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3화 (933/978)

933화. 병전(兵战)에 들어서다 (2)

“북제 옥가는 이미 소국구께서 모두 인수하셨습니다. 대인께서도 남진 황실과 강 소왕야, 소왕비마마와 친분이 깊긴 해도 북제와 옥가 사람이란 정체성은 잊지 않으신 것이지요.

태자전하께서 위기에 빠지셨단 얘기가 북제를 뒤덮었을 때도 소국구가 아니면 누구도 태자전하를 살릴 수 없었습니다.

소국구께선 태자전하를 살리시고, 국구께서 천기각에 가셨단 말에 그 뒤를 쫓았다가 오늘에야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곤 태자전하께서 고열에 시달리고 계신단 소식에 두 시진을 고생하시며 열을 내려주셨지요. 그 모습만 봐도 북제와 태자전하께 마음이 있으신 듯합니다.”

제언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수십 대를 걸쳐와 제왕마저 감히 침범할 수 없던 옥가 장로당이 이 일대에 소국구의 손에 무너지게 되다니 참으로 감개무량하구나.”

“소국구의 저 정도 패기와 능력으로 봤을 땐 태자전하께서 얼른 낫기만 하신다면 남진을 제패하는 건 문제도 아닐 겁니다.”

제언경이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다 나아서 소국구의 도움을 받으면 남진을 제패할 수 있다고? 지금껏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만, 이제 와보니 반드시 그럴 것 같지도 않구나. 북제 국토를 지켜내기만 해도 훌륭하다고 본다.”

“태자전하, 이 한 번으로 투지가 꺾여선 아니 되옵니다.”

제언경이 고개를 저었다.

“투지가 꺾인 게 아니다. 이 짧은 몇 달 사이 남진의 형세는 이미 천차만별이 됐다. 남진 황실과 사씨가 손을 잡고 여야가 모두 뜻을 모아 출병을 위해 힘쓰고 있지. 국가와 민심이 힘을 모아 뭉쳤어. 더 이상 몇 달 전, 반년 전, 1년 전의 남진이 아니란 말이다.”

“그……, 그럼 우리 북제가 위태롭단 말씀이십니까?”

제언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볼 순 없지. 옥가 장로당을 없애긴 했다만 소국구께선 옥가 장로들보다도 훨씬 뛰어나시잖느냐. 옥가의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국력은 쇠퇴하지 않았으니 북제는 여전히 북제인 것이다.

아바마마께서도 처음엔 남진에 흥병하시는 데에 별 관심이 없으셨지만, 어마마마께서 북제를 떠나시자 진노해 반드시 남진 영토를 짓밟아야겠다고 하시지 않더냐. 그런 걸 보면 우리도 하나로 뭉친 셈이긴 하지.”

“그럼 태자전하께선…….”

“소국구 말씀이 맞다. 적을 얕봐선 안 되니 앞으론 신중히 행동할 것이다. 북제가 지금껏 준비해온 게 있는데 웃음거리가 되어선 안 되지 않겠느냐.”

“소국구께서 군영에 계시니 태자전하께선 마음 편히 몸조리하십시오.”

제언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수를 불러오거라.”

그가 막 나서려는데, 제언경이 다시 그를 불러세웠다.

“됐다. 부르지 마. 지금껏 발전이 없긴 했으니 반성하게 두는 것도 좋지.”

* * *

남진 황성(皇城).

며칠 전 남진이 북제를 대패시키고 진강이 제언경에게 중상을 입혀 북제 황태자의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는 소식이 남진 전역에 퍼지자 조정에도 일제히 환호성이 일었다. 

이는 흥병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조정 관원들뿐 아니라 백성들도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남진 만백성이 과연 진강의 용맹함은 천하제일이라며 그를 칭송하기 바빴다.

진옥은 크게 기뻐하는 동시에, 막북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위로하며 그 가족들에게 후한 보상을 내려주었다.

그 무렵 사묵함의 서신도 진옥에게 전해졌다. 서신엔 이번 북제와의 전쟁에 쓴 전략 배치가 상세히 묘사돼 있었고 진강과 사방화는 천기각으로 갔으며 진강이 진연을 보냈으니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란 소식이 적혀 있었다. 

진옥이 서신을 들고 소천자에게 물었다.

“소천자, 천기각과 막북이 얼마나 떨어져 있느냐?”

“이삼 일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니 그리 멀진 않습니다.”

진옥은 사묵함이 보낸 서신의 날짜를 가늠해보며 말했다.

“그럼 벌써 천기각에 도착했을 텐데 상황이 좀 어떨지 모르겠구나.”

“강 소왕야께서도 참 너무하십니다. 어찌 서신 한 통을 보내지 않으십니까? 이목청 대인과 정효양 대인께서 돌아오시고 소왕비마마와 소왕야께서 만나신 뒤로 소왕야께서 소등자에게 소식도 전하지 못하도록 하신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이지. 가끔은 그들 소식을 듣기가 겁날 때도 있다.”

진옥이 서신을 내려놓았다.

“폐하…….”

소천자는 잠시 멍해졌다.

“방화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소천자도 진옥의 한숨을 들으며 입을 다물었다.

사방화가 버티지 못한다면 진강에게도 큰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소천자도 지금 진옥이 가장 걱정하는 건 두 사람의 목숨이란 걸 매우 잘 알았다.

진옥은 다시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사 후작도 이번 전쟁에 관해서만 짧게 써뒀을 뿐 다른 얘기는 아무것도 없구나. 어찌나 속을 알 수가 없는지 공적인 일이 아닌 이상 도무지 먼저 말을 하는 법이 없다.”

“연 군주께서 곧 오실 테니 직접 물어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지금껏 정신없이 밖을 떠돌더니 이제야 돌아오는구나. 어마마마께서도 어릴 적 궁 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너무 가둬뒀더니 뛰쳐나가 돌아올 생각을 안 한다며 어찌나 걱정하시던지, 보고 싶으셔서 안달이 나신 것 같았다. 백모님께서도 말씀은 안 하셔도 연이를 매우 걱정하시고.”

“연 군주께선 폐하보다 더 오랜 시간 태후마마의 곁에서 자라셨는데 이렇게 갑자기 몇 달째 황성을 떠나 계시니 적응이 안 되시는 것이겠지요. 왕비마마께선 강 소왕야와 소왕비마마를 더 걱정하고 계실 겁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도, 백모님도 참 쉽지 않으시구나.”

소천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연이는 며칠 뒤면 도착할 것 같으냐?”

“강 소왕야께서 보내신 암위라면 요 며칠 사이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소천자가 답했다.

“어마마마께도 말씀 올리고 영친왕부에 가서 백모님께도 알려드려라.”

소천자는 진옥의 명을 받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 *

태후는 진연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진연이 좋아하던 음식을 준비하라 분부했다. 그러자 여의가 말했다. 

“며칠 내로 온다고 하셨지 오늘 온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을에 접어들긴 했으나 아직 음식이 상하기 쉬우니 도착하신 당일 준비하시지요.”

“그래. 너무 기쁜 나머지 호들갑을 떨었구나.”

태후가 말했다.

반면, 진연의 친모인 영친왕비는 태후에 비해 매우 담담한 모습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태후마마께서 연이를 더 보고 싶어 하실 테니 돌아오는 대로 궁에서 며칠 머물게 해라.”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마마께선 연 군주를 몹시 보고 싶어 하십니다. 태후마마께서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영친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단 건 복 받은 게지. 한참을 떠돌다 이제야 돌아오는 걸 보니 이젠 마음을 좀 다잡았나 보군. 소왕과 소왕비는 어디 있느냐?”

“사 후야께서 보내신 서신에 천기각으로 가셨다고만 쓰여 있었습니다.”

“어떻게 서신 한 통을 보내지 않는지, 참 너무하구나.”

영친왕비가 말했다.

“북제를 제패하시느라 소왕야께서도 다치시지 않으셨습니까. 많이 지치셨을 겁니다.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선 보통 분들이 아니시니 걱정 마십시오.”

영친왕비는 이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인데 당연히 걱정이 되지. 황상 곁엔 태감이 필요하실 테니 어서 돌아가게. 알겠다고 전해드리고.”

소천자도 웃으며 인사를 올린 뒤 영친왕부를 빠져나갔다. 

* * *

다음 날, 진옥은 암위의 밀보를 통해 천기각이 무너지고 옥조천이 중상을 입어 언신이 그를 북제 황성으로 돌려보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다.

또 충용후가 북제 황후 사봉, 최윤, 사임계를 데리고 남진 황성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진옥은 미간을 찌푸렸다.

“천기각이 무너졌다고?”

암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강과 방화는 어찌 됐느냐?”

“소왕야와 소왕비마마의 종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진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신 뒤로 남진 황실과 사씨가 손을 잡았으니 노후야께서도 이젠 돌아오시려나 보구나. 모두 방화 덕이지, 참으로 다행이야. 방화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북제를 대패시키기는커녕 점령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이번엔 참으로 통쾌하게도 이겼구나. 북제 소국구는 지금 어디 있느냐?”

“북제 군영에서 소왕야께 중상을 입은 북제 태자를 살렸다고 들었습니다.”

“옥언신도 이 병전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듯하구나. 북제 소국구고, 옥가 사람이니 북제 군영에 들어서는 것도 이상할 건 없지. 진강과 방화는 어디 있는지 어서 알아보고 오거라.”

암위는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 *

3일 후, 진강의 암위가 진연을 데리고 남진 황성에 도착했다. 

진강의 명대로 진연은 혼수상태가 되어 진옥의 어서재에 다다랐다. 

진옥은 진연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이게 어찌 된 것이냐?”

암위 하나가 진옥에게 다가가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답했다.

“소왕야께서 분부하신 대로 연 군주를 모셔왔습니다. 혼수상태에 들게 하는 약을 복용하신 겁니다. 오늘은 약을 드시지 않았으니 반 시진 뒤면 깨어나실 겁니다.”

혼수상태에 드는 약? 진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암위에게 물었다.

“어째서 약을 먹인 것이냐? 도성에 안 돌아오겠다고 난리라도 피웠어?”

“소왕야께서 분부하신 대로 군주를 기절시켜 모시고 왔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으니 연 군주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물어보십시오.”

“진강은 어디 있느냐?”

“천기각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나선?”

그가 고개를 저었다.

“군주를 모셔올 무렵 두 분께서 천기각을 가신다고만 들어서 그 이후론 어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옥은 손을 내저으며 암위들을 물렸다.

진연은 몇 달 사이 막북의 모래바람에 꾀죄죄해져선, 그가 정말 특별히 황궁에서 귀하게 자란 군주라는 건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진옥이 곧 소천자에게 말했다.

“우선 좀 씻겨주거라.”

소천자는 밑 사람에게 진연을 맡긴 뒤 진옥에게 물었다.

“폐하, 그 다음은 어찌할까요? 태후마마의 궁에 모셔드릴까요, 아니면…….”

“여기로 데려오거라.”

소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 * *

반 시진 후, 진연은 비로소 깨끗한 본래의 미모를 되찾았다.

그리고 간이침상에 눕혀지자마자 바로 깨어났는데, 눈을 뜨고 한참 정신이 멍한 듯 사방만 둘러보았다. 

그때, 옥안에 앉아 상소를 읽던 진옥은 인기척에 진연 쪽을 바라보았다.

“일어났느냐?”

그 순간 진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옥이 오라버니 아니, 폐하?”

“그래, 나다.”

진연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자신 한번, 어서재를 한번 살펴보다 얼굴을 힘껏 꼬집어보고는 몹시 아파하며 진옥을 쳐다보았다.

“어째서…….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여긴 어서재다. 도성으로 돌아온 거야.”

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전 막북에 있었는데 왜 돌아온 건가요? 어떻게……, 돌아온 겁니까?”

“돌려보냈지, 누가.”

“누가요?”

진옥이 말없이 바라보자 진연은 화가 나 침상을 탁, 내리치며 말했다.

“사 후야죠! 내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이렇게 기절시켜서 얼렁뚱땅 보내버릴 수 있는 거예요? 어찌 이리 사람 같지도 않은 짓을! 대체 날 뭐로 보는 건가요! 막북 군영에서 하라는 대로 움직이고 피해 주지 않으려고 얼마나 말을 잘 들었는데 이래도 내가 싫다는 건가?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진옥은 가만히 눈썹을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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