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3화 (903/978)

903화. 무엇이 충신이고 간신인가 (3)

영친왕비는 문득 깨달았다.

“그래서 암암리에 그 모든 일을 성사시키려 했던 거군요.”

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생들은 왕래하며 각자 원하는 바를 이루는 법이지요. 제가 원하던 것도 당시 사영과 옥완이 원했던 것이었을 뿐입니다. 평생 원하던 사랑을 얻진 못했지만, 그것을 원한으로 삼을 순 없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목숨도, 가족도, 어린 자녀들을 두고 가면서까지 위대한 희생을 했기에 남진 천하는 그 후로 15년을 평탄히 보낼 수 있었습니다. 존경해 마땅한 분들이지요.”

영친왕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거였군요.”

“이제 우리 옛 세대는 조당에 자리를 잡고 있기만 할 뿐, 아무 힘이 없으니 이미 막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에 반해 젊은 세대는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4황자마마께선 이제 황위에 오르시고, 진강 공자는 영친왕부 소왕야가 되시고, 우리 아들 청이도 조정에 들었지만, 아직 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련의 속절없는 일들을 겪으며 조속히 성장해야 하지요. 그럼 이런 일은 제가 아닌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봐도 제가 가장 제격인 사람 아닙니까?”

영친왕비는 담담히 웃으며 말하는 우상의 모습에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내 우상은 다시 차츰 눈가가 어두워지더니 계속 말을 이어갔다.

“북제는 남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찌감치 남진 황실 은위를 포섭해 은산 은위 종사들을 설득했습니다. 범양 노씨, 형양 정씨, 절명 이가가 하나둘씩 그들의 손에 들어갔고 조정엔 제가 있었지요.

북제는 언젠가 남진 강산이 마치 살처분된 어육처럼 그들에게 잡힐 날이 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 결코 북제가 그 고기를 손에 얻게 둘 순 없었어요. 누가 칼이 되고 누가 어육이 될진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지요. 

북제는 암암리에 계획한 것들로 남진 강산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지만, 전 북제 황실과 옥가에게 그들이 틀렸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영친왕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악랄하기 그지없네요. 그들은 몇 번이고 방화를 죽이려 했어요.”

“그 지옥 같은 무명산에서도 당당히 살아남은 아가씨가 어찌 그리 쉽게 죽겠습니까? 말은 이렇게 해도 한편으론 저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눈에 띄는지라 북제 뿐만 아니라 황실 은산 은위 종사들도 목숨을 앗으려 안달이었습니다.”

“대체 왜 그런 건가요? 그냥 가녀린 여자아이일 뿐인데. 그저 무명산을 다녀왔다는 이유로요? 아니면 사씨 적녀라는 신분 때문에?”

영친왕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혈맥 때문이지요. 매족엔 3가지 보물이 존재합니다. 혈맥, 주술과 독, 성녀. 혈맥은 만물을 살릴 수 있고 주술과 독은 사람과 짐승의 악한 마음을 다스리며 성녀는 매족의 혼을 전승합니다. 그 신분과 독특한 혈맥을 비롯해 매술까지 쓸 수 있는 방화는 충분히 누군가의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지요.”

영친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요.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할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라니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요.”

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자란 할 일이 있으면 하고, 그게 아니라면 버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버리는 게 있어야 얻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요. 제가 내려놓지 않았다면 오늘날도 없었을 겁니다.

이젠 폐하의 은위가 날로 성대해지고 있습니다. 강 소왕야도 역시 모두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다들 화목하게 지내며 적에 맞서 함께 남진 강산을 훌륭하게 지키고 계시지요.

그 덕에 남진에 있던 정탐꾼들도 깨끗이 제거됐고 범양 노씨, 형양 정씨, 절명 이가도 모두 숙청됐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만 사라지고 나면 남진은 진정한 정화를 이루는 것이지요. 이젠 저도 제 할 일을 다 한 셈입니다.”

그리고 우상은 영친왕비가 눈치채지 못한 틈에 망설임 없이 술을 마셨다.

묘한 정적에 영친왕비도 곧 우상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일순간 사색이 된 영친왕비는 서둘러 손을 뻗었지만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이연……! 이렇게 다 털어놓고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건 독주에요!”

우산은 잔을 내려놓고 입술을 닦으며 씩, 웃었다.

“독주인 걸 알고 마신 겁니다.”

“황상께선 당신을 죽이려던 게 아니에요! 독주와 청주중 택하게끔 하신 거라고요!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소천자! 어서 태의를 모셔오너라!”

영친왕비는 울먹이며 소천자를 찾았고, 곧 소천자가 황급히 들어왔다.

“왕비마마?”

“어서 태의를 모셔오너라, 어서!”

영친왕비의 외침에, 집사도 뛰어 들어와선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우상 대인……? 왜 그러십니까?”

“어서 태의를 모셔오라는데 무슨 이리 잔말이 많은 것이냐!”

결국 영친왕비가 답답한 듯 외치자 집사는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반면 소천자는 거의 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멍하게 우상을 바라보았다.

“우상 대인……, 독주를 드셨습니까?”

“소천자, 어서 황상께 우상부로 오셔야 한다고 전해라.”

소천자는 틀림없이 무언가 잘못됐단 걸 알고 그제야 급하게 뛰쳐나갔다.

영친왕비는 다시 붉어진 눈으로 우상을 돌아보았다. 우상은 독주를 마시고서도 참 화가 날 정도로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연! 대체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당신은 마땅히 할 일을 한 거예요! 세상 누구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한 충신이셨다고요! 대체 왜 죽길 바라는 건가요? 황상께서 아시면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거예요!”

우상은 너무도 처연한 눈으로 쓸쓸하게 웃었다.

“왕비마마, 나도 이젠 충분히 지쳤습니다.”

영친왕비는 목이 메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한평생 남진 황실의 신임을 받고 우상이란 높은 자리에 올라 만인의 위에 있었지만, 진실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자면 전 충신이 아닙니다. 제가 한 모든 일은 사영을 존경하고 옥완을 흠모했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어요. 남진 강산을 위해 한 일은 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은 아니었단 말입니다.

사랑은 얻지도 못했지만, 그 사랑하는 여인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마저 보지 못했습니다. 평생 한 베개를 쓴 여인은 우승상 부인이란 이름만 걸어놓고 있을 뿐이니, 이 일생이 어찌 비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다행히 저도 평생 쓸만한 일을 하나 해낸 셈입니다. 제 아들은 연모하는 여인이 원하는 일을 이뤄줄 능력이 있으니 저보다 운도 좋고 기특한 놈입니다. 이소를 붙잡고 나서도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마음이 약해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이 아비를 두고도 가족애에 얽매이지도 않고 나라만 위했으니 마지막까지도 진정한 제 자랑이자 자부심이 됐습니다. 청이는 이 우상부를 더 훌륭히 이어나갈 것이고, 제 평생의 가르침도 결코 헛되지 않게 만들어줬습니다.”

그때, 이연은 갑자기 검은 피를 토하며 팔꿈치로 탁자에 기대 겨우 몸을 가눴다. 영친왕비도 이내 마음이 급해졌다.

“이연, 태의가 오기 전까지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우상은 애써 입가의 피를 닦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일찍이 이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이젠 구천에 가서 사영과 옥완을 만나고 싶어요. 아직 환생은 하지 않았는지, 우리에게 결론을 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너무도 보고 싶습니다. 제때 간다면 아마 우리 셋이서 함께 환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영친왕비는 결국 고개를 돌려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이연, 물론 당신 부인이 잘못한 점도 있지만 이렇게 혼자 버려두고 가는 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우상은 간신히 남은 힘을 짜내 말했다.

“당시 제게 시집올 때도 이 우상 부인 자리 하나만 보고 온 사람입니다. 티는 내지 않아도 제가 옥완을 정리하지 못했다는 건 똑똑히 알고 있었으니 한평생 절 사랑했다곤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린 잘못된 인연이었지만, 서로를 저버리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부인에게 우상 부인이란 존귀한 신분을 줬고, 첩실도, 자식들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줬지요. 부인은 제게 아주 훌륭한 아들을 낳아줬고요.”

영친왕비는 더 격해지는 감정에 소리가 높아졌다.

“이연! 그러니 당신이 이렇게 죽어버리면 그 훌륭한 아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목청을 생각하는 마음은 없나요? 이 일로 그 아이를 망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나라를 위해 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로 인해 한평생 친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거예요!”

우상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제 아들이니 분명 제 마음을 잘 알 겁니다. 만약 실로 헤어나오지 못한다면 왕비마마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각자 운명이 있는 법입니다.”

영친왕비가 다시 다급히 이유를 찾았다.

“그럼 여벽은요? 당신 손으로 그렇게 만드셨잖아요. 그 아이는 이제 평생 어떡하란 말이에요?”

“우리 딸 벽이 성격은 아비인 제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실패를 맛보지 않고서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는 아이지요. 그랬기에 당시 저도 몇 번을 고심 끝에 옥조천에게 벽이를 이용하라고 했던 거였습니다. 이른바 인과는 순환하는 법이니 말이지요.

이 고귀한 우상부 아가씨 신분을 버리고 도성을 벗어나 강 소왕야를 내려놓고 마음에 있던 모든 집념을 버린다는 게 그 아이 성격에 반드시 좋은 일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 아직 어려 몇 년은 더 지나야 비로소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출가했다가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장차 평생을 평안히 지낼 수 있게 준비해뒀습니다. 이 아비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지요.”

“이연, 당신 정말…….”

영친왕비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우상의 호흡은 점점 더 가빠지고, 어떤 말이든 해서 그의 시간을 붙잡고 싶었지만 사실 영친왕비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태의가 온다고 한들 이미 돌이킬 순 없었다. 무엇보다 우상 스스로가 죽음을 원하고 있기에 더더욱 방법이 없었다. 

이연의 눈빛이 점점 더 흐릿해져 갈 무렵, 밖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단숨에 객실까지 다다랐다. 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진옥이었다.

영친왕비는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말했다.

“황상! 잘 오셨습니다. 어서 우상을 살려 주세요. 독주를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 모든 게 남진 강산을 위해서…….”

“태의는 아직 안 왔습니까?”

영친왕비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 진옥은 급히 우상에게 다가왔다. 이내 영친왕비가 고개를 가로젓자 진옥이 격노했다.

“어서 태의를 불러오너라!”

하인 하나가 뛰쳐나가고 우상은 이미 힘이 다 빠져 눈빛엔 초점이 없었다. 겨우 탁자에 의지해 정신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폐하, 태의를 부르실 필요 없습니다. 노신 죽기를 바랬사옵니다…….”

진옥이 입술을 깨물었다.

“백모님을 여기로 보내드릴 때도 우상을 이리 만들 생각은 없었소. 남진을 위해 그랬단 것도 알고 짐이 얼간이도 아니거늘 대체 왜 이러신 건가!”

우상은 점점 힘이 빠지는 듯 아주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부터 이날이 오기만 바랐습니다……. 노신의 이번 생은 청이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폐하께서……, 앞으로……, 잘 대해주시기만 바라겠습니다…….”

이내 우상은 팔을 축, 늘어뜨린 채 탁자 위로 쓰러졌다.

생에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한 마디였다.

진옥은 서둘러 달려가 우상을 붙잡고 소리쳤다.

“우상?”

영친왕비는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글썽였다.

“이연…….”

진옥은 이미 숨을 거둔 우상의 팔을 꼭 붙든 채 멍하게 넋을 놓았다. 진옥의 눈동자에도 비통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친왕비는 곧 손수건을 꺼내 들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