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화. 옛 진법으로 대치하다 (2)
모두가 자리를 잡자 사방화는 손을 휘둘러 가는 실 하나를 만들어, 강가 물속을 향해 쏘아 보냈다. 그 순간, 강물 위에 실오라기로 물방울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강가에 삽시간에 물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잠시 후, 물안개는 사방화의 진 위로 덮였고, 눈 깜짝할 새에 청암과 200명에 달하던 암위들이 모습을 감췄다.
사방화는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나 진강에게 말했다.
“봐요. 하나도 안 다쳤죠?”
“심혈을 썼단 걸 내가 모를 줄 아시오?”
진강은 안색을 굳힌 채 사방화의 손을 잡았다. 사방화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고 안색도 다소 창백했다.
사방화가 매우 어두워진 진강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정도로 옥조천과 그 무리를 해치울 수 있다면 충분히 쓸 만한 거죠. 이 암위들을 오늘부터 벌써 고생시킬 순 없잖아요.”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잡고, 시화에게 물었다.
“시화, 약 있느냐?”
시화가 다가와 옥병을 내밀었다.
“예, 소왕야. 여기 있습니다.”
진강이 옥병에서 약 세 알을 꺼내 건네자, 사방화가 멈칫했다.
“약에도 독 성분이 있잖아요. 전 괜찮…….”
“속박술에 걸려 있으니, 이 정도 약으론 아이에게 해를 끼칠 수도 없소.”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받아먹었다.
바로 그때, 옥조천의 무리가 다가와 안개에 갇혔다.
짙은 안개를 사이에 두고 있어 맞은편에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한 사람이 말을 세우니, 나머지도 줄줄이 말고삐를 잡고 멈췄다.
“국구, 이리 맑은 날 안개가 낄 리가 없는데 뭔가 이상합니다.”
“그렇습니다, 국구. 누군가의 함정이 분명합니다.”
“그 함정을 쓸 사람이 사방화밖에 더 있겠냐? 근데 뭘 겁내?”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방화의 악랄한 수단에 천기각에서 벌써 반이나 떨어져 나가버리지 않았습니까. 근데 아직 사방화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으니 여기서 함정에 걸려들었다간 손쓸 방법도 없을 겁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말소리가 이어졌지만, 익숙한 목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진강은 낯빛이 어두웠지만,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됐다. 모두 그만해라.”
바로 그때, 진강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화는 옥조천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어, 조용하게 물었다.
“옥조천이죠?”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의 확답을 들으니, 사방화는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버렸다. 그간 남진에서 당했던 수모와 원한을 떠올리니 절로 분노가 들끓었다.
밖에선 옥조천의 말이 떨어지니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옥조천은 눈앞에 자욱하게 낀 안개를 보며 말했다.
“사방화와 진강 모두 몸 상태가 좋지 않을 거다. 가까이 가 살펴보거라.”
“제가 가보겠습니다.”
사방화의 짓이라 말했던 암위가 나섰는데, 옥조천이 그를 만류했다.
“네가 원하는 매족의 심법은 얻을 수 있을 테니 그리 조급하게 굴 거 없다. 우선 살펴보고 다시 얘기하자.”
옥조천의 말에, 암위는 뒤쪽을 향해 손짓했고 1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은 즉각 짙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매족의 심법을 넣으려 하는 것을 보니, 사방화와 진강의 손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남진 은산 은위들이 이미 옥조천과 손을 잡은 것으로 보였다.
남진 황실에 대한 배반이라……. 사방화는 입가에 차디찬 웃음을 띠었다.
* * *
반 시진이 지났지만, 안개 속으로 뛰어든 이들은 아직 소식이 없었다. 말발굽 소리도,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기다리다 못해 입을 열었다.
“어찌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겁니까?”
옥조천은 말이 없었다.
“한 번 더 들여보내 볼까요?”
옥조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또다시 10여 명이 넘는 이들이 들어갔지만 다시 또 흔적도 없이 잠잠할 뿐이었다.
“요술 아닐까요?”
“매족의 술법일 뿐이다. 지금껏 죽어라 손에 넣으려 한 게 겨우 요술이란 말이냐?”
옥조천이 말했다.
“하지만 20명이 넘게 들어갔는데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잖습니까. 마냥 여기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사고가 난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또 한 사람이 말했다.
“국구 대인께선 어떤 매술인지 아십니까?”
옥조천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매술인진 모르겠다만, 전에 구음 구양진이라 불리던 옛 진법이 있었단 게 생각나는구나. 매족 왕실에서 전해 내려온 진법으로 매족 왕실 사람의 심혈로 초목의 기운을 끌어당겨 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음양을 결계로 해 저승문과도 같지. 진법에 걸려든 자는 살아나갈 수 없다.”
“그럼 저희는 지금 이 진법에 가로막혀 사방화가 멋대로 돌아다니게 해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살아나갈 수 없으니 절대 들어가선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국구. 천기각에서 벌써 반이나 희생됐으니 더 이상 위험 수를 둬선 안 됩니다. 앞서 들어간 20명도 아무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죽은 게 분명합니다.”
옥조천은 앞쪽 진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국구, 말씀 좀 해보십시오. 진법을 깨트릴 방법은 없습니까?”
“뭘 그리 조급하게 구느냐? 내 보기엔 그저 간단한 매술로 물안개를 동원해 만든 진법일 뿐이다. 사방화는 그간 몸 상태가 좋질 않았으니 이 진법을 만들어 내는 걸로 이미 전력을 다했을 거고 진강도 마찬가지다. 우릴 떼어놓으려 만든 진법일 뿐이지.”
암위들은 옥조천의 명령을 기다렸다.
“모두 날 따라 진 안으로 들어간다.”
“국구,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무서운 놈은 여기 남아 있거라.”
옥조천이 매섭게 쏘아보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가자!”
옥조천이 선두로 안개 속으로 뛰어들자, 뒤에 있던 나머지 암위도 우르르 몰려와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방화는 몹시 차가운 낯빛으로 살짝 비웃음을 흘렸다.
‘곧 우리들 손에 죽을 옥조천이 살아나갈 생각을 하고 있다니.’
사방화가 목소리를 낮추고 진강에게 말했다.
“청암이 옥조천을 상대할 수 있을까요?”
“글쎄.”
사방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진강의 손을 잡았다.
“같이 들어가요.”
진강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이번엔 참 감사하게도 날 데려가 주는군.”
사방화는 그의 손을 잡고, 허리춤에 보검을 꺼내 안개진 속으로 들어섰다.
* * *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진법이라, 사방화는 그 누구보다도 진법의 방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내 손쉽게 청암의 뒤쪽에 다다랐다.
진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을 수 없지만, 진 안쪽에서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고 있었다.
안개 속에 짙은 피비린내가 퍼져나갔다.
사방화는 막북 군영에서 피비린내를 맡고 토했던 기억이 있기에 침착함을 유지하며 들어섰지만, 이번엔 속이 울렁거리지 않았다.
청암이 인기척에 검을 뽑아 들려 하자 사방화가 먼저 다가갔다.
“청암, 나야.”
“소왕비마마? 어찌 들어오신 겁니까?”
“나도 있다.”
진강까지 확인한 청암은 안도의 한숨을 쉬다, 다시 걱정스럽게 말했다.
“소왕야, 아직 무공을 쓰셔선 아니 됩니다.”
“네 혼자 힘으론 옥조천을 당해내기 힘들 것 같아 들어왔다. 네가 한계에 다다르면 그때 나서서 도와주마.”
청암은 이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강과 사방화가 청암의 뒤에 서자마자, 옥조천이 검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순식간에 나타난 그는 귀신같이 검은 옷을 입고 크게 호령했다.
“모두 중문을 향해 돌진하라. 죽여라!”
옥조천의 호령에, 암위들은 그의 뒤를 따라 안개진의 중문으로 모여들었다.
삽시간에 중문에선 엄청난 압력과 함께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사방화는 단순히 청암과 천기각 사람 30명에게만 이 중문을 맡겼다면, 옥조천에게도 당해내지 못했을뿐더러 진도 충분히 뚫렸겠단 생각이 들었다.
옥조천은 실로 엄청난 몸놀림과 매서운 검법으로, 눈이 따갑도록 차가운 광선과 함께 청암을 향해 검을 날렸다.
차가운 광선은 짙은 안개를 갈랐고, 청암과 중문을 지키고 있는 자들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진강의 최고 암위인 청암은 진강과 거의 맞먹는 무공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옥조천의 검에 몸이 밀려났다.
옥조천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한 차례 검을 더 날렸다.
청암은 얼른 몸을 돌려내며 막아섰고, 진강과 사방화는 청암의 뒤에서 옥조천의 무공을 지켜보며 중문의 움직임을 살폈다.
옥조천의 뒤를 따라 들어온 암위들은 얼마 되지 않아 대부분 안개진에 길을 잃고 사라져버렸고, 각 방위를 지키고 있던 암위들도 신속히 그들을 향해 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목숨을 거둬들였다.
얼마 후, 청암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사방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고 안개진은 온통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옥조천이 막 청암을 죽이려던 그 순간, 진강과 사방화가 동시에 검을 뽑았다. 두 사람의 검은 엄청난 빛을 뿜어내며 파공의 유성처럼 옥조천의 심장과 명치를 찔렀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 고수일지라도 이 두 사람의 검을 피할 순 없었다.
물론 사방화와 진강은 몸 상태가 예전 같진 못했지만, 옥조천이 청암을 죽이려던 그 순간 얼른 힘을 합쳐 필살의 수를 날린 것이었다.
사방화와 진강은 인정사정없이 옥조천을 죽이려 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옥조천의 뒤쪽에서 누군가 달려와 소리쳤다.
“옛정을 생각하십시오!”
귀를 강타하는 엄청나게 익숙한 목소리, 바로 언신이었다.
사방화는 손을 멈칫했고, 진강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약간 손목을 돌려 옥조천의 심장을 살짝 빗나가게 베었다.
쉭-
검은 짧은 소리를 내며 옥조천을 찔렀고, 청암의 심장 바로 앞에 있던 검은 멈칫하며 무너지고, 옥조천은 그대로 쓰러졌다.
언신은 서둘러 쓰러지는 옥조천을 부축했다. 그는 안색이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채, 옥조천의 명치를 살펴보곤 고개를 들어 진강에게 인사했다.
“강 소왕야, 이 정도로 끝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진강은 검을 거두며 언신을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
“언신 공자, 저 자를 죽이지 못하게 한 이유를 설명해보시오.”
언신은 입술을 깨물었고, 사방화는 그런 그를 보며 천천히 검을 거뒀다.
한참 후, 언신은 끝내 기절해 버린 옥조천을 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입니다.”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주인님, 우선 안개진부터 치워주십시오!”
언신의 말에, 사방화는 주변의 살벌한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강이 사방화의 손을 잡고 만류한 뒤, 언신에게 말했다.
“지금 남진 은산 은위들이 방화를 죽이려 하는데 심혈을 써서 만든 진을 어찌 거둘 수 있겠습니까?”
“조금 전 진으로 들어올 때 제 손으로 은위 종사를 죽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리되셨으니 앞으론 모두 제 명령에 따를 것입니다. 지금부터 손을 쓰는 자가 있다면 제 손으로 직접 죽이겠습니다.”
이내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놓아줬고, 사방화는 안개진을 거둬들였다.
삽시간에 안개가 걷히자, 바닥엔 수백에 달하는 옥조천 무리의 시신들이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각 방위를 지키던 청암과 암위들은 사상자가 거의 없었다. 그들 모두 갑작스럽게 풀린 진법에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곧이어 누군가 다시 손을 쓰려는데, 언신이 소리쳤다.
“멈춰라!”
“공자님?”
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언신은 무리를 쓱 둘러보고는 한 사람을 불러 옥조천을 넘겼다.
“내가 나올 때까지 모두 물러나 기다리고 있거라.”
“국구께선…….”
언신이 노려보자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옥조천을 데리고 남은 300명의 은위들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