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2화. 무사히 돌아오다
동틀 무렵, 진강이 막북 군영으로 돌아왔다.
막사 입구를 지키던 청암은 진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소왕야! 다치셨습니까?”
진강이 말을 꺼내기도 전, 사방화가 안에서 달려 나왔다. 그리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진강을 보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
진강은 갑작스레 튀어나온 사방화를 보고 서둘러 말했다.
“거의 다 다른 이들의 피요. 난 아주 조금 다친 것뿐이니 걱정 마시오.”
사방화는 서둘러 진강의 외투를 잡아당겼는데, 순식간에 갑옷과 겉옷이 찢어졌다. 진강은 자신의 내의마저 잡아당기려는 사방화를 내려다보다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날도 밝았는데 이렇게 모든 이가 보는 곳에서 내 옷을 벗기면 이제 난 얼굴을 어찌 들고 다니겠소? 들어가서 봅시다.”
진강은 그대로 사방화의 손을 잡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엔 사묵함이 잠들어 있었다. 진강은 그를 보고 발소리를 한껏 죽인 뒤 사방화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가슴팍에 칼을 맞긴 했다만 깊게 베이진 않았소.”
사방화는 말없이 진강을 침상에 앉혀놓고, 내의를 벗겼다.
제일 먼저 왼쪽 가슴에서 오른쪽 옆구리까지 아주 길게 남은 상처가 보였다. 뼈와 근육까지 베인 정도는 아니었지만, 상처는 꽤 깊었다. 그래도 진강 스스로 지혈제를 발라둬서, 피는 굳어도 아직 핏물이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이게 가벼운 상처라고요?”
진강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죽을 뻔한 제언경에 비하면 당연히 가벼운 상처지.”
“제언경은 안 죽었나요?”
“북제 군중에 뛰어난 의원이 있다면 죽진 않을 거야. 하지만 한 달 내로는 침상에서 절대 못 내려올 것이오.”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곤 시화와 시묵에게 말했다.
“시화, 시묵. 깨끗한 물과 약상자를 내와.”
잠시 후, 사방화는 깨끗한 물과 술로 상처를 소독한 뒤 연고를 바르고 꼼꼼히 감싸주었다. 진강은 가만히 누워 사방화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방화는 상처를 다 치료한 뒤에야 진강의 얼굴이 불그스름한 것을 알아차렸다. 진강의 이마는 이미 손대고 있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그녀는 맥을 짚어주고, 처방전을 내 시화와 시묵에게 약을 달여오라 분부했다.
시화와 시묵은 즉각 처방전을 가지고 막사를 나갔다.
곧 사방화가 손수건에 물을 묻혀 진강의 이마에 얹어주자, 진강은 한가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부인이 신의라 돌팔이에게 시달릴 필요가 없으니 참 좋네.”
사방화는 바로 진강을 째려보았다.
“상처가 깊진 않지만, 고뿔에 걸리면 더 심해지기 쉬워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선 안 돼요. 제언경이 조금만 더 힘을 썼다면 정말 큰일 날뻔했어요.”
진강은 천천히 사방화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럴 능력이나 있는 놈이어야 말이지.”
“상처에 닿지 않게 조심해요.”
진강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흠잡을 데 없이 준비를 해두고 나가면서도 문제가 생길까 마음이 편하질 않았소. 당신이 계속 눈에 밟히고 걱정이 돼서 말이지. 그래도 이렇게 당신이 무사한 걸 보니 이제야 마음이 완전히 놓이네.”
사방화는 행여 진강의 상처를 건드릴까, 가만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당신이 혼자서 막북 군영에 갔단 말을 듣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저도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이런 귀찮은 일은 진옥에게 하라고 시켜야겠소.”
“폐하께 어찌 그런 위험한 일을 시키신단 말이에요? 당신도 그냥 말로만 그러시는 거잖아요.”
진강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댔다.
“그래, 남진에 진강이 없을 순 있어도 진옥이 없어선 안 되지. 나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어 나섰던 것이오. 그게 아니면 아무리 진씨 선조를 위해서라고 해도 이런 위험을 무릅쓰진 않았을 것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내오라 했으니 그만 놔주세요. 좀 쉬다가 식사 다 하시면 약도 다 달여졌을 거예요.”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배도 안 고프고 피곤하지도 않으니 그냥 옆에 있어 주시오.”
사방화는 왜 홀로 북제 군영에 잠입했는지, 어떻게 제언경을 공격했는지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피곤함도 억누르고 잠도 이루지 않는 진강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에 절로 침묵하게 됐다.
진강이 사묵함과 어떻게 병력 배치를 했든, 어떻게 제언경에게 중상을 입혔든 그냥 무사히 돌아왔으니 그런 것쯤이야 몰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현재 그녀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나약한 상태라 양국의 전쟁에 개입하고 싶어도 힘이 없으니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오?”
“일주일 안으론 상처가 낫기 힘들 거예요. 보름 전까진 절대 완전히 나을 수 없어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심각한 것도 아니니 길에 올라도 괜찮소.”
사방화가 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 나으면 그때 다시 가요.”
“가면서 상처를 치료해도 괜찮아. 이 정도는 끄떡없소. 북제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니 한 달 내로는 움직일 수 없을 것이오. 한 달 후면 연석과 의지가 지원군을 데려올 테니 한 달 내로 우린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모르는 건 확실히 다잡아 놓아야 하오. 한 달 뒤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그땐 이렇게 왔다 갔다 해서 될 일도 아니라 누가 죽느냐만 초를 다툴 것이오.”
사방화가 답을 하려는데, 순간 사묵함이 잠에서 깨 흠칫 놀랐다.
“매제, 다쳤는가?”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냥 가볍게 다친 정도입니다.”
“매제가 온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네. 지금 몇 시나 됐지?”
사방화가 부드럽게 답했다.
“오라버니 그동안 너무 피곤했나 봐요. 아직 진시(*辰時: 아침 7~9시)밖에 안 됐어요.”
사묵함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물었다.
“매제, 제언경은 죽었나?”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그건 제언경에게 입은 상처인가?”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묵함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영을 둘러보고 올 테니 편히 쉬고 있게. 조부님을 뵈러 가겠다는 것 같던데 몸 좀 나으면 출발하도록 하고.”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출발할 겁니다.”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오늘이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마차에서도 충분히 쉴 수 있잖소.”
“안 돼요! 상처가 덧나면 더 큰 일 날 거예요.”
그러자 진강이 말했다.
“천기각 천수만도 반드시 안전한 곳이라 볼 순 없어. 북제 대영에서 옥조천을 마주쳤소. 내가 제언경을 크게 다치게 만들었으니 옥조천과 북제 사람들 모두 그를 살리는데 급급해 내게 복수할 여력은 없을 것이오.
막북 군영에선 저들도 아무 힘을 쓸 수 없을 테지만, 천기각 천수만으로 가는 길에선 달려들기 시작할 거야. 난 괜찮지만, 이젠 우리 아이도 있으니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좋을 건 없소. 우선 천수만에 가서 다시 얘기합시다.”
사방화가 말했다.
“전에 제가 말씀드린 방법대로 언신에게 연락은 하셨어요? 연락은 되나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천기각은 언신이 무명산에서 나와 비밀리에 지어둔 곳이에요. 천수만은 천기각 뒷산에 있고요. 제가 조부님을 거기로 모신 것도 언신을 믿기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물론 지금도 믿고요.”
“당신이 언신을 믿는 것과 옥조천이 우리에게 손을 쓰는 건 다른 일이오. 언신도 어디까지나 북제의 소국구고, 옥가의 적통이오. 애초에 언신이 왜 천기각으로 갔었는진 생각해봤소?
옥가의 적통이 그리 쉽게 천기각으로 보내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번엔 언신의 의술이 아니면 제언경은 절대 살아날 수 없을 것이오. 북제 황실도, 옥가도 제언경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언신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소.”
사방화가 말했다.
“진강, 혹시 제가 모르는 걸 뭔가 알고 있는 거예요? 언신이…….”
진강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당신이 말했던 그 특수한 방법으로도 언신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소. 언신이 당신을 피하고 있거나, 누군가에게 억압당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전자든 후자든 좋을 건 없소.”
사방화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당신 뜻에 따를게요. 지금…… 출발해요.”
사묵함은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된 이상 빨리 떠날 수밖에 없겠구나. 떠날 채비를 도와주마.”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묵함은 곧장 막사를 빠져나갔다.
* * *
반 시진 후, 시화와 시묵이 아침 식사와 함께 진강의 약을 내왔다.
식사를 끝내고 약까지 다 챙겨 먹자 사묵함이 분부한 마차가 준비됐다.
그때 피곤에 지친 진연이 나와 사방화, 진강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 새언니, 어디 떠나는 건가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연이 진강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오라버니는 다쳤다면서 또 어딜 가려는 거예요?”
“쓸데없는 말 말고, 넌 우리랑 같이 가겠느냐, 아니면 여기 남겠느냐?”
진강의 물음에 진연은 더 깜짝 놀랐다.
“날 데려간다고요?”
진강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그냥 마차에 올라탔다.
그에 사방화가 웃으며 진연에게 설명했다.
“진연, 이제 우리 조부님을 뵈러 갈 거예요. 같이 갈래요?”
진연이 사묵함을 돌아보자, 그도 웃으며 말했다.
“연 군주도 매제랑 누이를 따라가시오. 여기 계속 있는 것도 위험하오.”
진연은 땅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전 그냥 여기 남아있겠습니다.”
사묵함이 말했다.
“연 군주가 군영에 오고 난 뒤로 또 큰일이 날까 싶어 한시도 마음 편히 있던 날이 없소. 그러니 차라리…….”
“후야께선 왜 매번 절 내쫓으려고만 하십니까? 제가 여기 있는 게 마음에 안 드세요? 안 가요, 절대 안 갑니다! 걱정해 주실 필요도 없고 죽어도 제 책임이니 제가 다 감당할 겁니다!”
진연은 몹시 붉어진 눈망울로 소리친 뒤 저 멀리로 뛰어갔다.
사묵함도 말문이 막혀 그냥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만 지었다.
사방화는 속이 상해 울며 뛰어가는 진연을 보고 사묵함을 멍하게 올려다봤다. 사묵함도 어지간히 골치가 아픈 눈치였다.
“오라버니, 진연이 설마…….”
“방화야,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사묵함은 즉각 사방화의 말을 잘랐다.
사방화는 곧 마차에 조용히 기다리는 진강을 돌아보다 몰래 한숨지었다. 돌아보면 진연이 표현한 신호는 많았다.
처음 사묵함이 막북에 가게 됐을 때, 진연은 함께 막북에 가겠다며 진강을 졸랐다. 그러다 임안성에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긴커녕 더 험한 막북으로 향했다.
진연은 고귀하고 존귀한 적통 황손으로 태어나, 여태 황궁에서 숙모인 태후의 손에 자랐다. 귀하기로 따지자면 감히 황실 공주도 따라올 수 없는 드높은 신분의 진연이 이 험한 막북에 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여긴 재미와 흥미, 단순한 놀이터로 말하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진연은 언제 어디서든 시종일관 사묵함의 곁만 따라다녔다.
‘아가씨가 정말로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사방화는 진강을 사랑해 그와 혼인했는데, 이젠 그 진강의 동생이 사방화의 오라버니를 좋아하고 있었다.
진연이 저렇게 대놓고 속상해한다는 건, 사묵함도 분명 일찍이 눈치를 채고 진연을 피하려 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사방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묵함을 올려다보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화야, 조부님을 뵙고 돌아올 것 아니더냐? 어차피 한 달 내론 북제도 움직임이 없을 거다. 여기도 안전하고 가기 싫다니 여기 머물게 두자꾸나.”
진연이 싫다니 억지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이대론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아무리 진연이 소중한 가족이라도, 사방화의 유일한 핏줄인 친형제만 하겠는가. 사방화는 무엇보다 오라버니부터 보호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