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5화. 왕래하다
“그래, 골치 아픈 건 미뤄두고 어서 식사를 내오너라! 방화 배고프겠다.”
충용후가 하인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사방화도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아직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난 진강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천기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배고프면 알아서 먹을 걸 찾을 테니 걱정 말거라. 하여간 딸들은 혼인만 하면 그때부터 팔이 밖으로 굽어선, 쯧쯧…….”
사방화가 어이없다는 듯 충용후를 바라보는데, 사봉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래, 혼인한 딸은 사방화 뿐만이 아니었다. 사방화도 그만 픽, 웃음이 터져 눈길을 거둬들였다.
“너도 똑같아!”
충용후가 사봉을 흘겨보자, 사봉은 사방화의 손을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외증손에게 탈이라도 날까 괜히 우리한테 화풀이하시는 거야. 방화 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라.”
“저 순 나쁜 것들, 됐다!”
사봉과 사방화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고개를 홱, 돌렸다.
충용후는 곧장 두 사람을 가리키며 최윤과 사임계에게 하소연했다.
“저 애들 좀 봐라! 만나기만 하면 이리 내 성질을 돋우니, 원.”
최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돈 어르신, 곁에 없을 땐 보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 좋아서 그러신 거 다 압니다.”
사임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충용후는 콧방귀를 뀌며 상이 다 차려진 걸 보곤 손을 내저었다.
“밥이나 먹자꾸나.”
상엔 충용후의 분부대로 시고 매운 음식이 올랐다.
사방화는 한 입씩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방화야, 신 게 좋으냐, 매운 게 좋으냐? 입에 맞는 걸로 어서 먹거라.”
충용후의 말에,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전부 입맛에 안 맞습니다.”
“어찌 그럴 수 있어?”
“신 건 너무 시고, 매운 건 너무 맵습니다.”
충용후는 반찬을 한번 맛본 뒤, 모두에게 물었다.
“너희도 먹어봐라. 방화 말대로 정말 간이 센 것이냐?”
사봉은 웃으며 말했다.
“적당히 시고 매워요. 못 먹을 정돈 아니네요.”
최윤도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가 말했다.
“그럼 전 신 것도 싫고 매운 것도 싫어하는 거네요.”
충용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뭐가 좋으냐?”
“아무거나 다 먹을 순 있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건 없습니다.”
충용후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그에 사봉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딸이든 아들이든 증손주인 건 달라지지도 않는데. 딸, 아들 모두 각자 장점이 있잖아요.”
충용후는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히 아들놈이어야지! 영친왕부 적통이 강이 하나뿐이잖느냐. 진호가 아무리 개과천선했다고 하더라도 왕부를 받들 인물은 못 되지. 뭔가를 이룬다고 해도 서자이니, 영친왕부 적통 뿌리를 이어나가야 한다.”
“그건 그러네요.”
사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방화 닮은 딸이 태어나면 걱정거리가 또 하나 느는 거잖느냐.”
이어진 충용후의 말에, 사방화가 눈을 흘겼다.
“조부님, 어쩜 그리 걱정이 많으십니까? 영친왕부 후손 걱정하실 시간에 친손자인 오라버니나 걱정해 주세요. 오라버니도 어서 손주를 낳아야죠.”
충용후는 곧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줄 아느냐? 전쟁 중이라 군영에만 있는데 어디서 여인을 만난단 게냐?”
“그에 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진연이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듯해요.”
“진연? 아, 황궁에서 자란 영친왕부 그 꼬맹이 말이구나. 강이 동생.”
“네.”
“그 아이가 함이를 좋아한다고? 사실이냐?”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이후 사방화는 막북 군영에서 나올 때 있었던 일을 간략히 들려주었다.
이내 충용후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성에서부터 막북까지 쫓아가다니 끈기 하나는 인정할 만하구나. 평생 영친왕비 곁에서 자라진 못했다만 태후마마께서 잘 키워주셨지. 태후마마는 황제폐하의 친어머님이시니 얼마나 그 가르침이 훌륭했겠어. 위대한 황가의 자손인데 네 오라비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조부님, 정말 그게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진연은 제게 지금 새언니라고 부릅니다. 정말 오라버니와 혼인한다면 이제 제가 진연을 새언니라 불러야 하는데, 오라버니와 우리 낭군님 족보도 꼬이는 것 아닙니까?”
충용후가 사방화를 흘겨보았다.
“이젠 이 노인네보다 네가 더 예의를 따지는구나. 남매끼리 혼인하는 일은 널리고 널렸다. 그때 가서 각자 정하면 되는 것이지, 뭘 그리 난리냐? 혈연이 어지럽혀진 게 아니라면 큰일도 아니다.”
사방화가 미간을 찌푸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조부님께선 찬성하신다는 겁니까?”
충용후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네 오라비가 결정할 일이지, 이 노인네가 찬성하고 말고는 소용없다. 원한다면 혼인하는 것이고, 아니면 그 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겠지.”
“진강이 진연을 폐하께 보냈습니다. 오라버니는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요. 그 모습을 보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보이던데요?”
“그럼 네 오라비는 대체 어느 여인에게 마음이 있다더냐? 혼인할 생각도 없어 보이던데. 아휴, 됐다! 오라비에 비하면 넌 그나마 좀 나은 편이지.”
사방화는 순간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고, 사봉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충용후는 다시 사봉을 호통쳤다.
“넌 웃긴 뭘 웃고 있느냐! 북제 황제와 일을 물으면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기만 하더니, 이젠 방화도 왔으니 대체 어찌 된 건지 제대로 말 좀 해봐라. 북제 황제를 버리고 남진으로 돌아온 것이냐? 아직도 그 노…….”
“아버지, 그 연세에 뭐 하러 그런 걱정을 하세요? 좀 이따 방화와 둘이서 얘기할 테니 남은 노후나 편히 즐기세요.”
사봉은 웃으며 충용후의 말을 잘랐지만, 사방화는 흠칫 놀라 굳어있었다.
“다 여기 가족만 모였는데 말 못 할 게 뭐 있어? 노용도 그간 성격이 많이 변했다. 훌륭한 좌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지금은 권세가 기울었고 처첩도 엄청나지. 그 딸은 강이 형인 영친왕부 진호와 혼인했다. 방화랑 동서지간이지. 너희 일은 지금껏 꽁꽁 숨겨 경가 신분은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한다. 좌상조차 경가가 자기 아들인 줄 모르니, 만약 지금이라도 돌아가려 한다면…….”
“아버지! 이제 와 뭘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럼 대체 어쩔 생각이냐? 방화도 있으니 어서 진심을 말해다오.”
사봉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둘 거예요.”
충용후는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뭘 흘러가는 대로 둔단 말이냐?”
“남진과 북제의 전쟁이 얼마나 크게 일어날지, 언제까지 갈지도 모르잖아요. 하지만 전 엄연한 남진 사람이고 아버지 딸로서 돌아온 거예요. 그냥 그게 전부예요. 폐하와의 사이가 어땠냐고 물으신다면 아무리 제가 돌이라고 하더라도 그간 함께해 온 세월이 있으니 달궈지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제가 이 자리로 온 건 제 선택이고 그냥 결과를 기다리는 거예요.”
“뭘 기다린다는 거냐?”
“아버지, 어머니와 오라버니, 새언니까지 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평생 홀로 고생하신 거 잘 알아요. 그러고도 전 20년 넘게 아버지 곁에 있어 드리지도 못했잖아요.
살아 있는 동안 절대 다신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리 만나게 돼 정말 다행이라 여겨요. 전 이제 아버지를 모시며 못다 한 효도를 하고 싶고, 양국 간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궁금해요. 폐하도 제 남편이긴 하니까요.”
“일찍이 이렇게 말했으면 좀 좋았잖느냐. 넌 내 딸이기도 하지만 네겐 남편도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어서 식사하자꾸나, 다 식었겠다.”
사봉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사방화는 몰래 한숨을 내쉬며 고모도 그간 남진과 북제 양국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돌아온 것도 마음이 향하는 대로 움직인 것이지만, 한편으론 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 그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모든 걸 걸지 않으면 어느 제왕도 제업의 초석을 다질 순 없었다.
하지만 사봉은 절대 남진의 패배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건 진옥, 진강, 황실, 영친왕부, 충용후부, 남진의 백성들까지도 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나라의 존엄과 고귀함마저 짓밟힌 채 여생을 굴욕적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길 정도로 비참한 삶이었다.
남진은 절대 패배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패배의 쓴잔은 북제의 몫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북제가 패한다면 북제 황제도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럼 고모 사봉은……. 사방화는 앞날을 생각하자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이 녀석이, 밥상 앞에서 웬 한숨이냐? 어서 먹거라!”
충용후가 젓가락으로 상을 한번 툭 쳤지만, 사방화는 답답한 마음에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에 사봉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때문이 아니면 누구 때문이겠어요? 식사할 땐 말없이 식사만 하셔야죠. 아버지 말씀 때문에 방화가 생각이 많아져서 입맛이 떨어진 거잖아요. 저도 입맛이 다 떨어졌네요.”
충용후는 사봉과 사방화를 가만히 번갈아 보다 홀연 목소리를 낮췄다.
“천하에는 수많은 이익과 감정이 왕래하는 것일 뿐이다. 그 사이의 도리를 알지 못하면 답답하고 짜증이 나겠지만, 깨닫는 순간 별것도 아닌 게 되는 법이지.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녀석들이 걱정은 사서 하는구나.”
사봉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사방화도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조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밥 먹자!”
두 사람도 이젠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 * *
식사가 끝나자 날이 저물고 밤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사봉은 하늘을 밝게 비춘 달빛을 올려다보며 운을 뗐다.
“여긴 월병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참 아쉽네요. 저 예쁜 달을 보면서 월병을 못 먹다니.”
충용후가 물었다.
“북제에 있는 동안 황궁에서 요리해본 적 없느냐?”
사봉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전 황후예요, 황후. 황후가 직접 요리를 할까요?”
충용후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사방화는 이내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천기각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진강은 언제 돌아오는 것일까? 중추절 보름날 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함께 달구경조차 하지 못하면 그 얼마나 애석할까?
* * *
달이 중천에 떠오르고 사방화의 엉덩이가 들썩일 때쯤 진강이 돌아왔다.
사방화는 진강의 모습이 보이자 벌떡 일어나 치맛자락을 들고 뛰어나갔다.
“하이고……, 정말 몇 년은 떨어져 있다 만난 줄 알겠네.”
혀를 차는 충용후를 보고, 사봉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 아이들 사이가 저리 좋은데 뭘 그리 아니꼬워하세요?”
충용후는 또 가만히 콧방귀만 뀌었다.
지금 사방화는 충용후가 뒤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그런 건 상관할 새도 없었다. 숨도 안 쉬고 진강에게로 달려가 그의 팔을 잡고 말을 쏟아냈다.
“더 늦으면 직접 찾아가려 했어요.”
진강도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사방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이쯤이면 충분히 기다렸을 것 같아 얼른 돌아왔소.”
“뭐 좀 찾으셨어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곽은 잡혔지만, 아직 확실하진 않소.”
“어떤 윤곽이요?”
진강은 가만히 사방화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물었다.
“사씨 미량 노부인께서 임종 직전에 당신에게 남기셨던 말씀 기억하오?”
그 말을 어찌 잊겠는가. 사방화는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진강이 눈썹을 까딱였다.
“방화, 아직도 내게 말 못할 게 있는 것이오?”
“그게……, 이 일과 관련 있는 건가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자세히 따져보지 않으면 확실히 할 수가 없소.”
사방화는 사씨 미량 노부인이 임종 전 자신에게 남긴 말을 들려줬다. 그날 노부인이 사방화의 손을 잡고 자운 도장을 욕하며 진강과 혼사를 엎고 반드시 사운란과 혼인해야 한다고 말한 그 기억이 떠오르자 마음도 불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