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6화 (916/978)

916화. 청운의 의안

존재마저 잊힐 정도로 너무도 조용했던 그 소년은 사방화의 마음에 깊은 각인을 새겼다. 사방화가 전생의 기억을 다 잊어버렸을 때도, 왕의안은 계속해서 사방화의 마음속 깊은 바다 어느 곳에 그대로 봉인돼있었다.

사방화가 전생의 기억을 되찾게 되며 자연스레 그의 이름도 떠올랐지만, 그 순간 그녀는 이번 생에서만은 서로를 모르는 게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충용후부는 몰락하지 않았고, 왕의안도 황성에 없으니 서로를 모르는 지금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말이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방화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인명의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그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갚지 못할 엄청난 빚이었다.

하지만 사방화는 왕의안을 다시 보게 된 이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전생의 기억이 미친 듯이 떠올랐다.

전생의 사방화는 세상의 규범에 틀어박힌 고귀한 귀족 아가씨여서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사씨 가족이나 황궁 사람들이 전부였다.

종종 덕자 태후가 사방화를 황궁에 불러 한담을 나눌 때면 한쪽에 늘 조용히 앉아있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어찌나 조용한지 모두가 그를 잊고, 덕자 태후도 사방화와 실컷 시간을 보낸 뒤에야 그가 있단 걸 깨달을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덕자 태후는 웃음을 지으며 왕의안에게 사방화를 배웅해주라고 토닥였었다. 그러나 딱히 둘 사이에 이야깃거리나 있었겠는가? 황궁 밖으로 향하는 길 내내 둘은 아주 조용히 소리도 없이 걷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사방화는 그와 인사하고 충용후부 마차에 올라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그녀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게까지 조용한 사람과 있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그 조용한 소년은 사씨가 몰락하던 그 순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방화를 살렸다.

심수간에서 지내던 나날 동안 사방화는 아무리 고민해도 그 연유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방화의 눈앞에 죽음이 다가온 순간, 그녀는 모든 걸 깨닫게 됐다.

사방화는 진강을 너무도 사랑했다. 자유롭고, 거침없고, 때론 멋대로 세상을 누비며 오만하고 도도한 그 모습까지도 그의 모든 걸 사랑했다. 그를 사무치게 사랑하면서부터 사랑 앞에 목숨 따윈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었다.

전생에 기꺼이 죽음을 택한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진강을 향한 마음이 이리도 확고한데, 사랑하는 진강을 두고 어찌 사운란과 연을 맺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렇게 죽어가며 그제야 왕의안의 마음을 이해한 것이었다. 왕의안의 마음도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현생엔 전생과 변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모든 게 달라진 것도 존재했다. 그것이 사방화 때문인지, 진강 때문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왕의안은 아마 전생과 같은 모습이기에 모두가 그의 존재를 잊은 듯했다. 사방화가 무명산에서 돌아오고부터 지금까지도 왕의안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기에 지금도 그는 매우 조용한 사람일 거라 생각됐다.

애초에 왕 노장군이 급사해 청운관이 한바탕 난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이곳으로 와 진강에게서 왕의안의 이름을 듣지 않았다면 사방화는 한평생 왕의안을 잊어버린 채 살 수도 있었다.

사방화도 그편이 더 좋을 거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이곳에 왕의안이 나타났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그때, 사방화는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던 진강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진강은 즉각 질투하듯 말했다.

“그게 지금 무슨 표정이오?”

“그냥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 잠시 멍해졌던 거예요. 긴장할 필요 없어요. 이번 생에서 우린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니까 차라리 잘 됐어요. 당신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어서 가 봐요. 휘장만 내리면 절 못 볼 거예요.”

담담히 웃는 사방화를 보니, 진강도 그녀가 정말 왕의안을 만나지 않겠단 결심을 한 것 같아 조용히 뺨을 쓰다듬었다.

“자면서도 당신이 저 애 이름을 외치는데 내가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소? 당신이 굳이 일을 벌이고 싶어 하지 않으니 혼자 다녀오겠소. 내 생각도 그게 낫겠어.”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은 마차에서 내리며 휘장을 쳐두었다.

이내 사방화는 마음 한편을 짓누르던 묵은 체증이 천천히 가라앉는 듯했다. 온몸도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제야 그녀는 자신이 전생의 기억과 꿈속에 사는 게 아닌, 이번 생을 살고 있음을 절감했다. 지금 이 생엔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아이, 바로 사랑하는 그녀의 가족이 있었다.

세상엔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은 이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야 할 그의 인생을 더는 자신에게 낭비해선 안 됐다.

* * *

진강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언덕을 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렇게 잠시 머뭇거리나 싶던 진강은 소등자, 시화, 시묵에게 사방화를 잘 지켜달라고 분부한 뒤 언덕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왕의안이 갑자기 산비탈에서 내려왔다.

진강은 산비탈 기슭에서 그를 마주치자마자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됐다.

“감옥에 갇혀서 황조모님께서 길러주신 지난 3년을 다 헛되게 만든 줄 알았더니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왕의안도 진강만큼이나 차가운 얼굴로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강 소왕야께서 소왕비마마를 모시고 청운관으로 오셨단 말에 보고 싶어 와봤습니다.”

진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겨우 그 이유라고? 내가 그 정도 대우씩이나 받아 감격이라 해야 하나?”

“자화자찬은 그만두시고 어서 그 유명한 충용후부 아가씨 좀 보여주십시오. 소왕비마마가 대체 누구시기에 강 소왕야께서 이리 한시도 떨어지지 못하시는 겁니까? 참으로 궁금하군요.”

그 길로 왕의안이 곧장 마차로 걸음을 옮기자, 진강이 그를 막아섰다.

“의안, 내 소왕비를 보기 전에 내게 간청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보면 안 됩니까?”

“응, 안 돼.”

진강의 단호한 거절에, 왕의안은 그냥 피식 웃곤 다시 걸어갔다.

진강은 다시 그를 막아섰고, 막아도 끝까지 가겠다는 자와 그렇게는 안 된다며 막는 자의 싸움은 지속됐다.

그리고 이 모습은 왕운백과 그 일행들의 눈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왕운백은 말고삐를 쥐고, 떼어놓기 힘들 정도로 맞서는 두 사람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좌우를 살폈고, 이내 그에게 누군가 다가와 살며시 속삭였다.

“숙조부님, 의안과 소왕야의 사이가 참으로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싸우고 있는 듯한데요.”

“나도 눈이 있는데 그걸 모르겠느냐?”

왕운백은 한껏 긴장해 쫓아왔다가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까요? 싸움을 말리는 게 낫겠습니까, 아니면 의안을 다시 감옥으로 집어넣는 게 좋겠습니까?”

왕운백은 잠시 궁리하더니 왕의안을 향해 소리쳤다.

“의안! 지금 뭐 하는 게야? 어찌 소왕야를 쫓아와 시비를 거는 게냐!”

하지만 왕의안이 못 들은 척 무시하자, 진강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의안, 대체 왜 이리 집요하게 내 소왕비를 보려고 하는 거냐? 뭐 흑심이라도 품고 있는 거야?”

왕의안이 즉각 진강을 째려보았다.

“그냥 한번 뵙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이유를 대라!”

왕의안이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없고 그냥 보고 싶을 뿐입니다.”

진강은 왕의안을 진지하게 바라보다 동작을 멈추고 굳은 얼굴로 말했다.

“딱 한 번만 보게 해줄 테니 따라와. 약속을 어기면 가만두지 않을 거다.”

왕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마차 쪽으로 향했지만, 왕운백의 외침엔 누구 하나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강이 마차 앞에서 매우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방화, 왕씨 가문 셋째 공자가 당신을 좀 보고 싶다고 하오.”

사방화는 내내 마차에 앉아 눈을 감고 진강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에도 진강이 알아서 잘하겠거니 잠자코 있었지만, 갑작스레 왕의안을 데려와 자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다.

사방화는 왕의안이 싫어서 그와 만남을 거부하는 건 아니었기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낭군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진강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다 왕의안에게 말했다.

“성현서(*聖賢書: 성현의 가르침을 쓴 책)와 예의는 모두 개나 줘버린 거냐? 너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서방 앞에서 아내를 보겠다고 당당히 요구하는 자식이 대체 어디 있느냐?”

마차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왕의안이 진강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네? 지금 성인의 서훈을 말씀하신 겁니까? 그건 강 소왕야께서 제일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 아니셨는지요.”

진강도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

“이 아가씨를 두고 강 소왕야께서 엄청난 고생을 하시고, 황제폐하와도 다투셨다기에 당연히 예사롭지 않은 분일 것 같아 뵙고 싶다고 한 겁니다. 소왕비마마께선 부끄러움이 많으신가 보군요. 예의도 잘 갖추셨고요. 불편하다고 하시니 됐습니다.”

왕의안은 갑자기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홱 돌아섰다.

그 순간, 휘장을 걷은 사방화는 시원하게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뒷모습에서도 고상하고, 우아하고, 청량하고 푸른 기운이 저 하늘 끝에 다다를 듯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참 예사롭지 않은 소년이었다.

곧 진강이 사방화가 들어올린 휘장을 휙 내려버렸고 그 소리에 왕의안은 갑자기 멈칫하고 섰다. 그는 잠시 휘장이 펄럭이는 걸 보다 담담히 말했다.

“전 애초부터 청운관 뒤를 이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숙부님께 권력을 쥐게 해드리고 기꺼이 감옥에 들어간 거였습니다. 그러니 강 소왕야께서도, 폐하께서도 더는 제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진씨 황가든, 왕씨 가문이든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요.”

왕의안은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청운관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진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왕운백이 왕의안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의안! 어디로 가는 것이냐?”

왕의안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지금껏 전 아버지께 효도하는 심정으로 청운관에 남아있었던 겁니다. 아버지께선 절 위해 몸을 날리셨고 저도 감옥에서 수일간 자리를 지켰으니 아버지와 저 사이엔 더는 빚진 게 없는 셈이지요.

숙부님께선 줄곧 제가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셨지만, 제가 한낱 연기와 같은 권세에 반푼어치 관심도 없단 걸 모르시더군요. 앞으로 청운관에 왕의안은 없는 겁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그리고 왕의안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덩굴을 잡고, 제비처럼 가볍게 언덕을 올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왕운백은 한참을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의안……, 이 대체 무슨 말을 한 겁니까? 이렇게 가버린다고요?”

왕운백 곁에 있던 자가 입을 열었지만, 왕운백은 말없이 진강을 바라봤다.

진강은 어두운 안색으로 왕의안이 떠난 방향을 한참 바라보다, 마차에 올라 휘장을 내리며 분부했다.

“가자.”

소등자의 손짓에 다시 대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의안, 진강과 사방화……. 왕운백은 점점 멀어져가는 진강과 사방화의 대열을 보며 어딘가 이상하다곤 느꼈지만, 차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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