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7화 (907/978)

907화. 넘치는 행복 (2)

두 사람이 떠나자 정명이 말했다.

“효양 공자 말이지, 참으로 대단한 인물일세.”

연석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대단한 인물이지. 그날, 애초에 우상부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것만 봐도 대단했어. 그 정효순이란 공자랑 정말 친형제인지 의심될 정도야.”

송방이 말을 이어받았다. 

“정효순도 참 재밌는 사람이지. 대장공주마마 추대를 받던 사윗감 자리도 제 손으로 버리고 이여벽과 혼인하려다 그 계획마저 망해버렸잖아.”

“정효순이 정말 무슨 생각을 했었는진 아무도 알 수 없지.”

정명이 말했다.

“무슨 생각이었든 이젠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 형양 정씨 가문이 무너진 뒤로 그 황성에 있던 세 사람은 발이 묶인 거나 마찬가지잖아. 뭐 겉으론 자유롭게 보여도 말이지. 폐하의 발아래 어디까지 튀어나갈 수 있겠는가.”

송방이 말했다.

“정효양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지.”

정명이 말했다.

“정효양은 정효순이 아니라 강 소왕야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일세.”

송방이 말했다.

“가서 술이나 마시자! 도성 안팎이 다 가라앉아있어 갑갑해 죽을 것 같아.”

연석이 손짓하자 두 사람도 즉각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래복루로 향했다.

“강 소왕야는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정명이 말했다.

“아직 한참 멀었지.”

송방이 답했다.

“늘 이 황성을 누비던 사람이 보이질 않으니 보고 싶긴 하군.”

정명의 말에 송방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정명, 네가 아무리 보고 싶어 해도 강 소왕야는 생각도 안 하고 계실 거다. 아내와 함께 새장에서 탈출한 새처럼 기뻐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황성은 일찌감치 질렸을 거야.”

정명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소왕비마마께서 또 다치셨다던데 목청에게 물어보는 걸 깜빡했군.”

송방이 말했다.

“폐하께서 괜찮으신 걸 보면 큰일은 아닌 듯해.”

그 순간, 연석이 끼어들었다.

“금방이라도 진씨 황조 무덤을 파헤칠 것처럼 싸우던 분들이 여인 한 명으로 다툼을 그친 걸 보면, 남진 역사상 참으로 진기한 이야기로 쓰이겠어.”

송방은 급히 헛기침을 하며 제지했다.

“연석! 어쩜 그리 대놓고 이야기하는가. 하여튼 다 입조심 해야 하네.”

세 친구는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어느새 래복루에 다다랐다.

* * *

우상부.

우상부 앞엔 소천자가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곧 이목청이 말에서 내리자 소천자가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태감, 수고 많았네.”

소천자가 서둘러 말했다.

“대인께서 도성에 계시지 않는 동안 폐하의 명을 받아 장례를 도맡긴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곳이 많을 겁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폐하께도 감사드린다고 전해주게. 태감이 한 일인데 당연히 문제없겠지.”

이목청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소천자는 이내 그의 뒤를 따르는 정효양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정효양 공자님을 뵙습니다.”

정효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인사를 받았다. 

“그래. 안녕하시오, 태감.”

소천자는 정효양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폐하께서 효양 공자님이 이 대인과 함께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은 푹 쉬신 후 내일 아침 곧장 황궁으로 들라 하셨습니다.”

정효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조금이나마 쉴 수 있게 해주셔서 참 감사하군.”

“계속 우상부에서 머무르실 생각이십니까?”

소천자가 물었다.

“응, 소왕야와 소왕비마마의 분부로 이 대인의 약 복용을 책임져야 하니 당분간 우상부에서 이 대인과 가까이 있어야 하오.”

정효양이 말했다.

“그럼 소인이 바로 공자님께서 머무르실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따로 오시겠습니까?”

“우선 우상 대인께 인사를 올리고 다시 오겠소.”

정효양이 앞에 걸린 천막을 보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정효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곧이어 이목청은 빈소에 다다랐다. 영구를 지키던 이들은 일제히 그에게 깍듯한 예를 갖추었다.

“이 대인.”

이목청은 빈소의 관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졌고, 목이 반쯤 잠긴 채 힘겹게 입을 뗐다. 

“어머니는 어디 계시느냐?”

“후원에 몸져누워 계십니다.”

이목청은 천천히 관을 열었다. 시체 부패를 막기 위해 넣어둔 얼음 때문에 관에선 차디찬 냉기가 흘러나왔다. 그 안에 우상은 잠든 듯 평온히 누워 있었다. 후회 한 점 없는 삶을 살았다는 듯, 입가엔 만족한 미소도 걸려있는 듯했다.

이목청은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외쳤다.

“아버지!”

정효양은 천천히 다가가 이목청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없이 위로했다. 

한참 후, 이목청은 천천히 관뚜껑을 닫고 정효양에게 말했다.

“효양 공자, 먼저 가서 쉬시오.”

정효양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천자가 다가왔다.

“예, 공자님. 머무르실 곳은 준비해뒀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정효양과 소천자가 떠나고, 이목청이 다시금 물었다.

“어머니께선 주무시고 계시느냐?”

“이 대인께 아룁니다. 부인께선 낮 동안 쓰러져 계시다가 저녁 무렵 깨어나시어 대인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여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목청은 고개를 끄덕이곤 본원으로 향했다.

* * *

본원에 다다르자, 우상 부인을 모시는 시녀가 나와 눈시울을 붉혔다.

“이 대인,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이목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휘장을 들추고 방으로 들어섰다. 

침상에 누워 있는 우상 부인은 하룻밤 사이에 10년은 더 늙어버린 듯했고 머리엔 백발까지 자라나 있었다. 

이목청은 문 앞에서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고 잠시 걸음을 멈칫했다.

여태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던 우상 부인 역시 막 문턱을 넘은 아들을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목청 머리에 자라난 백발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도록 찌른 까닭이었다.

“청아!”

이목청은 애써 울음을 꾹 참으며 천천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청아! 이 어미에겐 이제 너밖에 남지 않았구나.”

우상 부인이 통곡하며 이목청을 끌어안았다.

“저도 어머니뿐입니다.”

이목청도 끝내 눈물을 흘렸다. 

우상 부인은 이내 목 놓아 오열했고, 이목청은 어머니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물론 우상도 평생 우상 부인을 충분히 잘 대해줬다. 하지만 아무리 강인하던 그녀일지라도 우상이 이렇게 본인을 내버려 두고 떠날 것이란 건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 혼자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을 것이다.

우상 부인은 한바탕 눈물을 쏟고 애처로이 이목청의 백발을 어루만졌다. 

“청아, 어찌 이리 야위었어. 거기다 병까지 얻었으니 이 어미는 어떡한단 말이냐?”

이목청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소왕비마마가 내주신 약을 제때 챙겨 먹기만 하면 고질병으로 남진 않을 겁니다. 걱정 마세요. 이 백발도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앞으로 영패 없이도 모두가 절 알아볼 테니까요.”

우상 부인은 순간 하고 싶은 말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잠시 후 입을 뗐다.

“어미는 우리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없구나. 네 아버지처럼 너도 가버린다면 난…….”

“그럴 리가요. 아버지께서도 지금껏 어머니를 잘 모셨으니 이젠 편히 보내드려야지요. 어머니께선 앞으로 이 아들과 함께 우상부를 잘 지켜 가셔야죠.”

우상 부인은 겨우 멈췄던 눈물이 또다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널 두고 떠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따라가, 내게 어찌 이러실 수 있냐고 따지고 싶구나.”

그러다 우상 부인은 갑자기 기침을 했고, 이목청은 급히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며 시녀에게 말했다.

“물 한 잔 내오너라.”

이목청은 우상 부인이 기침을 멈추길 기다렸다가 물을 먹여주며 말했다.

“어머니, 저도 아버지께서 임종하셨단 소식을 듣고 모든 걸 내려놓을 뻔했습니다. 근데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은 한평생 모두 하나의 인과를 추구하므로 넘지 못할 고비는 없다고 말입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음 세상이 기다릴지도 모른다고요. 그리고 아버지는 떠나셨지만 제가 있잖아요.”

우상 부인은 또다시 오열하기 시작했고, 이목청은 곁에 잔을 내려뒀다.

“어머니, 앞으론 경서도 읽지 마시고 법당도 봉해두십시오. 밭을 하나 개척해 드릴 테니 거기서 화초를 기르고 채소를 심으며, 별장에서 기분 전환도 하세요. 이 끝없는 세상엔 늘 생명이 넘쳐납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많은 사람을 다 돌보실 수는 없잖습니까.”

우상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에 따르도록 하마.”

이목청은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시녀에게 물었다.

“어머니께서 약은 드셨느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께서 태의를 불러 주셔서 진맥을 받고 저녁에 드셨습니다.”

“청아, 내 걱정은 마라. 네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으니 이대로 단명하진 않을 거다. 몸도 안 좋은데 밤새 오느라 힘들었잖니, 오늘은 이만 쉬거라. 앞으로 내가 기댈 곳은 너뿐이니 너까지 무너져선 아니 된다.”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이자, 우상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이제 좀 정신이 드는 듯 어서 쉬러 가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이목청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상 부인의 뜰을 나섰다. 

이내 우상 부인은 시녀에게 다시 분부를 내렸다.

“곧장 쉬러 가는지 따라가 보거라. 또 쉬지 않고 빈소에 갈까 걱정이구나. 내게 하나 남은 아들까지 쓰러져선 아니 된다.”

“알겠습니다, 부인. 대인께서 쉬러 가시는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 * *

역시 어머니야말로 자식을 가장 잘 아는 법이었다. 우상 부인의 예상대로 이목청은 곧장 우상의 빈소를 지키러 향했고, 시녀는 빈소 앞까지 쫓아가 우상 부인의 말을 전하며 어서 들어가 쉬라고 재촉했다.

그 말에 이목청은 미간을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빈소를 어찌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느냐? 돌아가거라. 어머니께는 네가 말씀드리지만 않으면 그만이지 않으냐.”

시녀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 대인, 소인은 맞아 죽어도 결코 부인께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부인께서 아시면 직접 여기까지 나오실 겁니다.”

이목청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알겠다. 지금 바로 돌아가 쉴 테니 일어나거라.”

“소인이 직접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목청은 우상의 관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시녀는 이목청의 뜰까지 따라가 서동에게 부탁했고, 잠시 후 서동이 나와 이목청이 쉬고 있단 말을 들은 후에야 우상 부인에게로 향했다. 

우상 부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녀는 아들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 * *

이튿날 아침, 이목청은 잠에서 깨 집사를 불렀다. 

“아가씨와 둘째 공자는 언제쯤 경성에 도착한다더냐?”

집사는 순간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 아가씨와 둘째 공자님을 말씀하시는지요?”

“녹의와 목자 말이다.”

집사는 그제야 깨달은 듯 서둘러 말했다.

“당시 대인께서 사람을 보내셨을 때 암암리에 부인께 가로막혀 지금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목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사람을 보내 즉시 데려오도록 해라.”

집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럼……, 부인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어서 보내기만 해라. 그 아이들도 아버지 자식인데 장례 전 아버지를 한 번이라도 뵈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께는 내가 말씀드리마.”

“알겠습니다.”

이목청은 곧 우상 부인의 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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