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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화 (913/978)

913화. 마음을 준 여인은 오직 한 사람뿐

이 800리 급보가 도착했을 당시, 형양성은 그보다 더 가까워서 전날 밤 이미 막북 상황을 먼저 알게 되었다. 

사방화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 

“고모님이 막북 군영에 계신다고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게 쓰여 있소.”

“지금껏 북제에선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고 있었는데 고모님께서 소리소문없이 막북 군영에 가 계시다니, 이것만 봐도 북제 황제와 고모님 사이가 소문과는 다르단 걸 말해주고 있는 거 아닌가요? 암암리에 홀로 북제 황제의 동의도 없이 떠나셨다는 거잖아요.”

“고모님과 북제 황제 사이가 소문대로 깊은지 아닌지는 단정할 수 없지. 하지만 고모님께서 지금 남진으로 돌아와 막북 군영에 계신 건 사실이오. 어쨌든 우리도 막북으로 갈 테니 고모님을 뵈면 모든 게 확실해질 것이오.”

“청암의 밀보에 다른 말은 없었나요?”

진강은 직접 밀보를 건네주었다.

“아니, 별다른 건 없었소. 직접 보시오.”

밀보엔 사봉이 막북 군영에 있다는 것과 북제가 흥병을 해 150만 대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부였다. 사방화는 다시 밀보를 돌려주며 말했다.

“지금 바로 출발해요?”

진강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한밤중인데 어찌 가려고?”

“마차에서 자면 되잖아요. 회임했으니 말도 못 타게 하실 거잖아요. 어차피 마차에서 자나 집에서 자나 똑같아요.”

진강이 선뜻 응하지 않자, 사방화는 그의 팔을 달랑달랑 흔들었다.

“진강, 응? 어서 가요. 제언경이 15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남진 막북엔 60만뿐이에요. 그렇게 차이가 나는데 어찌 서둘러 가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오라버니도 힘드실 거란 말이에요.”

“우리 형님 실력으로 열흘 정도는 문제없소. 당장 출발할 필요는 없소.”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잘 것 같아요. 오라버니도 보고 싶고 고모님도 뵙고 싶어요. 여기서 밤새 허송세월 시간만 보낼 바에는 지금 나서는 게 나아요.”

진강이 어떻게 사방화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가 매우 기뻐하자, 진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내가 다 준비할 테니 시화와 시묵에게 짐만 꾸리라고 하시오.”

사방화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진강은 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사방화는 곧 시화와 시묵을 불러 떠날 채비를 하도록 분부했다. 시화, 시묵도 조만간 두 사람이 막북으로 떠날 걸 알고 있었기에 일찍이 준비를 해둬서 짐은 손쉽게 꾸릴 수 있었다. 

반 시진 후, 진강은 경가를 데리고 돌아왔다. 

* * *

경가는 들어오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사방화에게 말했다.

“주인님, 한밤중에 뭐 이리 서두르십니까? 내일 가도 늦지 않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형양성에 오지 않았다면 우린 이틀 전에 벌써 출발했을 거야. 고모님께서 막북 군영에 계신단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그냥 있을 수 있어? 게다가 북제가 150만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더더욱 가만있을 수 없지. 지금껏 군사를 양성하고 세력을 키워온 북제에게 남진 60만 병사로는 턱도 없어.”

“아무리 턱이 없다지만 조정에서 대군을 원조해주지 않는 이상 두 분께서 가신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인님, 그 침착하고 차분했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가신 겁니까? 회임하셔서 이렇게 조급해지신 겁니까?”

“우리 둘이서 100만 대군은 대적할 수 없다고 해도 10만은 거뜬해.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인 것도 알고 같이 가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아. 하지만 넌 이제 형양성 주인이니 여기서 형양성을 다스려야지. 남진의 아주 중요한 성이니 잘 지켜야지. 황제폐하께서 직접 맡기신 거니 절대 소홀해선 안 돼.”

경가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저는 배 속 아기를 걱정한 겁니다.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가다니.”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다시 돌아올 때쯤 태어날 테니 널 작은 외숙부라 부르게 될 거다. 정확히는 작은 외당숙이려나?”

경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사방화의 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살짝 한숨을 쉬고 말했다.

“세상에 누가 주인님을 말리겠습니까? 어서 가세요.”

사방화는 미소를 짓다가 홀연 진지하게 물었다.

“경가, 고모님을 뵌 적 있어?”

“딱 한 번 있습니다.”

“고모님은 널 알아보셔?”

경가가 고개를 저었다.

“몇 년 전 언신 형님을 따라 북제에 갔었는데 멀리서 한 번 뵌 적 있었습니다. 제가 신분을 밝히지 않으니 당연히 절 알아보지 못하셨지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고모님이 홀로 남진에 돌아오실 거란 건 생각지도 못했어. 서두르면 5, 6일 후에는 막북 군영에 다다를 거야. 고모님께 전하고 싶은 말은 없어?”

“없습니다.”

경가를 보는 사방화의 표정이 더 진지해졌다.

“경가, 혹시 그동안 고모님을 원망해 온 거야?”

경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럼…….”

사방화는 경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에 경가가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전에는 늘 애어른처럼 행동하시며 절 애 취급하시더니 이젠 반대가 돼 가고 있네요. 어찌 그리 걱정이 많으십니까? 남진으로 돌아오셨으니 어쨌든 고향으로 돌아오신 것 아닙니까.

형양성은 황성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니 언젠가 직접 뵙게 될 겁니다. 하고 싶은 말은 제가 직접 만나 하면 되니 전해주실 필요 없어요. 괜한 걱정은 마시고 아기나 잘 살피십시오.”

사방화는 경가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듣자 웃기기도 하면서 어이가 없었다.

“알겠어.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네. 진강, 준비는 다 됐어요?”

이어진 사방화의 물음에,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출발하면 돼.”

“저도 준비 다 됐어요. 가요.”

진강은 곧 사방화의 손을 잡고 경가에게 말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진옥이 연석에게 대군을 붙여 막북으로 보냈을 거야. 형양성 일을 다 처리하면 연석을 좀 맞아다오.”

경가가 눈을 깜빡였다.

“응? 연석 소후야가 병사를 이끄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으십니까?”

“그건 아닌데 너무 서두를까 싶어 걱정이다. 100만 대군 중 절반이 새로 들어온 초야의 백성들이라 몇 달간 훈련은 받아도 큰 난관을 겪은 적은 없어 조금 더 갈고 닦아야 하지. 길을 따라 장애물을 설치해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있도록 해다오. 막북까지 가는 길이 좀 늦어지는 건 상관없어. 빈손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이야말로 더 무서운 것이니까.”

경가가 웃으며 말했다.

“예, 그런 거라면 제 전문이니 맡겨만 주십시오. 근데 막북에 원조가 급한데 시간을 끌어도 됩니까? 제가 함정을 놓는다면 아무리 빨리 가도 한 달은 더 걸릴 텐데요. 60만 대군이 한 달을 버틸 수 있다고 보십니까?”

“경가 넌 함정을 놓는 데만 신경 써라. 북제 군을 당해내고 말고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고.”

경가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강 소왕야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는데 겁날 게 어디 있겠습니까. 부디 연석 소후야께서 어머니를 욕하지나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신중하고도 적당히 해야 한다. 과하게 했다가 조정과 백성들 모두 공포에 떨게 될 수도 있으니까.”

경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적당히 선을 지키는 것도 제 전문이지요.”

이내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경가는 두 사람을 배웅하며 대문 앞까지 다다르도록 태아를 위해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일러주었다.

사방화는 결국 마차에 오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조심할게. 조금 전엔 날 더러 애어른이라더니 네가 더 하네. 경가, 우리 반드시 살아 돌아올 테니 걱정 마.”

“네, 그 말씀 꼭 지키셔야 합니다. 가세요.”

경가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사방화가 휘장을 내리자, 마차는 한밤중 호위들의 엄호를 받으며 정효양의 별장을 떠나갔다. 

* * *

마차 안엔 두껍고 부드러운 이불이 깔려 아주 편안했다. 좋은 말을 구해온 덕인지 관로에 들어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내부 역시 진강과 사방화가 누워도 매우 편안히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진강은 사방화를 껴안고 그녀를 토닥이며 물었다.

“잘 수 있겠소?”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빨리 잠들진 못할 것 같아요.”

“그럼 이야기 좀 할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번에 마차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오?”

“지난번 마차 안이라니요?”

사방화는 순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강의 손이 그녀의 아랫배에 닿아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 하겠는가.

사방화는 얼굴과 몸 전체가 삽시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전부 당신 탓이에요.”

진강이 웃으며 사방화의 뺨에 입을 맞췄다.

“내 탓이라고? 아기가 생겨서 가장 좋아했던 게 누구더라? 그날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이런 선물도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사방화가 진강을 노려보았다.

“밖에 사람 있잖아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진강은 계속해서 그녀의 뺨에 입맞췄다.

“저들도 이럴 땐 자연히 귀를 닫게 돼 있어. 마차에만 오르면 당신을 원하게 되는 걸 어떡해.”

사방화는 진강의 뺨을 꼭 잡고 웃었다. 

“이제 마차 안이 당신 취미가 돼 버렸네요. 그래도 아직은 어쩔 수 없어요. 참아야 해요.”

순식간에 찬물이 끼얹어지자, 진강은 괴로워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매일 이렇게 참아야만 하니 물 끓는 게 어찌 이리 힘들단 말이야.”

사방화도 진강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내일부터 심경을 읊어봐요. 도움이 된다고 들었어요.”

진강이 바로 눈을 부릅떴다.

“됐어.”

“됐다고요? 힘드시다면서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싫소. 1년을 읊으면 아기가 태어날 때쯤 스님이 될지 몰라.”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요.”

진강이 그녀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단 말도 있잖아. 됐어, 심경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소. 스님이 될 바엔 그냥 무작정 참는 게 더 낫지.”

사방화는 진강의 뺨을 어루만지다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방법이 없진 않아요.”

“무슨 방법?”

사방화는 잠시 입술을 깨물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지금은 안 돼요.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진강이 바로 그녀를 째려보았다.

“비밀이란 말이오? 설마 다른 여인을 만나란 말은 아니겠지?”

사방화가 그를 툭 밀었다.

“꿈 깨세요. 다른 이들이 한평생 아내 셋에 첩 넷씩 끼고 사는 건 상관없지만, 당신은 절대 저한테서 못 벗어나요.”

진강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우리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해.”

“아니면 설마 제가 허락했다면 첩실을 들일 생각이셨어요?”

“당신이 이런 쓸데없는 생각만 하지 않으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세상에 여인은 많지만 내가 마음을 준 여인은 오직 한 사람뿐이오. 한평생 당신 소유로만 살아가는 게 내 소원이야.”

사방화는 그제야 웃으며 마음이 편해진 듯 하품을 했다.

“그래요, 세상이 어떠하든 말든 전 절대 다른 사람과 당신 마음을 공유하고 싶지 않아요. 피곤하니 어서 자요.”

사방화가 눈을 감자, 진강도 그녀를 토닥여주었다.

“그래, 어서 잡시다.”

사방화는 금세 잠이 들었고, 진강은 풋, 웃음이 터졌다. 내내 신나서 이야기하다 눈을 붙이자마자 잠들다니, 귀엽기도 하고 임신이 사람을 그렇게 고단하게 만드는 건가 하는 생각에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아직 모양도 갖추기 전일, 고 작은 생명체로 인해 그녀가 이렇게 나날이 변화한다는 게 참 신비롭기도 하고, 아름답고, 숭고해 보였다.

아기는 과연 어떤 성격일까? 자신의 어릴 적처럼 어머니 속을 썩이는 망나니가 태어나려나? 진강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또 살짝 웃음이 터졌다.

평탄한 관로를 지나는 마차는 느릿느릿 움직였고 마차 안은 흔들림 없이 아주 편안했다. 그렇게 잠든 사방화 곁에서 진강도 어느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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