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5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진옥은 곧장 황궁으로 돌아와 이목청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서신은 역대로 긴 서신이었다.
영친왕비의 말대로 자초지종을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명확하게 적은 뒤, 진강에게 보낼 것도 한 장 더 본떴다.
이내 진옥은 매를 관리하던 사람을 불러 서신 두 통을 매 다리에 묶고 형양성으로 날려 보냈다.
* * *
이목청은 진옥에게 서신을 보낸 뒤,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해가 저물었지만, 불도 밝히지 않아 그가 있는 방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사방화는 시화에게 이목청이 괜찮은지 알아보라며 두 번이나 확인했다. 그제야 그녀도 조금 마음을 놓고, 진강과 침상 머리맡에 기대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한밤, 매 두 마리가 정효양 별장에 날아들었다. 한 마리는 사방화와 진강의 뜰, 한 마리는 이목청의 뜰로 날아갔다.
창으로 날아든 새는 방을 한 바퀴 빙빙 돌다 진강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사방화는 긴장한 눈으로 진강을 쳐다보았다.
“폐하의 서신인가요?”
진강은 사방화를 토닥이며 매 다리에서 서신을 푼 뒤 등불 앞으로 갔다. 사방화도 곧장 침상에서 내려와 그에게 딱 붙어 함께 서신을 읽었다.
실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사방화는 너무 놀라 눈빛이 사정없이 떨렸고, 진강 역시 입술을 깨물며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사방화는 진강의 손에서 서신을 가져와 다시 꼼꼼히 한 번 더 읽어보았다.
“이렇게 된 일이었군요. 진강, 당신도 폐하께서 이럴 거란 건 짐작하셨지만 우상 대인의 행동은 생각지도 못하셨던 거죠? 목청 공자는 어떡하죠? 지금쯤 소식을 받았겠지요?”
진강은 떨고 있는 사방화를 다독이며 일어났다.
“어서 가봅시다.”
두 사람은 곧장 겉옷을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이내 시화, 시묵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방에서 나왔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한밤중에 어딜 가시는지…….”
“목청 공자한테 가는 거야.”
사방화가 아주 간단히 답했다.
한밤중에 이목청을 찾아간다는 건 분명 큰일이 벌어졌단 뜻이었다. 이에 시화와 시묵도 군말 없이 두 사람 뒤를 따라갔다.
* * *
이목청 방엔 어느새 불이 밝혀져 있었고, 창가에도 이목청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저녁 내내 사방화의 분부를 따라 이목청을 지키고 있는 소등자가 자리해 있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소등자가 공손히 인사하자, 사방화가 곧바로 물었다.
“그래, 목청 공자는 뭘 하고 계셔?”
“폐하께서 보내신 서신이 도착해서 그걸 읽고 계신 듯합니다.”
사방화는 진강의 손을 꼭 잡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벌써 다 쉬어버린 이목청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강은 사방화를 위해 문을 열어줬고, 사방화가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이목청은 창가에 아주 외롭게 서 있었다. 눈빛에도 엄청난 고통과 비통한 물결이 일렁였고, 그의 발치 어딘가엔 진옥의 서신이 떨어져 있었다.
사방화는 진강의 손을 놓고 서둘러 다가가 종이를 주워 들었다. 서신의 내용은 사방화, 진강이 받은 것과 동일했다.
이내 진강은 조용히 이목청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천천히 진강을 돌아보는 이목청의 눈동자엔 붉은 핏발이 가득 서 있었다.
그를 보자 사방화도 말문이 막혔다. 지금 그에게 어떤 말이 도움이 될까. 가족의 죽음이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통한 일이기에 그저 잘 추스르란 말만이 타인이 해줄 수 있는 말 중 가장 가벼운 것이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방, 깊은 적막만 내려 앉았다.
한참 후, 진강이 이목청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목청, 우상 대인은 한평생 존경받아 마땅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가 계셨단 건 평생 자랑스럽게 여길 일이지.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한 사람이 있지만, 죽어서도 살아계신 듯한 분들이 있잖아. 네 아버님이 그 후자시고.”
이목청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금방이라도 곧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사방화는 안타까운 눈으로 이목청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끝없이 광활한 세상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만 가지가 넘을 거예요. 누군가는 어리석은 채로 살아가고, 누군가는 살아갈 의미가 뭔지 똑똑히 알고 있죠. 하지만 마음속엔 모두 원하는 게 있기 마련이에요.
목청 공자, 우상 대인께선 한평생 이루고자 하신 걸 이루고 가신 거예요. 이렇게 평생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진강도 말했듯 이런 아버지가 계신 건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에요.”
이목청은 천천히 눈을 떠 고개를 끄덕였다.
“목청, 어서 돌아가라. 효양도 같이 보내줄게.”
이어진 진강의 말에, 이목청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괜히 고생시키지 마십시오.”
“방화가 회임하지 않았다면 우리도 당연히 함께 갔을 텐데. 지금은 또 회임 초기고, 우리에게 시간도 많이 없어 우리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효양이 너랑 함께 가면 우리도 좀 마음을 놓을 수 있잖아. 걱정 말고 어서 돌아가 아버님 잘 보내 드려라. 다시 돌아올 필요는 없고. 마음 편히 도성에서 우릴 기다려주면 된다. 난 팔자가 세서 절대 쉽게 죽을 일 없어.”
진강은 또 따뜻하게 이목청의 어깨를 도닥여주었다.
진강에 이어,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목청 공자는 우리 아이의 양부가 되실 분이잖아요. 당연히 몸부터 잘 추스르셔야죠. 물론 병을 치료 중이니 크게 슬퍼하거나 해선 안 되지만,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럴 수 있나요.
그래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그러다 몸이라도 상하면 우상 대인께서도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겠어요. 그간 먹은 약도 소용없어지니 부디 잘 추슬러주세요. 우상 부인께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실 텐데 공자마저 무너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제 공자의 어머님께는 목청 공자뿐이에요.”
이목청은 괴로움을 억누르며, 다 쉬어버린 목소리를 짜냈다.
“걱정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라를 배반하지 않으셨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다행인 일이지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진강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이목청의 등을 토닥이며 소등자를 찾았다.
“예! 소왕야, 말씀하십시오.”
소등자가 들어오자, 진강이 조용히 분부를 내렸다.
“소등자, 지금 이 대인 짐을 싸드려라. 곧 도성으로 돌아가실 것이다.”
“예! 명 받들겠습니다.”
소등자가 떠나고 진강은 다시 사방화를 돌아보았다.
“방화, 난 효양을 찾아올 테니 여기 잠깐 있으시오.”
사방화 역시 이목청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떠난 뒤 방엔 사방화, 이목청만 남게 됐다.
사방화는 서신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이목청을 한번 돌아보았다. 그의 입술은 어느새 낙엽처럼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내내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던 건지 여태 밥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이대로 어찌 우상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겠는가.
“목청 공자, 이대로 돌아갔다간 도성에 다다르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 거예요. 상을 차려오라고 할 테니 조금이라도 먹고 출발해요.”
이목청은 고개를 저었다.
“못 먹겠습니다.”
“못 먹겠어도 먹어야 해요. 어찌해서 겨우겨우 도성에 당도한다고 해도 그 후는요? 벌써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도 오래지만, 공자의 아버님까지 우리 부모님 때문에 돌아가시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어요. 나 때문에 공자가 이렇게 아플 거라곤 더더욱 생각지도 못했고요.
목청 공자, 난 지금도 충분히 양심의 가책을 너무 크게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 제발 내 부탁 좀 들어주세요. 공자가 날 걱정시키면 진강이 또 질투할지도 몰라요.”
이목청은 사방화를 내려다보다 한참 후에야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방화는 곧바로 밖을 향해 소리쳤다.
“시화, 시묵! 간단히 식사 좀 준비해줘!”
“예, 마마!”
사방화는 이목청을 탁자에 앉히고, 물도 한잔 따라주었다.
이목청이 힘겹게 물잔을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하자, 사방화도 자리에 앉으며 이야기했다.
“목청 공자, 내가 약을 좀 챙겨 드릴게요. 공자는 제때 챙겨 먹을 정신이 없을 테니 효양 공자에게 따로 부탁해 둘게요.”
이목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는 여전히 힘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이목청을 바라보다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릴 테니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이목청도 바로 눈을 들었다.
“목청 공자, 내가 왜 진강을 사랑하는지 그 화살비를 뚫고도 진강이 아니면 절대 혼인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어요?
무명산에서 8년을 머무르다 그곳을 나오는 순간, 내 마음엔 사씨를 지켜야겠단 마음밖에 없었어요. 사랑은 그냥 꿈처럼 우습고, 보이지도 않는 서늘한 바람같은 것이었지요.
영친왕부 낙매거에서 진강의 시녀로 살면서 몇 달은 고사하고 몇 년을 붙들려 있었더라도 이유가 없다면 이렇게 마음이 깊어질 순 없었을 거예요.”
이목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이내 사방화는 전생의 이야기부터 차분히 풀어갔다. 자신과 진강의 이야기, 충용후부와 사씨의 갈등, 사씨 구족이 연루된 뒤 사운란에게 구조돼 진강과의 혼사가 무산됐던 그때의 이야기, 또 심수간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러다 얼마나 비참한 죽음을 맞았는지……. 끝으로 진강이 어떻게 운명을 거스르고 사방화를 다시 살려낸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를 숨김없이 전했다.
이목청은 깜짝 놀라 잠시 넋이 나가 있었다. 진강과는 어릴 때부터 형제처럼 자라온 죽마고우고, 사방화도 오래도록 짝사랑한 여인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 깊은 이야기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방화가 긴 이야기를 마쳤을 무렵, 때마침 시화, 시묵이 식사를 들였다.
사방화는 곧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이목청에게 말했다.
“세상만사 만물은 모두 하나의 인과를 추구하는 거예요. 한평생 넘지 못할 고비는 없다는 것이지요. 평생 끝까지 살다가 또 눈 깜짝할 사이 다음 세상일이 될지 또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이목청은 잠시 침묵에 잠겨있다 입술을 뗐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사실…… 이지요?”
“그럼요, 내가 설마 공자를 속일까요?”
이목청이 고개를 저었다.
“네, 다른 사람에게 이 얘길 들었다면 안 믿었겠지만, 마마께서 직접 해주신 이야기이니 당연히 믿지요. 매족 혈맥과 천도 규훈도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군요. 적어도 두 분께 한 번 더 살 기회를 준 것이니까요. 강 소왕야도 참 쉽지 않았겠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도 하늘이 늘 불공평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날 얼마나 후하게 대접해주신 건지 깨닫게 됐어요.”
이목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사방화는 곧 이목청을 보며 진지한 눈빛을 반짝였다.
“그러니 목청 공자, 공자도 반드시 잘 살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공자도 늘 내가 잘살길 바라잖아요. 나도 똑같은 마음이에요.
전생에서 난 그냥 새장 안에 갇힌 새처럼 살았지만, 이번 생에선 무명산에도 가고 또 도성으로 돌아와선 나라를 뒤엎고 물길을 헤치며 사씨를 지켜냈어요. 결국 전생에 못다 한 진강과 사랑을 이루는 데도 성공했지요. 이렇게 그 사람 아이까지 갖게 됐으니까요.
난 우리 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갈 거예요. 난 전생과 현생 모두 부모님을 일찍 여의어, 사실 부모님 사랑이 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목청 공자는 우상 대인이란 훌륭한 아버님을 만나 지금껏 최고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왔잖아요. 좋은 아버님과 엄청난 부자의 연이 있었어요.
목청 공자, 공자의 어머님은 공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신 분이 아닐지도 몰라요. 앞으로 우상부 기둥이자 어머님 기둥이 될 사람이 이렇게 자신을 등한시하고 건강을 소홀히 하면 되겠어요?”
이목청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 마마께서 이렇게 위로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목청 공자는 참 총명하신 분이에요. 때론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 고비를 넘는 게 쉽지 않을 때도 있지요. 목청 공자, 난 절대 공자가 여기서 무너지는 걸 원치 않아요.
이미 전생과 현생은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서 솔직히 우상 대인께서 전생에 어떠하셨는지 생각나지 않아요. 현생과 똑같으셨을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는 분명히 확신할 수 있어요.
바로 목청 공자가 우상 대인의 삶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이렇게나 훌륭한 아드님이 있는 건, 그를 가르친 아버님도 훌륭하셨다는 말 아니겠어요? 우상 대인은 틀림없이 전생에서도 좋은 분이셨을 거예요.
한 사람 힘으로 역경을 되돌리고 남진의 패세를 만회하는 건 불가해요. 온 나라가 힘을 모아 한마음이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거죠. 전생에 남진은 북제의 오랜 계략에 패한 게 아니라 남진의 민심이 흐트러져 무너진 거예요.”
이목청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좀 괜찮아졌습니다. 마마 말씀이 맞습니다. 이 한평생 못 넘을 고비는 없지요.”
“네, 도성까지 멀진 않지만 그래도 먹어야 힘이 나니 어서 먹어요.”
사방화는 이목청의 밥그릇에 반찬을 얹어주었고, 이목청도 그제야 조금씩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시화, 시묵도 이 짧은 시간 내 한 상을 차리느라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