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화. 서로 알 필요가 없다
진강은 손발이 풀리자마자 사방화를 품에 안고 아주 진하게 입을 맞췄다. 조금 전을 복수하기라도 하듯 사방화의 숨이 가빠질 때까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사방화가 항복하고 나서야 진강은 천천히 곁에 누웠다.
사방화는 금세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 그를 노려보았다.
그에 진강은 살짝 시선을 피하며 조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엔 비긴 거야.”
사방화는 화가 난 듯 고개를 홱 돌려버렸고, 진강은 그녀를 안고 토닥였다.
“화났어?”
사방화가 계속 반응이 없자 진강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것이오?”
사방화가 콧방귀를 뀌자 진강은 또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사방화는 결국 그를 밀치며 말했다.
“당신 힘들까 봐 그렇게까지 해줬는데 은혜를 어찌 원수로 갚나요?”
진강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언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단 말이오? 대체 어디서 이런 걸 배워왔는지나 바른대로 말하지?”
사방화는 진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금 전까지 황홀감에 젖어있던 그의 표정이 떠올라 바로 화가 풀리며 웃음이 났다.
“춘화에서 보고 배웠어요.”
진강은 바로 인상을 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뭐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진강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정녕 춘화를 안 보고 자랐겠소? 그런 게 어딨소?”
사방화는 진강이 정말 알고 싶어 하는 듯해서 조금 더 다가가 속삭였다.
“기방의 춘화와 시정의 금서에서 보고 배웠어요.”
진강이 다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어째서 이런 걸 배운 것이오?”
“제가 취향루 주인인 걸 잊으셨어요? 또 저는 박학다식하고 새로운 걸 배우는 걸 좋아한다고요. 호기심에 봤다가……, 지금껏 잊지 못하게 된 거죠.”
진강이 웃으며 사방화의 볼을 콕, 찔렀다.
“그래, 그 잊지 못할 기술을 내게 써줘서 아주 감격스럽소!”
사방화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럼 당신 말고 누구한테 써요?”
“어디 그러기만 해봐?”
사방화가 웃으며 진강을 끌어안았다.
“좀 편해졌어요?”
진강은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사방화는 다시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처음 그걸 봤을 땐 기녀가 아니고서야 부끄러워서 누가 이런 걸 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제가 돼버렸네요.”
진강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귀여워.”
사방화는 실소하며 그를 밀쳤다.
“언제까지 자꾸 아기 다루듯 할 거예요? 근데 진강, 어제 저한테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한 건 뭐였어요?”
진강은 일어나 옷을 걸치며 말했다.
“생각을 바꿨어.”
“네?”
진강은 옷을 갖춰 입고 사방화에게도 옷을 걸쳐주며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방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말 하다 마는 게 제일 싫어요.”
진강이 문득 사방화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의안을 기억하시오?”
“…….”
일순간 멍해져버린 사방화를 보고 진강도 움직임을 멈췄다.
잠시 후, 사방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덕자 태후마마께서 기르신……, 충용후부가 몰락했을 때 저 대신 죽었어요. 만약 왕의안이 저로 분장하지 않았더라면 운란 오라버니도 저를 무사히 구할 수 없었겠죠. 이번 생엔 한 번도 본 적이 없네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 의안은 죽지 않았소.”
“안 죽었다고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신은 왕의안이 우리 황조모님 밑에서 자란 왕가의 자식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히 누구 자식인지는 모르지? 왕의안은 왕 노장군의 셋째 아들이오. 왕 장군은 남진의 2번째 천험한 관문인 청운관을 지키셨지. 전생에 의안이 당신을 대신했다 하더라도 황숙께서 어찌 왕의안을 죽일 수 있었겠어. 그냥 춥고 척박한 곳으로 보내 평생 거기 살도록 한 게 전부야.”
사방화가 입술을 꼭 깨물자, 진강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주었다.
“이번 생에 의안은 황궁에 3년을 지내다 황조모님이 돌아가신 뒤 내가 청운관으로 돌려보냈소. 난 당신이 이번 생엔 그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소.”
사방화는 진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전생에서 누구에게 미안하냐고 묻는다면 첫째는 운란 오라버니고 둘째가 왕의안이에요. 저도 이번 생엔 만나지 않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도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 느꼈지만, 전생과는 달라진 것들이 있으니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굳이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번 생에 그가 절 알아보지 못하는 게 어쩌면 더 좋은 일일지도 몰라요.”
진강은 사방화를 꼭 껴안아 주며 말했다.
“당신 기억이 돌아왔을 때 꿈속에서 의안을 부르는 걸 보면서 의안과 운란 형님이 당신 마음속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알게 됐소. 그래서 혼신의 힘을 다해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지. 그땐……, 당신이 깨어나 날 버리고 운란 형님이나 의안을 찾으러 가버릴까 두려웠소.”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당신이 대체 절 어떻게 홀렸는진 모르겠지만 전 당신 말고는 누구든 내려놓을 수 있어요.”
진강은 순식간에 끓어오르는 감정에 그녀를 안은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진강, 아기 조심하세요.”
진강은 얼른 사방화를 놓았다가 그녀의 배를 노려보았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나와 맞서다니, 분명 말 안 듣는 놈일 것이오.”
사방화가 풋, 웃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아가씨가 아닌 천방지축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진강은 이내 사방화를 침상에서 부축해 내려주고 옷도 입혀 주었다.
“의안 그놈은 얼마나 멍청한지, 왕 노장군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 운백 구공에게 붙들려 청운관 감옥에 갇혔다고 하오. 차라리 잘 됐어. 청운관을 떠나면서 진옥에게 직접 성지를 내리라고 하면 될 것이오.”
“왜 가둬 둔 거래요?”
“청운관을 쥔 왕가는 자손은 넘쳐도 가장 뛰어난 이는 단연코 왕의안이오. 의안을 가두지 않고 청운관이 어찌 이리도 난장판일 수 있겠소. 운백 구공이 모든 걸 휘두르고 있단 말이지.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권력 다툼과 이익에 눈이 멀어 있다니 참 분수를 모르는군.”
“구해주지 않으실 건가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구하려고. 생각해보니 청운관 일엔 간섭하지 않는 게 좋겠소. 내부에 무슨 일이 있는지 조사하는 것도 귀찮고, 황조모님 가문이긴 하나 굳이 황제가 있는데 내가 나설 이유가 있겠소? 그냥 진옥에게 맡기려고 하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떠나자는 말씀인 거지요?”
진강이 사방화를 쳐다보았다.
“왜,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라도 있는 것이오?”
“운백 구공이 그를 죽이진 않겠죠? 생명의 위협은 없을까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심술궂은 분이긴 해도 그 정도로 악랄한 사람은 못돼. 그냥 감옥에 가두기만 한 걸 보면 죽이지 못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오. 의안은 그래도 황조모님께 3년을 가르침 받았소. 그렇게 청운관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몇 년이 됐는데 정말 멍청한 놈이라면 죽어도 다 자기 업보인 거지 뭐.”
사방화가 픽, 웃으며 말했다.
“네, 생명에 지장이 없다면 됐어요. 북제 대군이 쳐들어왔으니 어서 가요. 시간이 촉박하네요. 전생은 지금 돌이켜보면 거울 속 꽃과 물속에 비친 달처럼 차라리 몰랐던 것이 더 좋았을 사람들도 있어요. 알아도 마음만 아파질 바엔 그냥 다 모르는 게 약이겠죠.”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왕운백의 명을 받고 온 이가 아침 식사 자리로 모시러 왔다.
두 사람은 준비를 마치고 이동했고, 식사 자리엔 어제와 달리 왕운백과 사이가 가까워 보이는 몇몇 사람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왕운백은 잠은 잘 잤냐며 안부를 묻고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 * *
식사 후, 진강과 사방화는 다시 길에 올랐다.
왕운백은 두 사람이 막북으로 향한다기에 더는 시간을 뺏지 않고 사방화에게 좋은 약재를 챙겨주며 직접 배웅했다.
그렇게 일행이 대거로 청운관을 떠나자, 누군가 왕운백에게 다가와 한껏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의안은 소왕야와 사이가 좋지 않았나 봅니다. 의안이 보이지 않는데도 소왕야께선 전혀 묻지 않으셨습니다.”
왕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고말고. 사이가 좋았다면 애초에 왜 황성에서 쫓아냈겠느냐? 선태황태후마마께서 돌아가신 후 곧장 여기로 돌아와 지금껏 연락 한 번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소왕야뿐만 아니라 폐하와도 사이가 좋지 않은 게지.”
“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소왕야는 한눈에 봐도 눈이 높으시어 아무나 곁에 둘 분이 아닌 듯합니다. 숙조부님, 얼마나 더 가둬둘 생각이십니까?”
“청운관 내에 그 아이 관련된 모든 세력을 숙청시킨 뒤에야 풀어줘야지. 그 전엔 죽여도 소용없을뿐더러 돌아가신 형님께만 미안할 뿐이다. 형님께서 저놈을 얼마나 아끼셨는데, 말만 잘 들으면 먹고살 순 있게 해줘야지. 어차피 왕씨 가문엔 자식 한둘 먹여 살릴 식량 정도는 충분하지 않으냐.”
“역시 숙조부님은 도량이 넓으십니다.”
왕운백은 곧 성으로 돌아가자며 손짓했다.
그런데 막 성 문을 넘던 그때, 누군가 황급히 달려와 외쳤다.
“숙조부님! 의안이 감옥을 빠져나가 소왕야와 소왕비마마를 따라나선 것 같습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의안이 감옥을 탈출했다고? 왕운백은 깜짝 놀라 그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어찌 탈출한 것이냐?”
“감옥에서 전해온 소식을 들은 게 전부라 자세한 건 모르겠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후문에서 가장 가까운 길을 통해 소왕야와 소왕비마마를 뒤쫓아 갔다고만 들었습니다.”
“대체 뭘 하려는 것이야!”
왕운백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 청해 정의를 되찾기라도 하려는 걸까요?”
앞서 왕운백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가 말했다.
그러자 왕운백이 화를 버럭 냈다.
“무슨 정의를 찾는단 말이냐! 그놈만 아니었어도 형님이 그리되시진 않았을 거다. 중직을 겸하시던 형님이 그놈이 끌고 온 나쁜 놈들 때문에 대신 돌아가셨는데 무슨 낯짝으로! 그놈은 반성하라고 감옥에 가둔 것이다!”
그는 다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의안이 정말 마음먹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 엎어버린다면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서 그의 편을 들어주실 게 뻔합니다. 어떡합니까, 숙조부님?”
왕운백이 콧방귀를 뀌었다.
“막북에 가기 급급한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서 잘도 그놈 편에 서주겠다. 어서 따라가자꾸나.”
왕운백은 말을 타고 사람들과 함께 사방화, 진강이 떠난 방향을 뒤쫓았다.
* * *
사방화는 아침부터 힘을 뺐던 터라 마차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품에서 곤히 잠들었다. 진강 역시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사방화를 토닥이면서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얼마 정도 지났을까, 좌측 편 높은 언덕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소왕야!”
언덕에서 들리는 그 우렁찬 목소리는 다소 좀 다급해보였다.
그 소리에 사방화는 눈을 번쩍 떴다. 전생의 기억으로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왕의안이었다.
전생에 왕의안은 어릴 때부터 황궁에 들어와 덕자 태후의 품 아래 자랐었다. 사방화는 그를 아주 조용한 사람으로 기억했다. 사람들이 많든, 단 두 사람만 있든 따로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 존재마저 잊혀질 정도로 매우 조용한 공자였다.
덕자 태후의 가문, 왕씨 집안에선 유일하게 황궁에서 길러진 왕의안은 진강과 진옥처럼 매우 드높은 신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덕자 태후의 사랑을 받으며 함께 자랐었다.
그러나 왕의안은 참 신기하게도 다들 그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묘한 재주를 가졌었다.
진강과 진옥이 내내 아웅다웅할 때에도 왕의안은 일종에 두 사람 사이에 낀 셈이라 할 수 있었지만, 그는 마치 둘과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처럼 지내며 그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가 황성에 있을 때도 황궁 사람들이 따로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면 조정과 황성 안팎을 더불어 심지어는 그의 집안 왕씨 가문조차 그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로 존재감을 지웠다.
하지만 사람은 이토록 조용할지언정 과업에 있어선 소홀함이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재능도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게 바로 왕의안이었다.
그 조용한 공자 왕의안은 전생에 황실, 왕가까지 뒤흔들 엄청난 일을 해냈었다. 사운란을 도와 사방화의 죽음을 가장하고, 황실과 은위의 엄청난 계략 속에 끝내 사방화를 구해 바꿔치기에 성공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선황제는 진노해 그를 참수시키라 명령했고, 여기까지가 사방화가 기억하는 전생의 이야기 전부였다.
만약 오늘 진강이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사방화는 아직도 전생에 왕의안이 죽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