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화. 본래의 호적으로 입적하다
처음 정효양을 봤던 그 날, 금연은 그가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의 형 정효순이 계속 동생을 대신해 벌을 받겠다니, 금연도 그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정효양의 진짜 모습을 꿰뚫고 통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기방에서 다시금 그와 마주쳤을 때, 금연은 정효양이 뭔가 이룰 수 있을 만한 재목이라고 느꼈던 것도 같았다. 그래서 진옥이 업적을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될듯해 자신의 선택이 꽤 뿌듯하게 느껴졌었다.
지금 상황은 금연이 생각했던 모든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금연이 따로 나서지 않아도 형양 정씨 일은 이미 정효양과 진강 선에서 완벽히 해결된 것이다. 거기다 어머니 대장공주도 더는 이 혼사를 반대하지 않으니 비로소 정식 정혼자가 된 것이었다.
지난날 금연은 진옥의 사랑을 얻지 못해 혼돈의 세월을 지냈다. 하지만 정효양을 알고부터 천천히 한 걸음씩 또렷하고 명료하게 앞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그와 만난 이 짧은 시간 내에 얻은 쾌거라 할 수 있었다.
금연도 사실 앞으로 정효양을 사랑하게 될 거라곤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싫어하진 않을 거란 확신은 넘쳤다. 겉모습은 풍류 공자를 자처해도, 마음이 그토록 올바른 빛을 내뿜는데 어찌 그저 스쳐 지나가는 그렇고 그런 공자라 폄하 하겠는가.
돌고 돈 우연과 인연으로 이런 배필을 만났다는 건 굉장히 감사하고 아주 만족해야 할 일이었다. 금연은 한참 생각하다 정효양에게 말했다.
“효양, 당신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에요.”
처음 이름까지 부르며 건넨 이 말에, 정효양은 그대로 놀라 굳어버렸다.
“자고로 큰 인물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에 꼿꼿이 서서 단정한 행실을 해야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거지요. 형양 정씨에 당신 같은 자손이 있어 다행이에요. 언젠가 그 누가 얘길 꺼내더라도 당신을 존경할 거예요.”
정효양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소. 금연, 당신은 날 존경하오?”
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존경하죠.”
정효양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연, 내 평생 반드시 잘해주겠소.”
금연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을 치웠다.
“함부로 손대지 마요.”
정효양은 이제야 금연이 내내 화가 나 얼굴을 붉힌 게 아니라 수줍어 그런 것임을 눈치채고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정효양 역시 자신의 인연이 남진 황성의 유명한 군주와 이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지만, 왠지 아주 좋은 인연이 될 거란 느낌이 들었다.
한 시진 후, 저녁 식사가 마련됐고 대장공주, 금연, 정효양은 함께 식사를 했다. 그리고 정효양은 날이 어두워져서야 우상부로 향했다.
* * *
우상부.
이목청은 아침부터 온갖 일을 처리하느라 이제야 막 한숨 돌리고 있었다. 정효양은 막 들어와 그런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물었다.
“이 대인! 약은 드셨습니까?”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들어가 쉬고 남은 일이 있다면 제게 맡겨주시지요.”
정효양의 말에, 이목청이 고개를 저었다.
“없소. 내일 동생들이 오면 아버지를 뵙게 하고 모레 장례를 치를 거요.”
“없다고? 그 많은 일을 오늘 전부 처리했단 말입니까?”
이목청이 또 고개를 끄덕이자, 정효양은 입이 떡 벌어졌다.
“철인도 아니고 어찌 그리 빨리 처리한 겁니까?”
“이제 시국도 안정됐고, 군량미와 병마도 거의 준비된 데다 폐하의 흥병 계획도 마무리에 접어들었소. 우상부 일로 시간을 지체해선 안 되지. 날도 덥고 모레가 바로 길일인 데다 길시도 있으니 어서 아버지를 일찍 안장해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소. 이젠 모두 북제에 맞서는 데 힘을 모아야 하오.”
정효양은 다가가 이목청의 등을 토닥였다.
“나라를 위해 이리도 애써주시다니, 폐하께서도 장차 반드시 좋은 배필을 찾아주실 겁니다.”
이목청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대장공주부에선 좀 어땠소? 공주마마께서 또 난처하게 하진 않으셨고?”
“당연하지요. 이 몸이 누굽니까. 공주마마 기분 좋게 해드리는 것쯤이야 어렵지도 않지요.”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들썩이는 정효양을 보고, 이목청이 다시 웃음 지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달래드리기가 쉽지 않아. 효양 공자, 공자도 어서 가 쉬시오. 폐하께서도 공자를 오래도록 쉬게 두진 않으실 테니.”
정효양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지금까지 일해놓고 또 빈소를 지키러 가겠다고요?”
이목청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본원에 어머니를 뵈러 갔다가 나도 이제 쉬러 갈 것이오.”
정효양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어서 쉬라고 말하며 자신의 뜰로 향했다.
* * *
이튿날 오후, 우상부 호위들 대열 속에 마차 한 대가 황성으로 들어섰다. 바로 이목청의 분부에 따라 도착한 이녹의와 이목자였다.
그래도 이녹의는 비교적 침착해 보였지만,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이목자는 두 눈에 아주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야, 괜찮아. 오라버니께서 우리를 데려오라고 하신 거니 당연히 우릴 지켜주시지 않겠어? 너도 지금껏 오라버니를 뵙고 싶어 했잖아. 오늘 이렇게 비로소 만나게 되는 날이니 기뻐해야지.”
이녹의가 동생을 다정히 토닥였다.
“누님, 하지만 부인께선 우릴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래도 이젠 오라버니가 계시니 우릴 해치지 않으실 거야. 우릴 안 좋아하시더라도 상관없어. 우상부에서 못 지내면 다시 평양성으로 돌아가면 돼.”
“네, 말 잘 듣고 누나와 형님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할게요.”
이목자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이녹의도 살짝 웃으며 그의 손을 쓰다듬었다.
“그래, 착하기도 하지.”
이녹의가 이목청에 의해 목숨을 구했을 무렵, 그때 그녀의 나이는 10살이 좀 넘었었다. 그렇게 우상부를 떠난 지도 몇 년이 지난 것이다.
이녹의는 이제 한평생 우상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더는 우상부 아가씨로 살 수 없음을 처절히 깨달았다. 그런데 너무도 뜻밖에 이목청이 갑자기 우상부로 불러들이고, 본래 신분까지 되찾아주었다.
몇 년 새 우상 부인의 얼굴은 기억 속에 잊힌 듯했으나 그녀의 위엄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분명 오라버니 이목청이 지켜줄 거라 굳게 믿었다.
요 며칠 세상엔 사방화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고, 그로 인해 충격받은 이목청은 하룻밤 새 백발이 자라났다는 소식까지 퍼졌다.
이녹의도 이 이야기에 가슴이 다 무너지는 듯했다. 그녀는 오래전 우상부를 떠났지만, 지금껏 아무런 고생도 한 적이 없었다. 늘 반년마다 꼬박꼬박 자신들을 찾아와준 오라버니 이목청 덕분이었다. 이목청은 이녹의, 이목자 두 남매의 든든한 버팀목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모님 사랑은 받지 못했어도, 오라버니 사랑을 담뿍 받으며 여태 고생이란 건 모르고 자라왔다. 그렇기에 이목청의 친모, 우상 부인이 저지른 지난 만행도 조금도 원망한다거나 한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제 우상부에 가면 이목청에게 누가 되지 않게 동생을 잘 챙겨야 한단 생각뿐이었다.
고통에 백발까지 자란데다 아버지마저 잃었으니 그 슬픔이 얼마나 막심하겠는가. 이녹의도 이젠 이목청의 힘이 돼주고 싶었다.
* * *
잠시 후, 이녹의와 이목자가 탄 마차가 우상부에 다다랐다.
이목청은 우상부 입구에서부터 동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이녹의는 이목자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가, 이목청의 백발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오라버니!”
이목자는 이미 쪼르르 달려가 이목청을 꼭 안고 있었다.
“형님! 보고 싶었어요.”
이목청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이목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금세 또 많이 자랐네. 누이도 점점 더 예뻐지는구나.”
이녹의는 글썽이는 눈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며칠 전 오라버니가……, 그랬다고 들었는데……, 정말…….”
이목청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이 정도로 뭘 그러느냐. 어머니께선 후원의 사당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너희만 괜찮으면 빈소에 들렀다가 어머니께 가자꾸나. 어머니께서 어제 너희를 어머니 이름 밑으로 넣어 족보에 올려주시겠다고 하셨다.”
이녹의가 깜짝 놀랐다.
“오라버니! 부인께선…….”
이목청이 다시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그냥 어머니라고 부르면 돼. 어머니께서도 많이 미안해하고 계신단다. 이제 이렇게 집으로 돌아왔으니 안심하고 우상부에서 지내도록 해라.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어머니나 내게 말하고.”
이녹의는 순간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이목자는 아직 어려도 모든 걸 이해하고 이목청의 손을 꼭 잡았다.
“형님, 부인께서 저희를 좋아하세요?”
“그럼, 좋아하고말고. 앞으로 어머니라고 부르거라.”
이목자는 금세 신이 나 함박웃음을 지었다.
“형님, 그럼 앞으로 우상부가 저와 누나의 집이 되는 거예요?”
이목청이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정말 너희의 집이 되는 거야. 하고 싶은 건 뭐든 하렴.”
“장난쳐도 돼요?”
“그럼.”
“형님께 누가 되는 걸까요?”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네게는 이 형님이 있으니 아무것도 걱정 마라.”
이목자는 또 이목청을 덥석 끌어안고 말했다.
“형님, 이제 다시는 아버지를 못 보겠죠? 백성들 말로도 아버지께선 정말 좋은 분이셨다고 들었어요.”
이목청은 다시 또 마음이 미어졌다.
“마지막으로 한번 뵐 수 있어. 다시 깨어나시진 못하지만,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도록 하려무나. 아버지께선 정말 좋은 분은 아니셨지만, 마땅히 존경받을 만한 분이셨다.”
이목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목청은 동생들을 데리고 빈소로 와 관을 열고 우상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우상은 여전히 평온히 잠든 것처럼 누워있었다. 이녹의는 그를 보자마자 어렴풋한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른 듯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이목자도 물론 우상의 아들이었기에 절로 눈물이 터져나왔다.
동생들 울음소리에 이목청도 눈가가 시큰시큰해졌다.
잠시 후, 이목청은 동생들을 데리고 후원으로 향했다.
우상 부인은 남매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주 상냥히 맞아주었다.
이윽고 우상 부인은 양자 예법에 따라 두 남매를 그녀의 이름 밑으로 넣어준 뒤, 족보에도 두 사람 이름을 올렸다. 남매가 황성으로 돌아와 우상부 족보에 오르기까진 채 반 시진이 걸리지 않았다.
이로써 남매는 우상부의 진정한 둘째 아가씨와 둘째 공자가 됐다.
* * *
우상의 장례는 모레 길일 길시에 열렸다.
진옥이 우상을 상국공으로 추봉해줬기에 장례식은 아주 성대했다. 거기다 황제 진옥이 약속대로 친히 우상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줬기에 더없이 성대한 장례식이라 일컬을 수 있었다.
선황제의 승하, 새 황제 진옥의 즉위 이후 황성 안팎을 더불어 남진 곳곳을 흉흉하게 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우상의 죽음과 함께 마침표를 찍었다.
우상의 장례가 끝난 후, 다음 날 이목청도 이젠 조정에 참석했다.
진옥은 금란전에 올라 대신들과 함께 북제 정벌에 관한 일을 의논했다.
좌상, 영강후, 감찰어사, 한림대학사 등 연로한 대신들은 우상이 떠난 이후 더더욱 힘없이 늙어버린 듯했고 조정의 분위기 또한 전보다 무거워졌다.
그들은 아직 사직을 고하기에는 자신들이 쓸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북제와의 전쟁이 끝나고 남진이 안정을 되찾는다면 이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새로운 이들을 들여 양성하고 단련해야 하는 시기였고, 현재 그들이 조정에서 하는 가장 큰 역할은 조국을 안정시키고 새로운 이들을 이끄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옥은 오늘 모두에게 엄청난 말을 던졌다. 직접 이 전쟁에 출정하겠단 뜻을 밝힌 것이었다.
대신들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고, 연로한 대신들은 황제의 옥체야말로 남진 강산의 업과 이어져 있으니 결코 출정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다.
하지만 진옥은 연로한 대신들의 반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 세대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자 이목청이 즉시 나와 의견을 말했다.
“폐하, 신도 폐하의 출정을 반대합니다. 현재 막북엔 사 후야, 유겸왕부 세자, 둘째 공자, 구곡관 총병 왕귀가 있는 데다 강 소왕야께서도 며칠 뒤면 막북으로 가실 테니 굳이 폐하께서 출정하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최의지도 맞장구쳤다.
“이 대인 말씀이 옳습니다. 폐하께선 남진 백성과 조정의 기둥이십니다. 나라를 안정시켜주셔야 하니 절대 출정하셔선 아니 됩니다.”
연석도 나섰다.
“폐하, 이 황성에서 후방을 지켜주십시오. 현재 남진에 쓸만한 인물이 없는 것도 아닐뿐더러 행군을 나설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전장에 나갈 이들은 차고 넘치지만, 폐하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세 사람이 잇달아 반대하자 문무 대신들도 반대하기 시작했고 그 누구 하나 진옥의 뜻을 지지하는 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