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화. 다른 자식으로 바꾸다
진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야 설명이 좀 되는군.”
“뭐가요?”
“진 영감과 천기각 서고에 가서 매족에 관련된 고서를 찾아봤소. 그중 한 권에 매족 혈맥에 관한 얘기가 있더군. 왕실과 성녀 일맥은 세대마다 단 한 명뿐이라고 돼 있었소. 다시 말해 운란 형님과 의안 중 한 명만 매족이고 나머지는 매족이 아니란 것이오. 운란 형님이 매족 왕실 후계자란 건 모두가 알고 있잖소. 근데 뭘 근거로 운란 형님이 매족 왕족이라 확신하는 거지?”
사방화가 순간 멈칫하며 진강을 올려다봤다.
“설마 운란 오라버니가……, 매족이 아니란 말씀이세요?”
“우린 운란 형님에게 왕족의 저주이자 매족 왕실 비술인 분심이 걸렸단 이유로 운란 형님이 매족 왕족이라 생각했었소. 그 분심 저주를 대체 누가, 왜, 어떻게 건 것인지 알고 있소?”
사방화는 전생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기 전, 조가에게 분심 저주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사방화는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조가도 운란 오라버니가 어쩌다 저주가 걸린 건지는 모른다고 했어요. 5년 전 모든 고서를 뒤지고 훌륭한 신의셨던 스승님께 도움을 청해 겨우 분심 저주에 걸렸단 걸 알게 됐다고 했지요. 나중에 외조부님께서도 매족 왕족 혈맥이 아닌 이상, 분심 저주에 걸려도 아무 반응이 없다고 하셔서 운란 오라버니가 매족 왕족이라 생각해왔어요.”
진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사부님께서 운란 형님에게 분심 저주를 내리셨소.”
“자운 도장이요?”
“그렇소.”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도 당시 사씨 미량 노부인이 자운 도장을 욕할 때 분명 그가 사운란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 것이라 추측했었다. 이제 그 어렴풋한 추측에 실마리가 좀 잡히는 기분이었다. 정말 자운 도장이 사운란의 목숨을 위협하는 분심을 걸었기에 노부인은 죽도록 자운 도장을 미워했던 게 아닐까?
“매족 혈맥의 대물림 말고 또 뭘 알아내셨어요? 운란 오라버니의 신분에 대해서도 알아내신 거예요?”
“음, 진 영감이 자운 도장의 신분을 찾아냈소.”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자운 도장께선 매족이 아니셨어요?”
“매족이었지. 매족의 국사셨는데, 자운 도장도 매족 왕족이셨소. 그것도 매족 왕과 한 배에서 난 형제. 그래서 당시 매족 천도 규훈에 착오가 생기고, 매족이 멸족하는 천벌을 받게 된 것이오.”
사방화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설마…….”
“내 추측이 맞다면 운란 형님은 우리 사부 자운 도장의 친자손이오.”
사방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운 도장께선 진정한 매족 왕실 후계자인 의안을 지키기 위해 운란 형님을 앞세운 것이오. 모든 이의 시선이 운란 형님에게 집중되면서 그 위험까지 짊어지게 된 거지. 그래서 지금껏 황조모님 곁에서 자란 청운관 왕 장군의 셋째 아들이 진정한 매족 왕실 후계자란 걸 아무도 모르는 것이오.”
사방화는 금방이라도 숨이 멈출 듯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게 어떻게…… 말도 안 돼요. 전생에…….”
“당신이 피를 다 쏟아냈음에도 운란 형님을 살리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요. 당신과 의안에게서 느껴진 같은 기운은 진정한 매족 왕실과 성녀 일맥에서 전승된 기운이었소. 두 사람의 혈맥은 서로에게 쓸모가 있지만, 운란 형님에겐 그 전승의 기운이 없으니 당신의 피로도 살리지 못한 것이오.”
사방화는 마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럼 뭐란 말이오?”
사방화는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말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그럴 수 없어요. 운란 오라버니가 어떻게 매족 왕실 후계자가 아닐 수 있어요? 자운 도장의 친자손인데……, 어찌 자운 도장에게 이용당해 왕의안을 대신해…… 왕의안이 어떻게…….”
진강은 말없이 사방화를 품에 안아주었다.
사방화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진강이 말한 모든 얘기가 너무도 잘 맞아떨어진단 걸 부정할 순 없었다. 사씨 미량 노부인이 그토록 자운 도장을 미워했던 이유와 전생에서 피를 다 쏟아냈음에도 사운란을 끝내 살리지 못한 까닭, 사방화와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던 왕의안까지…….
무엇도 반박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 사방화는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운란 오라버니가 자운 도장의 친자손이라면 어느 분과의 사이에서 난 자손이에요? 아들이에요, 아니면 손자란 말이에요?”
진강은 사방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들일 것이오. 추측이긴 하지만 틀리진 않을 거야. 운란 형님은 자운 도장과 매족의 한 장로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오. 그 장로는 바로 제운설의 모친인 북제의 란비일 거야. 란비와 운란 형님은 친모자 사이로 혈맥이 이어져 있기에 분심이 일어났을 때 운란 형님을 살릴 수 있었던 거지.”
사방화는 제대로 충격에 빠진 듯했다.
진강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추측이긴 하지만, 십중팔구 맞을 것이오. 당시 자운 도장께선 의안을 대신해 아들을 사씨 미량 노부인에게 보내 사씨 미량 가문으로 들어가게 했던 것이오. 그리곤 운란 형님에게 분심을 써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고, 모두가 운란 형님이 매족 왕실 후계자라 믿게 만든 거지.
배후에서 얼마나 많은 암살과 위협을 받아왔을지는……. 그에 비하면 황조모님과 왕 씨 가문의 보호를 받은 의안은 훨씬 안전했었소.”
사방화는 순간 몸까지 휘청거렸다.
전생에서부터 현생까지 사운란이 그간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사방화는 그 모든 걸 직접 곁에서 지켜본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사운란은 매족 왕실 후계자도 아니었고, 오로지 왕의안의 보호막이 되어 수많은 이들의 시선과 음모를 겪어내며 살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친아버지에게 이용당하면서 말이다. 사운란은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진강은 사방화를 부축하며 걱정스레 말했다.
“내 추측일 뿐이니 너무 깊게 생각 마시오.”
그러나 사방화는 진강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는 결코 함부로 어떤 일을 추측하거나 근거 없이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맥락을 짚어가며 거의 확신하지 않는 이상, 몇 번이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는 아주 진득하고 진중한 성정이었다.
이내 사방화는 정신을 가다듬고 조심스레 물었다.
“만약 당신 말이 다 사실이라면……, 운란 오라버니도 다 알고 있을까요?”
“아마도. 전생과 현생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으니, 전생엔 몰랐더라도 이번 생엔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오. 몰랐다고 하더라도 란비가 운란 형님을 구하려다 돌아가셨는데 이젠 알지 않겠소?”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제운설과 운란 오라버니는 아버지만 다른 친남매라는 거네요?”
“한때 제운설이 도성을 찾아왔던 날 우린 모두 언신을 보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도 아마 운란 형님을 보기 위해 찾아왔던 게 아닌가 싶소. 아직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알아봅시다.”
사방화도 걷잡을 수 없이 뒤엉킨 마음을 두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충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밖에서 뭘 그리 중얼대는 거냐! 들어와서 얘기하거라.”
진강은 즉각 사방화의 손을 잡고 안뜰로 들어섰다.
* * *
충용후가 말없이 눈썹을 들썩이자,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충용후부에 비할 순 없지만 천기각 서고가 어찌나 크고 넓은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모르겠더군요.”
충용후가 진강을 노려보며 말했다.
“또 무슨 말을 했기에 방화가 저 꼴을 하고 있는 게야?”
진강이 미간을 문지르며 물었다.
“조부님, 조부님께선 매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자운 도장과 사씨 미량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요?”
충용후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방화의 부모가 죽고 난 뒤 매족이라면 질색해, 알아본 적도 없고 아는 것도 많지 않다.”
이내 진강이 아무런 말이 없자, 사봉이 물었다.
“왜?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느냐?”
진강은 사봉을 바라보았다.
“고모님, 북제에 오래 계셨으니 란비에 대해서 잘 아시지요?”
“응, 내가 북제로 시집갔을 때 란비께선 이미 황궁을 떠나셨었지. 황궁 내에서도 태후마마, 옥 귀비를 비롯해 모든 이들이 란비에 관한 얘기라면 입도 뻥끗하지 않았지만, 폐하께 들은 이야기는 있다.”
진강이 말했다.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란비는 사실 매족이고, 매족 중에서도 아주 고귀한 신분이라고 하시더군. 란비께선 어쩔 수 없이 북제 선황폐하와 혼인하게 됐지만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신 뒤 태후마마께서 수를 쓰려하자 공주를 데리고 사라지셨지.
몇 년이 지나 운설 공주는 옥가와 왕래를 하며 북제 황성에도 왔었지만, 란비께선 오지 않았어. 그러다 1년 전 딱 한 번 황성에 오셨는데 그때 난 병으로 앓아누워 직접 만나 뵙진 못했지. 폐하와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을 나눴는지는 모르겠고, 그다지 좋지 않은 안색으로 돌아오신 것만 기억나는구나.
내가 아는 건 이게 전부야. 태후마마, 옥 귀비를 비롯해 옥가 전체가 날 주시한 통에 항상 뒤에서 몰래 소식을 알아봤었거든. 폐하께서도 다른 소식이야 상관하지 않으셨지만, 매족에 대해 알아보는 건 극히 꺼리시는 듯했지.”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충용후가 손을 내저었다.
“됐다! 아직 여기 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으냐. 방화도 여러모로 조심해야 하니 내일마저 이야기하고 어서 쉬거라.”
사봉도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들에게 물었다.
“소왕야와 소왕비께서 머무실 방은 잘 치워뒀느냐?”
“황후마마께 아룁니다. 예,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사방화도 달구경을 할 기분은 아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진강과 함께 시녀의 안내를 따라 방으로 향했다.
* * *
사방화는 방으로 들어와 진강을 챙겼다.
“안 피곤하세요? 진 영감이 식사 준비는 해줬나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진 영감이 날 굶길 리 있겠소? 난 괜찮아.”
이내 사방화는 살며시 진강의 품에 기댔다.
“그간 운란 오라버니는 남을 위해 그토록 고생한 거네요. 제가 들어도 이렇게 충격적인데 오라버니는 이 사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진강이 사방화를 토닥였다.
“운란 형님이잖아. 당신 말대로 지금껏 그 많은 고생을 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견뎌낸 사람인데. 지금 분심보다 더 골치 아픈 게 어디 있겠소?”
“왕의안은 어디 있을까요?”
“천하가 아무리 넓다 한들 의안을 찾는 건 어렵지 않소. 진 영감에겐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사방화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진강을 일으켰다.
“어서 운란 오라버니를 만나고 싶어요. 얼른 자고 내일 일어나서 천기각에 진 영감을 만나러 가요.”
진강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아침, 진강과 사방화가 막 천기각으로 출발하려는데 진 영감이 다급히 달려왔다. 사방화도 놀라 곧바로 질문했다.
“진 영감, 무슨 일인데 이리 급하게 왔어?”
진 영감의 안색이 어두웠다.
“주인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대거로 천기각을 향해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여긴 더 이상 사람이 없어 저 중 진에 능한 사람이 있다면 진법 하나만으로 버티기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어떡하지요?”
진강도 그 옥조천이 천기각으로 찾아와 수를 쓸 거라 예상했다. 그의 추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진강은 즉각 진 영감에게 물었다.
“천기각에 사람이 얼마나 남았지?”
“100명도 채 안 됩니다. 저들은 족히 1,000명은 되고요. 다 암위 고수들이고, 악한 기운도 심하게 느껴지는 것이 남진의 은산 은위도 있는 듯합니다.”
“천기각을 버리고 뒷산 뒷길로 떠나자.”
이어진 사방화의 말에, 진 영감이 깜짝 놀랐다.
“주인님과 언신 공자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세우신 천기각이잖습니까!”
“언신은 믿어도 옥조천과 북제 옥가는 믿지 않아. 진 영감 말대로 아무리 진법이 정교해도 천 명을 당해내긴 무리야. 일단 진법이 뚫리면 막아낼 수 없을 테니 지금 흩어지는 게 나아. 아무리 천기각이 중요하다고 한들 생명 없는 물체일 뿐이잖아. 청산은 바뀌지 않지만, 물은 길게 흐르는 법. 사람이 살아만 있다면 천기각을 새로 짓는 것쯤은 어려울 것도 없어.”
진 영감도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 말씀이 옳습니다. 오랜 시간 천기각에 머물다 보니 잠시 아쉬운 마음이 컸던 듯합니다. 지금 바로 철수하라고 전하겠습니다. 주인님께선 어서 다른 분들과 떠날 채비를 하십시오.”
“응.”
사방화는 소등자, 시화, 시묵에게 서둘러 충용후, 사봉, 최윤, 사임계에게 떠날 채비를 하란 말을 전하도록 했다.
잠시 후, 천기각 모든 이들이 철수했고 충용후, 사봉, 최윤, 사임계도 간단히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진강과 사방화가 힘을 합쳐 뜰 전체에 진법을 두르고 난 뒤 일행은 뒷산의 뒷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