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화. 옛정을 생각해 봐주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언신의 등장과 그의 분부에 암위들은 어리둥절했지만 아무런 불만도 내뱉지 않았다.
진강, 사방화, 언신,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잠시 후, 사방화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토를 하기 시작했다.
진강은 깜짝 놀라 얼른 사방화를 부축했다.
“또 속이 메스꺼운 거요? 어서 자리를 피합시다.”
사방화는 있는 힘을 쥐어짜 말을 하려다, 다시 토를 했다.
언신도 안색이 급변해 서둘러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진강은 말이 없었다.
언신은 즉각 사방화의 손을 잡고 맥을 짚었다가 깜짝 놀랐다.
“회임…… 하신 겁니까?”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언신은 급변한 얼굴 그대로 말없이 사방화만 보고 서 있었다.
사방화는 한참 후에야 겨우 진정됐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선 힘없이 진강의 품에 기댔다.
“피비린내가 독하니 우선 자리를 뜹시다.”
진강이 사방화를 안으려 하자, 사방화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혼자 걸을 수 있으니 상처 안 닿게 조심해요.”
진강도 그냥 사방화를 부축해 시냇물 상류로 걸어갔고, 언신도 뒤를 따랐다. 그리고 청암은 암위들과 남아 난장판이 돼버린 곳을 정리했다.
* * *
상류에 다다르자 사방화는 물가에 웅크리고 앉아 입을 씻으며 세수를 했다. 이제야 좀 메스꺼움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방화, 이제 좀 괜찮아?”
진강이 걱정스레 묻자,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지만, 무엇도 물을 수 없었다. 그렇게나 찾아도 보이질 않던 언신이 갑작스레 나타났고, 또 그의 부친이 옥조천이라는 확답까지 들었다. 끝내 다 뭔가 변해버렸다는 생각만 감돌았다.
뭘 물어야 할지도 몰라 침묵이 흐르던 그때, 언신이 천천히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쌍생아신 건 맞습니다. 하지만 쌍생아 중 한 분께선 어린 나이에 요절하셨고. 옥가에선 밖으로 이 이야기를 흘리지 않았지요. 그분께서 돌아가신 뒤로 할머님께선 정신이 오락가락하시어 종종 아버지를 죽은 형제로 대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결국엔 아버지께서도 인격이 둘이 되어 옥조천과 옥조연으로 나뉘어 살아가시게 된 것이지요.”
북제의 국구, 옥조연과 옥조천이 한 사람이란 게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사봉처럼 똑똑한 사람도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보아, 두 인격은 실로 엄청나게 분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20년 전, 옥가의 한 장로께서 아버지를 남진에 출사해 죽음을 가장한 뒤 그를 빌미로 출병하자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옥조천이 죽어도 옥조연은 남아 있으니 상관없었지요. 북제가 남진에 출병할 만한 공명정대한 이유였던 겁니다. 하지만 그 계획이 한 여인에 의해 무너질 건 예상치 못한 거지요.”
“그분이 우리 고모지?”
사방화의 말에 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북제 황제폐하께선 주인님의 고모님을 마음에 품으시곤 옥가의 반대에도 남진과 화해의 손을 맞잡으신 겁니다. 그렇게 사봉 아가씨께서 북제로 시집가시면서 양국은 지금껏 휴전을 이어왔지요.”
진강이 말을 이었다.
“옥가의 장로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온 그 계획을 북제 황제가 연심 하나로 무너뜨렸으니 참 달갑지 않았겠군.”
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누가 감히 황제폐하께 반기를 들 수 있었겠습니까. 다시 계략을 짜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때 마침 남진 황실과 충용후부의 사이가 나날이 틀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남진 황실은 버젓이 남진 강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충용후부와 사씨라는 두 호랑이를 없애려 혈안이 돼 있었지요. 그들은 바로 이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옥조천이 암암리에 남진 은산 은위에 잠입했고 은위 종사들을 수복한 것이군.”
진강의 말에 언신이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충용후부와 사씨 세력이 워낙 컸기에 사씨가 남진 황실을 붙들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사씨가 없으면 남진 강산도 없는 거였습니다.
남진 황실에서 사씨를 제거하기만 기다린다면 100년을 기다려도 불가능할 게 뻔했고 황제 또한 무력했습니다. 하지만 남진 황실의 명치에 칼을 꽂고 사씨의 핵심을 와해시킬 수만 있다면 남진을 자멸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언신의 말을 듣고 있으니, 사방화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전생에 사씨는 바로 이렇게 집안이 몰수당해 살아갈 희망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사씨가 무너지고 남진 황실의 강산 또한 끝이 났다.
하지만 사방화는 전생에선 세상도 모른 채 자란 귀족일 뿐이라, 세상 물정은커녕 나라 정세도 볼 줄 몰랐고 음모가 있을 거란 건 더더욱 상상치도 못했다. 사방화는 그저 남진 황실을 원망하기만 했을 뿐, 암암리에 숨겨진 북제 옥가란 그림자는 전혀 보지 못했다.
진실은 바로 북제 옥가가 남진 황실 은산 은위를 매수해, 남진을 자멸의 길로 이끈 것이었다.
다시 태어난 사방화는 무명산에서 황성으로 돌아온 뒤 작은 일 하나하나에도 빈틈없이 파고든 덕에 배후에 숨겨진 모략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후 사방화는 사씨 가문을 나누고 충용후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으며 선황제가 일찍이 승하한 뒤 진옥이 즉위하게 되자 그와 손을 잡고 진강과 진옥 형제를 화해시켜 엄청난 무기를 만들어 냈다. 이렇듯 북제의 음모에도 남진 모두가 뜻을 합쳐 하나씩 풀어나가니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거였다.
언신은 사방화를 힐끗 보다가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충용후부 세자와 세자비마마께서 돌아가신 뒤 아버지께선 남진 황제가 이번엔 사씨를 확실히 제거할 거라 생각했지만, 두 분의 죽음으로 죄책감을 느낀 선황제가 더는 사씨에게 손을 대지 못할 거란 건 예상치 못했습니다.”
사방화는 가슴을 움켜쥐며 터질 듯한 감정을 억눌렀다.
“장로들은 옥가에서 무명산으로 보낼 사람을 하나 더 파견해야겠다고 결정했고 그게 바로 저였습니다. 아버지께선 반대하셨지만, 장로들 결정에 맞설 순 없어 그렇게 제가 무명산으로 보내지게 됐습니다.”
사방화는 물끄러미 언신을 올려다보았다.
“가주에게서 버림받고 들어온 게 아니었네.”
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니었습니다.”
사방화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전 집안 장로들께 잡혀 있기도 싫고 무명산도 싫었지만, 아버지처럼 당신의 진정한 신분을 밝힐 수도 없는 사람은 더더욱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존귀한 옥가 적통에 존경받아야만 하는 한 나라의 국구였지만,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배후에서 모략을 꾸미고만 사신 인생이지요. 그렇게 아버지는 자신도 잊고 옥조천과 옥조연으로 나뉘어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오셨습니다.”
사방화와 진강은 말없이 언신의 말을 들었다.
“전 무명산을 벗어나 혼자 힘으로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무력하게 무명산 종사의 선임만 기다리다가 남진 황실에 들어가 장로들 계획대로 아버지와 남진을 와해시키게 될 것만 같았지요.
제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몇 년 뒤,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에게서 벗어날 힘이 생겼을 때 이미 전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단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때, 사방화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정혼을 조건으로 내걸었을 때 이미 정혼했음에도 시원스레 동의했던 거였구나. 내가 무명산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 뒤 나와 함께 천기각을 세웠던 것도 남진 황실에 대항하려던 거였어.”
진강이 눈썹을 들썩였다.
“정혼?”
“그땐 끈끈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선 정혼만 한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땐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던 때였고요.”
진강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원하던 조건이었을 뿐 아니라, 옥가의 계략과도 맞아떨어졌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무명산을 나가 들통 나게 되더라도 옥가 장로께 핑계 댈 구실 거리가 생기는데, 어찌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호랑이에게 가죽을 달라고 했던 격이네.”
언신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사방화는 저도 모르게 심한 말이 튀어나왔다고 생각했지만, 언신의 신분과 그가 지금껏 자신에게 숨겨왔던 것들, 옥조천의 아들이었단 걸 떠올리자 이젠 사과나 그 어떤 변명조차도 소용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신은 한참 후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무명산에서 나와 절 따르던 사람들과 옥가 장로들 눈을 피해 천기각을 세웠습니다. 그 덕에 5년간 옥가 장로들과는 연락조차 닿지 않았지요.”
이내 사방화가 고개를 들고 언신을 바라보았다.
“바로 작년, 주인님께서 무명산을 무너뜨리고 내려와 저랑 남진 황성으로 향하셨지요. 그땐 강 소왕야를 피해야 했기에 제 신분을 밝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옥가 장로들도 제가 일찌감치 무명산을 빠져나갔단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됐지요.”
사방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언신에게 말했다.
“언신, 내 주위 사람들 모두가 널 의심할 때도 난 네가 날 해치지 않을 거라 믿었어. 오늘도 마찬가지였고.”
언신은 떨리는 눈동자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어 나오는 음성도 한껏 갈라져 있었다.
“절 믿고 있단 걸 알고 있었습니다. 옥가 장로들은 제가 5년 전 일찍이 무명산을 빠져나갔단 걸 알고 절 다시 데려가려고 했지요. 하지만 제가 어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 있었겠습니까? 제가 들은 척도 하지 않자, 결국 어머니를 이용해 절 협박했고 끝내 저도 옥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도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네가 북제로 돌아갔던 그때 말이지?”
“예, 주인님 고모님을 구했던 그때요. 전 옥가로 돌아가 그간의 계략들로 빠르게 옥가의 핏줄을 끊어냈고 대부분 세력을 제 손에 넣었습니다.
때마침 폐하께서 운설을 통해 주인님 고모님을 구해달라고 하셨는데, 옥가 장로들도 탐탁진 않았지만, 절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도 옥가 세력을 제대로 장악하기 전까진 장로들을 호되게 옥죌 수도 없어서 당분간 그들의 비위를 맞춰 주는 수밖에 없었지요.
제가 떠난 뒤 남진에서 벌어졌다던 일은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남진 은산 은위들과 손을 잡고 모든 계략을 동원해 남진 시국을 뒤흔들고 있었을 때가 마침 제가 옥가를 수복하려던 때였지요. 장로들과 아버지께 들키지 않기 위해 주인님과 모든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진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고 옥조천이 떠난 뒤에도 여전히 시끄러웠던 국세를 떠올렸다.
“언신, 네 아버지 말고 배후에 또 누가 있는 거야? 네 아버지가 진연을 납치해 남진을 떠나고 나서도 그보다 더 사악한 놈이 계속해서 일을 꾸몄어.”
“운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방화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껏 운설과 옥가 장로들 사이에 어떤 계약이 있었는진 모르겠습니다. 우린 그저 정혼만 한 사이일 뿐이었으니까요.”
사방화가 말했다.
“조가진에서 목청 공자랑 함께 미란초에 중독된 제운설을 발견했었어. 10여 종이 넘는 약초들을 배합해 만든 미란초로 한 달이 넘게 정신을 잃게 만들 수 있는 건 네가 아닌 이상 아무도 해낼 수 없잖아.”
언신이 고개를 저었다.
“전 그때 북제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미란초도 2년간 배합해본 적조차 없었고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신이 그렇게 말하니 믿을 거야. 지금껏 너랑 나도 알고 지낸 세월이 있잖아. 네가 말하고 해왔다는 것, 모두 너라면 다 믿을 수 있어.”
언신은 문득 사방화를 바라보다, 긴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옥가는 지금껏 제언경에게 남진을 평정해 북제가 이 나라 통일을 이루도록 육성해왔습니다. 그 성과는 톡톡히 보고 있지요. 북제와 남진의 전쟁, 우리 세대에선 절대 피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전 물론 남진과 적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형세로 봤을 땐 제가 제언경을 구하고 아버지 목숨만은 살려달라 청했어도 양국의 평화를 지켜낼 순 없습니다.
북제가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해도 남진에서 물러서지 않을 테니 저도 북제과 우리 가문이 무너지는 걸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저도 결국은 북제 사람이고, 옥가의 자식이니까요.”
<『경문풍월』 3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