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화. 편애하는 어머니 (1)
진연은 이미 태후궁으로 갔단 소식에, 영친왕비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태후궁에 다다르자 여의가 마중을 나와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왕비마마, 군주께서 드디어 울음을 그치긴 하셨는데 아무것도 드시질 않고 계속 풀이 죽어 있으십니다.”
영친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진연은 태후의 품에 어린아이처럼 안겨 있었고, 태후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다 영친왕비가 오자, 진연이 고개를 들어 말했다.
“어머니.”
태후도 얼른 영친왕비를 반겼다.
“형님, 잘 오셨소. 눈물에 잠길 기세로 울어대니 어찌할 수가 있어야지요.”
영친왕비가 다가와 진연을 보며 웃었다.
“네 오라빈 평생 코를 훌쩍인 적도 없는데 겨우 그 정도 일로 우는 거야?”
진연은 코를 훌쩍이며 금방이라도 또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그러자 태후가 서둘러 말렸다.
“형님, 그래도 딸아인데 어찌 사내아이랑 비교하시오. 그것도 남을 울리지 않으면 다행일 강이랑 비교하다니, 강이가 눈물을 흘릴 사람인가요?”
영친왕비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연아, 어미도 어릴 적 이렇게 울어본 적은 없다.”
진연이 다시 또 훌쩍거리기 시작하자 태후가 말했다.
“형님! 애를 좀 달래주라고 모셨더니 어찌 또 다그치시오. 아, 난 모르겠소, 이제. 울면 형님이 달래세요.”
“이리 못난 것도 태후마마께서 다 버릇 들이신 겁니다. 매번 이리 감싸고 돌며 다그치지도 못하니 오죽하면 이리 쪼르르 달려와 울고 있겠습니까?”
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애가 우는 모습을 직접 못 봐서 그러신 것이오. 보는 사람 마음이 어찌나 미어졌는데요.”
이내 영친왕비가 진연을 보며 물었다.
“묵함이 때문이야?”
진연은 사묵함을 떠올리자 또다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이고, 우리 공주님 그만 우세요.”
태후는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진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영친왕비는 담담히 웃음을 보였다.
“어휴, 녀석도 참.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묵함이 싫어한다고 한들 뭐 그리 대수라고. 이렇게 울어봤자 아무것도 모를 텐데 그럴 시간에 대놓고 성질이라도 내지, 어찌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야?”
진연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이리 툭하면 우는 아이를 누가 좋아해? 내가 묵함이라도 울어서 눈과 입술이 다 비뚤어진 사람을 좋아하진 않았을 게다.”
진연이 순간 눈물을 뚝, 그쳤다.
“눈과 입이 비뚤어졌다고요?”
“그래, 거울 한번 봐보렴. 눈도 퉁퉁 부어서 보이질 않는구나.”
진연은 태후의 품에서 뛰쳐나와 거울 앞에 서더니 자신의 모습에 충격받은 듯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내 말 맞지? 그 예쁜 군주가 밖에서 떠도느라 스스로 보기에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지 않았느냐. 피부도 다 그을리고. 거기다 그리 서럽게 울어대니 더 볼썽사납지.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어?”
진연은 울상이 되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묵함이는 내가 봐도 참 괜찮은 아이다. 홀로 북제의 반도 안 되는 병마를 이끌고 막북으로 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묵함을 좋아한다니 그래도 우리 딸이 보는 눈 하나는 있구나.”
이어진 영친왕비의 말에 태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님! 지금 그 말은 허락한다는 뜻이오?”
진연도 손을 내리며 영친왕비를 바라보았다.
“반대할 게 뭐 있습니까?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죄는 아니잖습니까.”
영친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묵함은 방화의 오라비잖아요.”
“태후마마, 뭘 그리 고리타분하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드문 일은 아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지요. 뭐 딱히 혈연과 혈통을 어지럽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젭니까? 이젠 그런 세속적인 족쇄에서 벗어날 때도 됐습니다.”
태후도 영친왕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정말 두 아이가 혼인한다면 호칭이 이상해지잖소.”
“그거야 뭐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그게 뭐가 그리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묵함이 연이를 좋아하느냐 마냐에 달려 있지요. 묵함이도 좋다면 저도 당연히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돈 어르신께서도 아주 깨어있으신 분이라 당연히 반대하실 리 없고요.”
태후는 말없이 진연을 바라보았다.
“절 안 좋아해요.”
진연이 소심하게 말했다.
“네게 직접 그리 말했어?”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알지요. 항상 절 피하기만 하고 틈만 나면 저더러 도성으로 돌아가라는데 당연히 절 골칫덩이로 생각하는 거죠, 뭐…….”
“연아, 너도 생각해봐라. 막북 군영은 전쟁을 치르는 곳이야. 그런 무시무시한 전쟁터에 여자아이가 있는 게 마음이 편하겠느냐. 또 묵함이 널 따로 챙겨야 하니 골칫덩이로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
“그런 보살핌은 필요 없어요.”
영친왕비가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우리 영친왕부와 충용후부가 어떤 사인데 묵함이 널 챙기지 않을 수가 있겠어? 네게 큰일이라도 생기면 무슨 면목으로 우릴 보겠느냔 말이다.”
진연은 마땅히 받아칠 만한 말이 떠오르질 않아 잔뜩 풀이 죽어 말했다.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라고요…….”
“뭐가 어떻단 말이야?”
진연이 입술을 삐죽였다.
“제가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절 피하는 거예요. 절 챙겨주는 거랑 비교해선 안 된다고요.”
영친왕비는 기가 차 웃음이 나왔다.
“보아하니 아직 머리는 깨어있나 보구나. 어쨌거나 좋아하고 말고는 하루 이틀 만에 결정지을 수도 없는 일이다. 지금은 막북에 있으니 돌아오면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묵함이가 널 받아준다면 이 어미가 나서줄 것이고 단호하게 거절한다면 너도 깔끔히 마음 접고 다른 사람을 알아보거라.”
진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영친왕비를 바라봤다.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가요? 전쟁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잖아요.”
“어차피 막북 군영엔 여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잠자코 기다리면 되지, 전쟁이 언제 끝날지가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기다리다 더 이상 네가 안 좋아할 수도 있지 않으냐. 그럼 더 좋고.”
“어머닌 절 뭐로 보시는 거예요? 좋아해서 기다리는데 어찌 마음이 식을 수 있겠어요?”
진연이 불만 가득 찬 어조로 말했다.
“언제까지고 좋아할 자신이 있으면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뒤에 널 받아들이고 좋아하게 만들면 되지. 그것이야말로 네 능력 아니겠느냐? 연정은 코나 훌쩍이며 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은희는 너보다 훨씬 낫구나.
황상이 아무런 마음이 없단 걸 알면서도 기다리겠다며 맹세를 하곤 방화가 떠난 뒤로 혼자서 충용후부로 가 사씨의 서무를 전부 인계받았더구나. 홀로 사씨 전체의 서무를 떠받들고 있으니 코나 훌쩍이는 너보다 낫지.”
진연은 눈을 깜빡이며 코를 훌쩍였다.
“사씨의 모든 서무를……, 은희 혼자……. 정말 대단하네요.”
“네가 봐도 그렇지? 이 남진의 귀족 아가씨 중 연람이나 금연이까지 더해도 은희만큼 강인한 아이는 없더구나. 점잖이 말썽도 피우지 않고 따로 황궁에 들어와 황상을 괴롭히지도 않고.
사씨와 황실이 연합해 전쟁을 치른다니 사씨를 안정시켜 남진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거지. 얼마나 생각이 깊은 아이냐? 참 안타깝지, 황상이 마음이 없으니 내게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도 그 아이와 혼인시키는 건데.”
진연은 말이 없어졌다.
그때, 태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보기에도 은희가 참 괜찮더군. 하지만 황상이 마음이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오. 게다가 지금은 북제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어 더더욱 그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지요.”
“맞습니다. 지금이 어느 땐데요?”
그리고 영친왕비가 진연에게 말했다.
“연아, 군사 중점지인 막북에서 묵함과 사적인 정을 나눈다는 것 자체부터 장소와 시기가 옳지 않단다. 정말 좋아한다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거라. 더 이상 울면 웃음거리나 될 테니 뚝 그치고.”
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원망도, 억울함도 다 거둬버렸다.
태후는 그런 진연을 보고 영친왕비를 돌아보며 감탄했다.
“역시 형님이 확실히 나보다 낫소. 난 연이가 울어대는 모습에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도 없었는데요.”
영친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뭘 해도 예뻐하시기만 하니 그럴 만도 하지요. 어서 좀 씻고 와.”
진연은 곧장 밖으로 향하고, 영친왕비와 태후는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잠시 후, 진연은 얼음주머니로 부은 눈을 찜질했지만, 워낙 심하게 울어댄 탓에 붓기가 완벽히 빠지진 않았다. 하지만 딱히 못 볼 정도도 아니었다.
이윽고 영친왕비는 진연을 보며 물었다.
“네 오라비는 얼마나 다친 거냐? 새언니는 좀 어때?”
진연은 입술을 삐죽였다.
“별로 심하진 않은 것 같았어요. 오라버니는 언제나 그랬듯 한껏 성난 얼굴로 절 대하던데요?”
영친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걘 방화 말고 누구에게나 그러잖니.”
“맞는 말이오.”
태후도 웃으며 말했다.
“새언니가 회임했으니 안색이 당연히 그렇게 좋진 않죠.”
“뭐라고?”
영친왕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태후도 깜짝 놀라 진연을 바라보았다.
진연은 순간 멈칫하며, 이상하다는 듯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두 분……, 모르셨습니까?”
“네 새언니가 회임을 했다고? 정말이냐?”
영친왕비가 진연의 팔을 꼭 붙들고 물었다.
“네, 그렇다니까요.”
“연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말이다.”
진연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에요. 곧 있으면 2달째 접어드는걸요.”
“이 망할 놈! 강이 이놈은 소식 한 통 없더니 2달이나 됐는데도 어찌 내게 말 한마디 안 할 수 있단 말이냐!”
영친왕비가 진강을 욕하기 시작하자 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형님, 왜 좋은 일에 그러시오. 형님이 걱정하실까 알리지 않은 거겠지요.”
영친왕비 역시 사실은 너무도 행복했다.
“새언니는 좀 어때? 입덧은 심하지 않고? 네 오라비가 잘 챙겨주더냐?”
진연은 순간 질투가 솟아났다.
“어머니! 아무리 제가 어머니 곁에서 자라진 않았다지만, 어찌 친딸도 아닌 것처럼 이러실 수 있어요? 오라버니와 새언니 얘기에 눈빛부터 달라지시네요. 정말 너무하세요!”
“뭘 질투를 하고 그러니? 넌 황숙모님께서 계시잖느냐.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도록 만드는 네 오라비와 몸도 좋지 않은 네 새언니가 회임을 했다는데 어찌 걱정이 안 돼? 멀리 떨어져 있어 가까이 살필 수도 없는데. 연아, 어서 말해보거라.”
진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새언니가 군영에 도착한 그날 마침 북제와 싸움이 일어나 피비린내가 엄청나게 났는데 그 냄새를 못 견디고 토를 심하게 했어요. 오라버니는 그 모습을 보곤 어찌할 바를 몰라 안색이 창백해졌고요.”
“그다음은?”
“뭐 별 게 있겠어요? 새언니가 좀 괜찮아지니 전 군중의 의원을 따라 다친 병사들을 치료해주러 갔어요. 그러다 밤에 또다시 싸움이 일어났고 오라버니는 홀로 북제 군영을 쳐들어가 제언경에게 중상을 입혔어요. 거기다 사 후야의 전략으로 북제군을 제패해 대승을 거둔 거죠. 그리곤 이튿날 곧장 군영을 떠나려던 오라버니와 새언니를 마주쳤어요.”
“그리고?”
진연이 결국 화를 내며 말했다.
“어머니도 참! 오라버니와 새언니가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는데 싫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사 후야께서 저더러 가라며 부추기길래 성질을 내고 막사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지금 도성에 돌아와 있던데요.”
진연은 이렇게 강제로 황성으로 돌아왔을 바에는 차라리 진강과 사방화를 따라 떠나는 게 더 나았을 거라며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