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화. 천기각을 떠나다
천기각 천수만 뒷길은 천기각을 세울 때 함께 개축했던 곳이었다. 그래서 이 뒷길은 언신, 사방화, 진 영감 외에 경가와 천기각 칠성조차 모르는 아주 은밀한 길이었다. 뒷길은 산 아래부터 뚫려 여러 산봉우리로 이뤄져 있었다.
일행이 막 뒷길로 들어서자 앞산 쪽에서 검은 옷 무리의 소리가 들려왔다.
뒷길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엄지손가락만 한 야명주도 걸어둬서 어둠 속에도 간신히 나아갈 수는 있었다. 또 뒷길은 그다지 정교하게 보수된 곳은 아니라 바닥엔 울퉁불퉁한 돌이 남아있어 걷기도 힘들었다.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꼭 잡고 조심스레 나아갔고, 사봉은 시녀의 부축을, 사임계는 충용후를 부축해주었다.
얼마 뒤, 충용후가 입을 열었다.
“방화야, 이 뒷길은 어디로 연결돼 있느냐?”
“천기각 단풍나무 숲 맞은편 풍엽호(枫叶湖)로 이어집니다.”
충용후가 눈썹을 들썩였다.
“우린 지금 앞산을 향해 가고 있는 것 아니더냐? 그들은 지금 앞산 단풍나무 숲 밖에 있는 거겠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기가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진강이 말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로군. 옥조천도 우리가 이렇게 그들 뒤로 빠져나갈 거라곤 생각지도 못할 것이오. 배를 타고 나가나?”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고, 진 영감이 말을 덧붙였다.
“천기각에서 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언신 공자와 주인님께서 상의 끝에 풍엽호에다 빠져나갈 길을 마련해뒀습니다. 풍엽호를 지키는 자가 있으니 우리가 떠나면 함께 배를 타고 떠날 겁니다.”
“누구도 생각지 못할 절묘한 방법이군.”
진강의 말에,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땐 남진 황실을 대비해 만들어둔 거였는데 이렇게 북제를 피해 쓰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네요. 옥조천이 살아 있을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어요?”
바로 그때 사봉이 말했다.
“당시 옥가에서 옥조천의 죽음을 위장해 남진을 모함하자며 계략을 세웠었단다. 그리곤 지금껏 신분을 숨기고 남의 눈을 피해 암암리에 모의를 해왔던 거지. 나도 모르게 옥가가 대단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남진의 왕씨 가문이 한창 전성기일 때 물러나 세상에서 멀어져가던 것에 비해 북제 옥가는 가업을 이루고자 늘 강인하게 끝없이 노력했으니까.”
“고모, 옥조천을 만나보신 적 있으세요?”
사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지.”
“어떤 사람인가요?”
“성격과 행동은 괴팍해도 무척 세심하고 뛰어난 수단이 있는 사람이지.”
“대체 북제 옥가엔 국구가 몇 명이나 있는 건가요? 옥조천과 옥조연은 같은 사람인 거예요, 아니면 정말 다른 사람인 건가요?”
사방화의 물음에 사봉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형제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닮긴 했지만, 정말 성격이 달라. 옥조연은 항상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고 화를 내는 법이 없어 북제에서도 인맥이 좋았단다. 옥조연이라면 다들 그의 체면을 살려주느라 바빴지. 태후마마와 옥 귀비도 날 못살게 굴어 안달이 나 있는데 그런 내게도 아주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대했어. 단점은 찾기 힘든 사람이었지.”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반 시진쯤 지났을까, 머리 위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고함이 들려왔다. 아마도 한창 진을 깨트리고 있는 듯했다.
일행은 아무 말 없이 걸음을 더욱 가볍게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또 얼마 후, 머리 위쪽으로는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지만, 멀리서 어렴풋이 진을 깨부수려 난리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화는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자,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출구가 나옵니다. 출구를 빠져나가면 즉시 배에 올라타고 절대 소리를 내선 안 돼요.”
출구에 다다라 진 영감이 기관 문을 열었다.
밖에선 순식간에 눈을 찌를듯한 빛이 새어 나왔다.
곧 사방화가 진 영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는 앞서 뒷길을 빠져나갔다. 진강과 사방화도 곧장 그 뒤를 따랐다.
뒷길 출구에는 끝없이 펼쳐진 호수가 있었다. 또 양옆으로 단풍나무 숲이 빼곡했다. 호수로 흩날리는 단풍들, 풍엽호란 이름을 증명하는 절경이었다.
풍엽호 가장자리에 한 줄로 늘어선 배가 보였다. 주변엔 어부 차림을 한 사람들이 그 배를 지키고 있었다.
진 영감은 길게 늘어선 배들을 훑어보다가 어부 차림을 한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손짓에 나머지도 즉시 뱃머리를 돌려 배를 일렬로 세웠다.
진 영감은 서둘러 모두를 배에 태웠고, 뱃사공이 밧줄을 풀자 배는 소리도 없이 호숫가를 떠나 저 멀리 나아갔다.
진강은 배 위에 앉아 사방화에게 말했다.
“저들에게 천기각을 넘겨주는 것 같아 찝찝한데.”
사방화가 말이 없자 진 영감이 대신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소왕야. 저희가 풍엽호를 떠난 뒤로 저들이 천기각을 들어서는 순간 천기각은 폭발할 겁니다. 운이 좋으면 반 정도 살아남을 것이고 모조리 여기다 뼈를 묻을 수도 있습니다.”
진강이 금세 피식, 웃음을 지었다.
“후수도 준비돼 있었다니 그것참 훌륭하군.”
진 영감이 사방화를 힐끗 보곤 말을 이어갔다.
“언신 공자님께서 천기각을 절대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세워두신 계획이었습니다. 게다가 챙겨가지 못한 물건들이 남아있으니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모조리 저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잖습니까. 천기각 사람들의 내막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진다면 앞으로 세간에서 살아남긴 힘들 테니까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신의 재주도 참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군. 옥가 사람이란 게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야.”
진 영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조용해진 그때, 사봉이 입을 열었다.
“소국구라면 나도 여러 번 만나본 적이 있네. 아무리 옥가에 날고 기는 자손이 넘친다고 해도 그만한 인물은 없었지. 1년 전, 옥가의 대부분 세력이 소국구 손에 들어가 가주가 아주 불만이 많다고 들었어.”
그러자 사방화가 물었다.
“옥가의 세력을 장악한 게 불만이었던 건가요?”
“그건 아닐 거다. 옥가로 돌아올 뜻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날 구해주기도 했기에 태후마마, 옥 귀비를 비롯한 옥가 전체가 불만이 많은 것 같더구나.”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언신은 옥가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고초도 참 많이 겪었어요.”
사봉도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에 고초를 겪지 않아본 자가 어디 있겠니? 남들이 보기엔 우리가 존귀한 대접만 받으며 비단옷을 입고 사람들을 거느리며 복에 겨워 살아가는 걸로 보이겠지만 사실 우리도 만만찮은 고생을 떠안고 살잖니. 출신이란 건 태어나면서 정할 수도 없는 것이니까.”
그 순간 충용후가 콧방귀를 뀌었다.
“출신을 정할 순 없지만, 스스로의 앞길은 정할 수 있지.”
사봉이 웃으며 말했다.
“네. 맞는 말이에요, 아버지.”
“전쟁이 터지면 북제 황실과 옥가도 우리 남진 황실과 가문들처럼 전력을 다해 덤벼들겠죠. 언신이 어디 있는지 걱정돼요.”
사방화의 말에, 진강이 사방화 손을 꼭 잡아주며 이야기했다.
“지금 북제 군영에서 제언경을 치료하고 있을 것이오.”
사방화는 이내 말이 없어졌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호숫가엔 바람도 불지 않아 배는 순조로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천기각에 검은 옷을 입은 침입자들은 저 멀리 내팽개쳐졌다.
* * *
한 시진이 지나, 충용후가 물었다.
“방화야, 이제 어딜 가는 게냐?”
“조부님, 이제 외숙부님, 임계 오라버니, 고모님과 황성으로 돌아가세요. 선황폐하를 피해 달아나듯 황성을 떠났지만 이젠 새 황제폐하께서 즉위하셨으니 더는 충용후부를 난처하게 할 일도 없습니다. 고모도 그간 고향이 그리우셨죠? 저랑 낭군님, 진 영감은 이제 운란 오라버니와 왕의안을 찾겠습니다.”
충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집이 참 그립긴 했다. 온통 잡초로 뒤덮인 건 아니겠지?”
“계속 청소하던 사람이 있어 그렇진 않습니다. 세 분께서 황성을 떠나 조금 적막할 뿐이지 황폐해지진 않았어요.”
충용후는 문득 황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떠날 땐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을 줄 알았다만 충용후부가 이렇게 황실과 화해를 하다니, 진정 남진 황실과 충용후부, 사씨의 복을 이뤘구나.”
“다 방화 덕이지요.”
최윤의 말에 충용후가 고개를 저었다.
“이 애 혼자 모든 공로를 차지할 순 없지. 모두의 노력이 만들어낸 게다.”
사방화도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내 충용후가 사봉에게 물었다.
“이제 가면 좌상을 만나게 될 텐데 겁나지 않느냐?”
사봉은 즉각 충용후를 흘겨보았다.
“아버지, 젊었을 적에도 겁내본 적이 없는데 다 늙어서 뭘 겁낸단 말이에요? 저도 그 사람에게 미안할 건 없어요. 충효를 다하느라 정분을 다하지 못했던 것뿐이라고요.”
“한번 결심한 마음은 끝까지 잘 지키도록 해라. 또다시 사고를 칠 바에는 차라리 돌아가지 않는 게 낫다.”
“아버지 딸도 이젠 나이가 지긋이 들었고 저 자신 하나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에요. 생사의 갈림길에 서서도 염치 불고하고 그 사람을 위해 아이도 낳았고요. 이제 와 그 사람을 보게 된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 사람이든, 폐하든 전 다 떳떳해요.”
충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곁에 없는 동안 아이를 둘이나 낳아 그걸 숨기느라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지. 행여 빗나가진 않을까, 응석받이가 될까, 무공을 익히도록 하면서도 잘못될까 싶어 가슴이 두근두근했는데 다행히 모두 다 괜찮구나.”
사봉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방화는 고모를 보며 진심으로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누구도 고모처럼 용감하고 정, 도의, 충심, 효까지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충용후 역시 자식을 앞서 보내고 하나 남은 자식까지 멀리 시집보낸 뒤 홀로 그 거대한 충용후부를 지켜낸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딸 사봉도 저 멀리 시집가서도 아버지에게 언제든 포근히 기댈 수 있었다. 충용후는 사봉에게 있어, 영원히 의지할 수 있는 아주 단단하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사봉도 한참 웃다가 문득 마음이 아파진 듯 조용히 이야기했다.
“운계가 북제에 왔을 땐 한번 보기는 했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그리고 경가는……, 지금껏 한 번 만나보지도 못했구나.”
사방화는 사봉을 가만히 쳐다보며 다정히 말했다.
“경가는 폐하의 중임을 받아 형양성 성주가 됐어요. 이제 황성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형양성을 지나게 될 테니 틀림없이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얼마나 날 원망할지 모르겠구나.”
“고모께서도 어쩔 수 없으셨잖아요. 원망하진 않을 거예요.”
사봉이 한숨을 내쉬었다.
“좌상과 폐하껜 미안할 게 없다지만, 내 품에서 키우지 못했던 두 아이에게만큼은 너무도 미안하구나. 어미 없이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꼬.”
그러자 잠자코 있던 충용후가 입을 열었다.
“고생도 좀 해봐야 큰 인물이 되는 것이지. 뭐 하러 그런 걱정을 해. 그래도 낳아준 어미이니 그간 서러움은 좀 있더라도 감사할 게다. 경가 그놈도 다 알고 있으니 걱정 마라. 황성에 그리 오래 지내면서도 좌상에게 털끝만큼도 티 내지 않은 걸 보면 그 심성 하나만 봐도 장래가 아주 무한한 아이야.”
사방화도 말을 이었다.
“북제에서 고모를 멀찍이 뵌 적이 있다고 했어요. 제 곁에 그리 오래 있었는데도 저 역시 경가의 신분에 대해선 전혀 몰랐었어요. 이 일로 경가와 언신을 찾아내 직접 물어보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모르고 있었을 거예요. 조부님께서 참 완벽히 비밀을 지키셨던 거죠.”
“경가와 네 고모를 위해 함부로 드러나선 안 될 신분이었으니 그랬지. 내게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느냐.”
충용후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사방화는 다시 사봉에게 말했다.
“고모, 염려 마세요. 경가도 고모께서 남진으로 오신 걸 알고 있어요. 제가 전해드릴 말 없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만나게 될 테니까 괜찮다고 하던걸요.”
사봉이 곧 웃으며 충용후에게 말했다.
“아버지, 풍엽호를 나가면 곧장 떠나요. 어서 그 아이를 만나보고 싶네요.”
“알겠다.”
충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일행은 말없이 배를 타고 나아갔고, 호수는 강과 연결돼 있어 곧장 직류로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