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4화 (914/978)

914화. 청운관에 들어서다

두 사람이 깨어나자 이튿날 정오가 되어 있었다. 

진강이 휘장을 걷으며 물었다. 

“성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

소등자가 말했다. 

“예, 소왕야께 아룁니다. 50리만 더 가면 청운관입니다.”

진강은 함께 가는 대열과 하늘을 번갈아 보고 말했다. 

“밤새 많이도 지나왔구나. 오는 길에 잠시도 쉬지 않은 것이냐?”

소등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침에 마을을 지나던 중 두 분께서 아직 주무시고 계시기에 간단히 요깃거리를 사 간단히 때우고 계속해서 길에 올랐습니다. 두 분께 드릴 식사는 도시락에다 두었습니다.”

“다들 힘들지 않으냐?”

진강이 물었다.

“소인은 괜찮습니다.”

소등자가 대답하며 대열로 시선을 돌리자 그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강은 모두를 배려해 명을 내렸다.

“청운관에서 좀 쉬었다 가자꾸나.”

소등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진강이 사방화에게 물었다. 

“좀 먹겠소?”

“먹기 싫어요.”

진강은 휘장을 내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도 좀 먹어야지. 50리면 적어도 한 시진은 넘게 더 가야 하오. 당신은 괜찮더라도 우리 아기는 뭐라도 좀 먹어야 하지 않겠소?”

사방화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 * *

미시(*未時: 오후 1~3시) 삼각(*三刻 : 45분), 청운관에 다다랐다.

수일 전, 청운관 총병이었던 왕 노장군이 병으로 급사한 뒤 이곳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에 진옥과 진강은 한뜻으로 청운관 왕씨 가문에서 이를 알아서 처리하도록 그들의 공으로 맡겨두었다.

그러나 왕 장군의 안장을 마치고도 청운관은 여전히 태평하지 못했다. 왕 장군은 왕씨 직계 맏아들로서 그 밑에 재주 넘치는 자손들도 많이 뒀지만, 그의 군기와 기세를 이어받을 만한 자는 아직 보이질 않았다.

진옥도 왕 장군의 장례를 후하게 지내주라는 말만 했을 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명확히 뜻을 내비치지 않았다. 거기다 남진과 북제는 조만간 전쟁을 치를 텐데 청운관은 남진에서 2번째로 큰, 천험한 장벽으로 막북 변경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었다.

하여 후계자를 정하는 것도 신중해야 했고, 이런 이유로 청운관 내의 정무는 지금껏 미뤄질 대로 미뤄져 다소 태만한 상태였다.

곧 소등자가 통관 영패를 건네자 청운관 성 문지기는 서둘러 총병부로 향했다. 머지않아 성문이 열리고, 나이가 많고 적은 사람 20명 정도가 우르르 나와 진강과 사방화를 맞았다.

그중 50세쯤 된 사내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께서 이 누추한 청운관에 들러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진강은 사방화를 부축해 마차에서 내린 후 담담히 웃어 보였다.

“운백 구공(*舅公: 아버지의 외숙부), 참 건강해보이십니다.”

사내의 이름은 왕운백으로, 왕 노장군의 친동생이었다.

왕운백은 곧 정중히 공수를 올리며 말했다.

“선태황태후마마의 은혜로 소왕야께서 이 늙은이를 구공이라 칭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왕비마마를 모시고 여기까지 오셨는데 어찌 나와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오가 넘었는데 식사는 하셨는지요?”

“아직 식사 전이라 일부러 청운관에서 얻어먹으려 들렀지요.”

“어서 드시지요. 빨리 식사를 내오너라!”

왕운백은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하며 하인에게 분부를 내렸다. 그리곤 왕가의 자제들도 하나씩 소개해줬다.

사방화는 왕운백의 소개를 들으며 그들을 하나하나 살폈고, 확실히 왕가의 자제들은 다들 뛰어나단 생각을 했다. 진강과 진옥이 청운관에 즉시 정책을 내놓지 않은 것도 다 이유가 있어 보였다.

* * *

어느덧 총병부에 도착하니, 벌써 술상이 한가득 마련되어 있었다. 

진강과 사방화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함께했다. 그러다 식사 후, 사방화가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자 진강은 양해를 구하고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화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사방화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진강에게 물었다.

“진강, 근데 청운관이 좀 이상하단 느낌 안 드세요?”

진강은 사방화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며 답했다.

“청운관이 이상하다는 것이오, 아니면 운백 구공이 이상하다는 것이오?”

사방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전부 다요. 왕 장군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상 표식을 하고 있는 자제도 별로 없고, 물론 다들 상복을 입고 있긴 해도 크게 슬퍼하는 기색도 없어요. 운백 구공이란 분은 왕 장군님 친동생이시죠? 친형님이 돌아가셨는데 우리를 마중 나왔을 때도 그렇고 너무 멀쩡해 보여요.”

진강은 사방화의 물음엔 아무 답 없이 그녀를 침상으로 데려갔다.

“아무리 마차에서 잤더라도 침상에서 자는 것과는 다르니 오늘 밤은 편히 잘 쉬어요. 잘 쉬어주지 않으면 몸이 감당을 못할테니.”

“왜 제 말엔 대답 안 해주세요? 당신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거죠?”

진강이 그녀를 토닥이며 말했다. 

“당신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니 어서 주무시오.”

“어떻게 그리 쉽게 잠이 들겠어요?”

사방화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진강은 웃음을 터뜨리며 침상에 올라 그녀를 껴안고 토닥여주었다.

“당신 어제 실컷 이야기하다 눈을 붙이자마자 잠든 건 기억 안 나시오? 내일 내가 청운관 일을 처리할 테니 어서 주무시오. 막북에 다다르기 전에 힘을 좀 빼야 할 것 같으니 잘 쉬어줘야해.”

사방화가 말했다. 

“청운관 일을 손쓰시겠다고요? 우선 두고 본다고 하셨잖아요.”

“두고 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충분한 시간을 줬음에도 아직 이 꼴로 있으니 어찌 가만히 있겠소?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상황에 중요한 요지인 이 청운관을 더 이상 저들이 난리 치게 둘 순 없소.”

“어떻게 하시려고요?”

진강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왕비마마, 신경 쓰지 말라면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주무십시오. 우리 아기가 피곤하답니다.”

사방화가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자, 진강이 다정히 그녀를 도닥여줬다. 사방화는 금세 또 곤히 잠이 들었다.

진강은 사방화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한 후, 조심히 창가로 다가갔다.

“소등자.”

“예, 소왕야. 말씀하십시오.”

“왕 노장군의 셋째 공자가 보이질 않으니 어딜 간 건지 알아보거라.”

잠시 후, 소등자가 돌아와 진강에게 고했다.

“소왕야께 아룁니다. 셋째 공자님은 지금 청운관 감옥에 갇혀 계신답니다.”

진강이 눈썹을 들썩였다.

“어째서?”

“눈에 띄었다간 청운관 내의 모든 이들을 놀라게 할까 싶어 더 이상 알아보진 못했습니다.”

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며칠이나 됐다더냐?”

“왕 노장군님께서 돌아가신 바로 다음 날 갇히셨다고 합니다.”

“누가 가뒀는지는 아느냐?”

“왕운백 어르신이라 들었습니다.”

“운백 구공?”

진강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소왕야, 아니면 소인이 더 알아보고 올까요?”

소등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속삭였다. 

“아니다, 내일 아침 다시 떠나야 하니 너도 어서 가서 쉬거라.”

소등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걸음을 뗐다가 다시 돌아와 나지막이 말했다.

“그 셋째 공자님이 선태황태후마마께서 3년간 기르신 의안 공자님이시죠?”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소등자는 뭔가 말을 잇고 싶었지만, 진강이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이기에 어서 자리를 떴다. 

이내 진강은 계속 창가에 서서 청운관의 고요한 짙은 밤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진강이 다시 침상에 눕자 사방화는 무의식중에도 진강의 품을 찾아 파고들었다. 진강은 따스한 미소로 사방화를 보다 눈을 감았다.

* * *

이튿날 아침, 사방화는 잠에서 깨 제 곁에 곤히 잠든 진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위론, 창가에 스며든 희미한 새벽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그림처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사방화는 옅은 새벽빛 아래, 또 한 번 너무도 어여쁜 진강의 미모에 반해 한동안 미동도 없이 그의 얼굴만 감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진강은 잠에서 깨어났다가 넋을 잃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방화를 발견하고 조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정말 영원히 이 얼굴을 지킬 약을 구하러 가고 싶은 것이오?”

순간 사방화의 눈동자가 약간 떨리는 듯했다. 그러다 그녀는 진강의 목을 껴안고 조용히 속삭였다.

“진강,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해보실래요?”

진강은 사방화의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아 눈만 깜빡였다.

“응?”

사방화는 이내 진강과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어제 마차에서 했던 말 있잖아요.”

진강은 일순 숨쉬는 것도 잊고 사방화의 허리를 꼭 껴안고 말했다. 

“무슨 방법인지 먼저 말로 해주시오.”

사방화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눈 감아요.”

하지만 진강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눈 안 감으면 안 해줄 거예요.”

진강은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그 후로도 사방화는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눈 감는 걸로는 부족할 것 같아요. 당신이 말을 안 들을 수도 있으니까 손발을 묶어야겠어요.”

진강이 황당한 듯 눈을 뜨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뭘 하려는 것이오?”

“말 들으실래요, 묶으실래요.”

진강은 다시 실소하며 눈을 감고 두 손을 내밀었다.

“알겠어. 묶으시오.”

사방화는 허리띠를 뽑으려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목을 살짝 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푸른 실오라기가 나와 진강의 손목과 발목을 묶었다.

진강은 깜짝 놀라 다시 눈을 번쩍 떴다.

“방화! 어찌 내게 매술을 쓸 수 있소? 당신……!”

격분한 진강을 보고, 사방화는 얼른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진강은 또 말없이 사방화와 입을 맞추며 억울한 눈망울을 일렁였다.

“어서 눈 감아요.”

사방화가 달래도 진강이 눈을 감지 않자, 사방화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못 견딜까 봐 그런 거예요. 보통 허리띠로는 당신 힘을 이길 수도 없을 것 같아 이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이 정도 매술로는 끄떡도 없으니 걱정 마요.”

그리고 사방화는 진강의 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진강이 눈을 크게 뜨자 사방화는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잠시 후, 그녀의 예상대로 진강은 온몸이 불탄 듯 달아올랐다. 손발이 묶여 아무 힘도 쓸 수 없었지만, 어찌나 뜨겁게 달아오른 건지 사방화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서 떨어지는 순간, 거친 숨을 토해내듯 몰아쉬었다.

“방화! 당신……! 이런 거 대체 어디서 배웠소…….”

뒷말은 자연스레 또다시 사방화의 입술 사이로 먹혀버렸다.

은은하고 매혹적인 사랑의 향기는 온 방을 황홀한 봄빛으로 물들였다. 

반 시진 후, 진강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그는 꼭 향긋한 술에 취한 듯 빨간 꽃잎처럼 변해있었다.

사방화 역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지친 듯 그의 곁에 누웠다.

“만족해요?”

진강은 눈을 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 사방화는 진강에게 입을 맞췄다.

“저 무시하는 거예요?”

진강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사방화가 다시금 조금 더 진하게 입을 맞추자 진강은 끝내 몸을 살짝 떨며 눈을 떴다. 

“당신……, 저리 가시오.”

사방화는 부끄러워하는 진강의 모습에 돌연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온 머리가 상쾌한 느낌이었다. 임신하기 전까진 항상 그에게 지칠 때까지 끝을 달려야 했지만, 이번엔 자신이 복수 아닌 복수를 해준 기분이었다.

“싫어요.”

진강이 노려보자 사방화는 그의 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진강, 당신 지금 얼마나 어여쁜지 알아요?”

진강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회임했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날 이리 멋대로 괴롭힐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마시오. 지금은 당신을 어쩔 수 없지만 난 다 기억하고 있을 거야.”

사방화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진강, 난 당신이 힘들까 봐 손까지 시큰시큰해 져가면서 이렇게 해줬는데 좋아하긴커녕 절 협박하는 거예요? 정말 양심도 없으시네요.”

진강이 이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손에 힘도 없다면서 왜 날 놓아주진 않는 건데? 이리 봐, 주물러줄게.”

사방화가 곧 가볍게 손을 흔들자 진강을 묶고 있던 실오라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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