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화. 속박술 (1)
사묵함은 분부를 다 마친 후에야 진강과 사방화가 머무는 막사로 향했다.
막사 주위엔 이미 많은 이들이 그 앞을 막고 서 있었다. 진강과 사방화가 데려온 사람들, 진강의 좋은 소식을 전해온 장교까지 모두 다 함께였다.
곧 사묵함이 안으로 들어서자 시화와 시묵이 인사를 올렸다.
“후야.”
사묵함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있는 사방화와 진강을 보았다. 진강의 품에 안긴 사방화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진강의 안색은 그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다.
“방화야!”
사묵함이 다가가자, 사방화도 진강의 품을 벗어나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녀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피비린내에서 좀 멀어지니 그래도 한결 나아진 듯했다. 군영에 오자마자 사람들을 걱정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속이 뒤틀리는 고통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사묵함은 즉각 동생을 앉히며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사방화는 끝내 몸을 일으켜 사묵함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사묵함은 살짝 한숨을 쉬며 사방화를 꼭 안아줬다.
“조심해야지.”
늘 사묵함에게서 느껴지는 약 냄새에, 사방화는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오라버니, 보고 싶었어요.”
사묵함은 눈시울을 붉히며 동생을 내려다보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이까지 생긴 어머니가 어찌 이리 여린 것이냐.”
사방화는 사묵함의 품에서 나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러다 사묵함은 어두운 빛으로 침상 한쪽에 앉아있는 진강을 보고 안도했다.
“매제, 큰일은 아닌 것 같으니 안심하게.”
진강은 살짝 질투 섞인 어조로 말했다.
“과연 형님께서 와주시니 훨씬 낫군요. 내 품에선 한참을 안겨 있어도 그칠 줄을 모르더니.”
사묵함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진강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사방화의 등을 토닥였다.
“이젠 좀 괜찮으냐?”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나와 진강을 째려보았다.
“무슨 우리 친 오라버니한테도 질투하시는 거예요?”
진강은 미간을 문지르며 서둘러 그녀를 품에 안았다.
“좀 낫소?”
“괜찮아졌어요. 정상적인 거라고 했잖아요.”
“당신 얼굴을 보고도 정상적이라 할 수 있소? 먹을 수 있는 약도 없나?”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약에도 독이 있기 마련이니 아이한텐 좋지 않아요. 참을 수 있어요.”
진강은 마음이 아파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초지를 불렀으니 살펴봐 달라고 하면 될 것이오.”
그와 동시에 진강은 밖을 내다봤지만, 아무 인기척도 없는 걸로 보아 초지는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
그때, 한쪽에 있던 진연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새언니, 회임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어요?”
진연은 사내 옷을 입은 데다, 햇빛에 까맣게 타선 황궁에서 자란 고귀한 적통 황손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사방화는 그런 그녀를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무서울 건 없어요. 조금 고생할 뿐이죠.”
“이게 무서운 게 아니면 뭐예요? 조금 전 새언니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좀 그렇게 보일 순 있지만, 지금까진 괜찮았어요. 오늘 유독 그러네요.”
진연은 곧 진강을 타박했다.
“오라버니, 너무 서둘러 오느라 그런 거 아니에요? 새언니를 잘 챙겼어야죠.”
진강은 조용히 동생을 흘기며 말했다.
“군주의 기품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주제에 무슨.”
“그렇다고 내가 군주가 아닌 건 아니잖아요?”
진강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머니께선 겉으론 별말씀 없으시지만 나날이 널 걱정하고 계신다. 도성엔 언제 돌아갈 거냐?”
진연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두 분은 언제 돌아가실 건데요?”
“한참 먼저 나온 녀석이 우리와 맞먹으려 하는 것이냐?”
진연이 중얼거렸다.
“잔소리는 좀 그만하고 새언니나 잘 챙겨줘요. 같은 오라버니인데 어찌 이리 천차만별인지, 동생한테 이렇게 대하는 오라버니가 또 어디 있어요!”
“네가 방화만큼 말을 잘 들어야지.”
진연은 울컥해 사방화를 쳐다봤지만, 사방화도 싸우지 말라는 듯 살짝 고개만 저어 보였다. 이에 진연은 더 뾰로통해졌다.
“그래요! 내가 뭐 새언니보다 못한 건 인정해요. 하지만 나도 막북에 온 뒤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데요. 못 믿겠으면 물어보세요.”
사묵함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썽 피우지 않고 군 의원을 도와 다친 병사들을 치료하는데 힘썼습니다. 아주 공이 크지요.”
“봤죠? 두 분이 오신단 말만 없었다면 지금도 가서 돕고 있을 거예요.”
“그럼 아직 치료받아야 할 병사들이 많으니 어서 가서 도와줘라.”
진연은 더 있어봤자 좋은 말이 오갈 것 같지도 않아서 그냥 나가버렸다.
이내 사방화가 진강의 팔을 톡, 때렸다.
“동생한테 대하는 태도가 그게 뭐예요? 오라버니가 그러면 안 되죠.”
“습관이오.”
사방화는 어이가 없었다.
사묵함이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마침 초지가 들어왔다.
초지는 그간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고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눈 밑도 어두웠다. 사방화는 그제야 사묵함의 눈 밑에도 어둡게 깔린 그림자를 봤다.
“오라버니, 근래 잠도 제대로 못 잤죠?”
사묵함이 답을 하기도 전, 초지가 다가와 사방화를 슬쩍 보곤 말했다.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더니 멀쩡하시잖습니까.”
진강이 초지를 쏘아보았다.
“큰일이 아니면 뭐 하러 널 부르겠느냐? 어서 진맥이나 해 보거라.”
초지는 눈썹을 들썩이며 사방화에게 말했다.
“손 좀 주십시오.”
아무래도 초지는 사방화와 싸우던 그 옛날 응어리가 아직도 맺혀있는 건지 계속 퉁명한 태도였다.
사방화가 픽 웃으며 천천히 손을 내밀자, 대수롭지 않아 보였던 초지의 안색이 빠르게 굳어져 갔다.
진강도 초지의 표정 변화를 보곤 몹시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는 것이냐?”
초지는 천천히 손을 내리곤 사방화에게 물었다.
“근래 누굴 만나셨습니까?”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사방화는 초지의 굳은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초지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사방화를 바라만 봤다.
그러다 사방화가 지금껏 진강과만 있었다고 답하자, 다시 또 물었다.
“정말 없습니까?”
사방화는 이내 진강을 돌아봤다. 그 역시 안색이 매우 무겁게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해봐라.”
초지는 차갑게 웃으며 사방화에게 말했다.
“매술을 익힌 분이 다른 이의 매술에 당했단 것도 알아채지 못하십니까?”
사방화는 깜짝 놀랐고, 진강의 낯빛도 굳어졌다.
“초지, 내가 무슨 매술에 당했다는 건가요?”
“숙박술입니다.”
사방화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내 진강이 사방화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그게 무슨 주술이오?”
초지가 말했다.
“매족 왕족의 주술 중 하나로 이름 그대로 속박당하는 주술입니다.”
“알아듣게 얘기해봐라.”
“소왕비마마가 아닌 태아에게 주술이 걸렸습니다. 어서 주술을 풀지 않으면 아이는 배 속에서 더 자라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합니다. 태어나는 건 말할 것도 없지요.”
사방화와 진강의 안색이 급변했다.
초지는 살짝 비웃음을 흘렸다.
“총명하신 분들이라 믿었다만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네요. 주술에 걸린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알아채지 못하다니, 웃겨 죽겠네.”
진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초지의 멱살을 붙잡았다.
“무슨 주술인지 알면 어떻게 푸는지도 아는 거냐?”
“압니다.”
“당장 말하라.”
초지는 담담히 말했다.
“주술을 건 자의 심장 피를 가져와야만 하는데, 누가 주술을 걸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찌 피를 구하실 겁니까?”
진강은 초지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풀며 말했다.
“왕의안 이 썩을 놈.”
사방화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왕의안? 왕의안이 내게 속박술을 건 것이라고? 근데 매술을 익힌 내가 그걸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거지?’
그리고 그날, 그녀는 왕의안과 얼굴 한번 마주치지 않았는데 대체 어떻게 주술을 건 걸까? 소리 없이 주술을 써 지금껏 알아채지도 못하게 만들었다니, 그 매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하단 것인가?
이내 초지 또한 왕의안의 이름이 나온 것에 깜짝 놀랐다.
“지금 왕의안이라고 하셨습니까? 청운관의 왕의안 공자요?”
진강이 초지를 돌아보았다.
“의안을 아느냐?”
초지가 눈썹을 들썩였다.
“며칠 전에 왕의안 공자를 마주쳤었습니까?”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의안 말곤 아무도 마주친 적이 없다. 방화는 얼굴도 보지 못했고 마차와도 거리가 있었는데 대체 무슨 재주로 우리가 눈치채지도 못하게 주술을 썼단 말이냐?”
일순 생각에 잠긴 초지를 보고 진강이 물었다.
“초지 너도 매족 사람 아니더냐. 의안이 매족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어?”
초지가 고개를 저었다.
“청운관의 왕의안 공자란 것만 알 뿐, 그가 왜 매족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후로 초지는 한참을 침묵하다 고개를 들어 진강에게 말했다.
“왕의안 공자가 확실합니까? 조금 전에도 말했듯 이는 매족 왕실 혈맥이 쓴 주술입니다. 매족 왕실 혈맥은 사운란 공자라고 알고 있는데요.”
진강이 사방화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확실하게 말했다.
“운란 오라버니는 만나지도 못했고, 만난 사람은 왕의안 뿐이었어요. 거기다 난 그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요. 진강이 그에게서 나와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기에 그제야 매족 사람인 걸 알았어요. 하지만……. 오늘 말곤 몸이 이상하단 건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초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게 같은 기운이 느껴졌단 말씀입니까?”
“난 느끼지 못했고 진강이 말해준 거예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애랑 다투던 순간 방화랑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초지가 사방화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맥을 봐 드리지요.”
사방화가 손을 내밀자 초지는 재차 맥을 짚더니 확신했다.
“매족의 속박술이 확실합니다. 제가 무공은 약하다만 매술에 있어선 절대 오진을 내릴 리가 없습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그럼 어떤 사람이 나와 같은 기운을 가질 수 있는지도 알고 있나요?”
초지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 부분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족 왕실과 성녀 일맥 모두 후계자는 한 세대마다 한 명씩 존재하잖습니까. 사운란 공자가 매족 왕실 후계자고 소왕비마마께서 성녀 일맥의 후계자시고요. 우리 매족의 혈맥 대물림은 실로 몸에 흐르는 피가 아닌, 혼을 대물림하는 것으로 혈맥 또한 사람을 가려 선택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진강이 말했다.
“좀 쉽게 말해봐라.”
초지는 진강과 사묵함을 번갈아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사 후야를 예로 들자면 소왕비마마와 친남매시지만 매족 혈맥의 영혼뿐 아니라 매족의 뿌리도 이어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지만 소왕비마마께선 매족의 혼을 물려받아 후계자로 태어나셨습니다.”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족의 후계자는 한 세대마다 한 사람만 존재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왜 왕의안 공자에게 같은 기운이 느껴지고 매족 왕실의 비술이 있는 건지는……. 매족 천만년의 대물림 역사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왕비마마께 들키지도 않고 속박술을 쓴 걸 보면 엄청난 힘의 매술을 지녔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겠네요.”
사방화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왕의안이 매족 사람일 수 있지? 내게 속박술을 쓴 이유는 또 뭐고?”
진강이 걱정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걸리면 몸에 해로운가?”
초지는 애매모호 하게 답했다.
“해롭긴 하지요. 아까 말했듯 태아는 자라지 못하지만, 죽지도 않습니다.”
“난 방화를 말하는 것이다.”
“소왕비마마께는 해로울 게 없을뿐더러 좋은 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슨 뜻이냐?”
“소왕비마마께선 몸이 점점 쇠약해져 거의 고갈 직전의 상태에 계십니다. 태아가 자라며 매술도 점점 사라지게 될 거고요. 왕의안 공자가 매술을 썼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셨다는 걸로 봐선 제 추측이 맞는 듯합니다. 원래 몸이 좋지 않으셨던 것도 있고 왕의안 공자가 매술이 강력하단 것 외에도 태아가 이미 반 이상의 심혈을 빨아들였단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