

“알겠다. 효양을 데려가지.”

“폐하, 따로 주시는 보상은 있는 것입니까?”

정효양이 물었다.

“짐에게 그리 엄청난 것을 숨겨와 놓고 지금 보상이 있냐고 묻는 건가? 보상 따윈 없다. 이건 성지야.”

정효양은 입술을 삐죽이며 이목청을 째려보았다.

“절 골탕 먹이려는 셈이시지요!”

이목청은 가볍게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폐하의 측근과 암위를 제외하고 효양 공자 하나만 폐하를 따라 막북으로 가게 된 것이오. 이게 하늘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뭐겠소? 이제 정 대인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앞으로 조정에 정 대인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누구든 정 대인에게 아첨하게 될 것이오. 근데 이게 골탕 먹이려는 거라고?”

정효양은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금세 기뻐했다. 

“좋은 일이긴 하군요.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해가 지면 출발할 테니 돌아가 준비 좀 하고 금연에게도 얘기하고 와.”

정효양은 통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진옥이 정효양에게 손짓했다. 

“목청에겐 넘겨줘야 할 것들이 있으니 먼저 돌아가게.”

정효양은 곧 고개를 살짝 기울여 이목청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 대인, 대인께 이 나라를 맡기고 떠납니다. 우리 집도 잘 돌봐주시고요. 전쟁이 끝나면 집안일 같은 것도 말끔히 다 정리됐겠지요? 그동안 장가도 좀 가십시오. 그래야 장차 강 소왕야 아이와 정혼도 시키지 않겠습니까?”

이목청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고, 진옥은 정효양을 째려보았다. 

“어떻습니까?”

“알겠소, 알겠소.”

정효양은 이목청의 답을 듣고서야 가볍게 어서재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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