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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0화 (900/978)

900화. 충심과 효심의 양립

사방화도 문득 옛 기억을 떠올렸다. 우상은 사방화 모친 최옥완을 연모했고, 당시 사방화 외조부 최형, 외숙부 최윤도 우상을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옥완과 사방화 부친 사영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우상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나 버렸다.

과거 얽히고설킨 것들이 오늘날 갈등을 빚어내고 있다는 것에 사방화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좌상과 사방화 고모 사봉의 아들 경가도 같은 줄기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아니던가.

이내 진강이 이목청에게 말했다.

“목청, 2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네가 아버님께 직접 여쭤보는 것이고 나머지는 하늘의 뜻을 따르는 거지. 네 아버님은 조정에선 물러나셨지만, 천하를 누비는 문하생들만 봐도 그간 얼마나 최선을 다해오셨는지 알 수 있다. 

절명 이가는 세상에 사라졌고, 형양 정씨도 무너졌지만 이제 효양이 훌륭히 이어받을 거다. 목청, 아버님께 이번 생에 대체 뭘 원하신 건지 한번 여쭤봐라. 지금쯤 아버님께서도 뭔가를 깨달으셨겠지.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건 진옥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거지. 진옥은 아직 제대로 자리를 잡지도 못했고, 내우외환에 시달려 제왕의 위엄이 제대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장래 최고로 훌륭한 황제가 될 것은 확신한다.”

진강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이목청은 말없이 입술만 깨물었다.

이내 진강도 해줄 말은 다 끝낸 것인지, 일어나 사방화를 토닥였다.

“방화, 이젠 당신도 쉬어야지.”

사방화도 이 일은 자신이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우상과 절명 이가에 관한 일은 어디까지나 이목청의 집안일이었다. 우상의 필체로 쓰인 만나면 반드시 죽인다는 서늘한 서신도 이소가 죽은 자리에서 발견됐으니 타인이 뭐라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목청, 한번 잘 생각해봐라. 이 일은 아무도 널 도와줄 수 없으니. 황제에게 충성해 나라를 위할 것인가, 대의를 위해 친족을 멸할 것인가 깊은 고민이 필요하겠지. 본래 충효는 양립하기 힘든 것이니까.”

그렇게 진강은 사방화와 함께 말없이 방을 떠나주었다. 

* * *

두 사람이 떠나자, 정효양도 일어나려다 갑자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 대인, 대인께선 이 한평생 가장 얻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목청은 고개를 들어 정효양을 바라보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응? 내 생에 가장 얻고 싶은 것이 뭐냐고?”

정효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이목청의 눈빛은 점점 깊어지다가 옅어지고 아득해지길 반복했고, 정효양은 잠시 이목청을 지켜보다 말했다.

“없다고 대답할 생각은 마십시오.”

이목청은 고개를 숙인 채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한때는 방화 아가씨를 절실히 원했지만, 강 소왕야가 있는 한 내게 올 일은 없단 걸 깨달았소. 실력, 능력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방화 아가씨는 오로지 강 소왕야밖에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도 자연스레 내려놓게 돼서 지금은 더 이상……, 정말로 원하는 게 없소.”

정효양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걸 제게 이리 말씀하셔도 됩니까?”

이목청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방화 아가씨께 청혼했단 사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말하지 못할 게 어딨다고. 두 분 혼인을 순탄치 못하게 한 관문이었을 뿐이라 벌써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난 평생토록 기억할 것이오.”

정효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대인, 대인께선 이 나라 황제폐하의 중임을 받고, 벌써 승상사직에 오르시지 않았습니까. 장차 나라 최고 대신인 승상에도 오르시겠지요. 아직 나이도 어리고, 신분은 더없이 존귀하고 높은데 꿈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아름다운 사랑도 좋지만, 인연이 아니라면 담대하게 돌아서는 것도 진정한 영웅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아직 어리시니 또 살다 보면 마음에 드는 분 하나 만나지 못하리란 법 있습니까?

이 대인께선 누가 뭐라고 해도 보통은 감히 바랄 수도, 꿈꿀 수도 없는 드높고 고귀한 자리에 계십니다. 정녕 여인 말고 원하는 건 없습니까?”

이목청의 눈가가 깊어졌다. 

“평생 바라던 건 단 하나뿐이었는데 다른 게 있겠소? 난 태어날 때부터 내 앞길이 다 정해져 있는 것 같았소. 기억이란 걸 할 무렵부터 아버지 가르침을 받고 문무를 배웠지.

아버지는 내 삶을 비추는 등불처럼 더없이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스승님이셨지만, 언젠가 아버지를 뛰어넘을 거란 생각도 하고 살았었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도 자라다 보니 아버지께선 세상 모두가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드높은 자리에 계셨지만 그게 딱히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냥 아무 의미도 없이 느껴졌소.

남들이 아무리 칭송한다고 하더라도 겉뿐인 허울일 수도 있고, 겉만 번지르르 한 것일 수도 있고, 속은 뭐 당사자만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버지는 어머니와 싸우신 적이 거의 없지만, 두 분은 서로에게 아무 감정도 없었소.”

묵묵히 얘기를 들어주던 정효양도 천천히 입을 뗐다.

“저는 어머니 없이 자란 데다 형양 정씨 출신이긴 하나 우리 가문이 그렇게 특출난 건 아니어서 그런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제 얘기를 들려드리자면, 제가 한평생 원하는 건 우리 가문을 빛내는 것입니다. 충용후부, 영친왕부 만큼이나 위대하고 고귀한 가문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이목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 조정에 들기 전부터 선황폐하께 우리 가문을 대대로 승계해 주시겠다는 윤허를 받았소. 실제로 지금 황제폐하의 신임을 얻고 있으니 남들이 보기엔 내 앞길이 그 누구보다 창창하고 만인의 위에 있다 여기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소? 일찍이 계획된 일이지만, 난 그 어떤 열망도, 계획도, 투지도 없었소. 내가 어찌하든 이 자리에서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는 것들이었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은 결코 마음에 어떠한 갈망도 심어주진 않는다오.”

“맞습니다.”

“효양 공자, 근데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오?”

이어진 이목청의 말에 정효양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니 이 대인께서 따로 부친께 연락해 처리하신다고 해도 폐하께선 언젠가 알게 되실 거란 말을 하려 했습니다. 강 소왕야께서도 말씀하셨듯 폐하께선 최고의 성군이 되실 겁니다. 최고의 제왕은 또 피치 못하게 대인께 지장을 줄 수밖에 없겠지요.”

이목청은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젓다가 눈을 감았다.

“내게 지장을 주든 말든 그건 아무 상관도 없소. 그저 내 동생이 그랬던 게 모두 아버지께서 일을 서둘러 진행하려 손을 쓰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날 더러 어쩌라고…….”

정효양은 깜짝 놀라 거의 앞으로 튀어나왔다.

“예? 대인의 동생……, 대인의 아버님께서 손을 쓰신 거란 말입니까?”

이여벽은 남진 최고의 대신, 우승상의 유일한 적녀로 나라에 손꼽히는 고귀한 신분의 아가씨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 나라에서 제일 존귀한 아가씨라고 해도 무방한 사방화를 해치려 했고, 그 죄로 우상부 가문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세상 그 누가 이여벽의 결말이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당시 세상 이목은 이여벽에게 쏠려있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이실직고했던 말에 대해선 추궁하지 않았다. 당당한 명문 세가 우상부가 어째서 검은 옷을 누군가 손에 들어가 그녀의 약점으로 사방화를 위협하게 됐는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검은 옷은 옥조천으로 밝혀지지 않았던가.

영친왕부는 거의 이 나라에선 황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영친왕부마저 배후의 위협 속에 휘말린 것 같으니 모두가 아연실색하지 않겠는가. 다들 배후의 극심하고 악랄한 수단에 대한 충격으로 정작 이를 자세히 파헤쳐봐야 한다는 사실은 다 하얗게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 당당한 남진 황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부실해졌기에 배후자가 극성을 부리는데도 그 종적 하나 잡지 못한다는 것인가? 누군가는 당연히 황실 은위 종사일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만약 정말 은위 종사가 벌인 짓이라면 남진 황실이 기른 그들을 어찌 잡지도 못하겠는가?

남진 천자의 발아래, 천지가 뒤틀리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과연 북제 정탐꾼과 남진 은위 종사들이 손을 잡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단 한 명이라도 조정 중신들을 의심했던 사람이 있던가?

정효양은 당시 남진 도성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천하에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기에 소식은 다 알고 있었다. 이목청 말대로라면 우상이 정말…….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상이 누구던가? 어린 시절부터 선황제들에게 걸출한 능력을 인정받고, 조정 대신들을 이끄는 최고의 자리, 승상에까지 오른 아주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 우상의 아들, 이목청까지도 매우 특출난 대제라 변함없이 현 황제의 중임을 받고 있었다.

우상은 지금 조정에서 물러났지만, 누구도 우상부 가문이 최고의 자리에서 내려왔다곤 생각지 않았다. 외려 더 뛰어난 인재인 이목청이 이끌어갈 세대를 더 기대했고, 우상부는 앞으로 100년은 더 번성할 거란 말도 무성했다.

그런데 그 이여벽 일을 우상이 주도한 것이라면, 그간 도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도 모두 우상이 벌인 짓이거나 관련이 있단 말이 되는 것이다. 이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실이라고 밝혀져도 믿는 이는 많지 않을 터였다. 그럼 앞으로 누가 충신이고 간신인지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정효양은 이목청의 안색이 수없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순간 형양 정씨와 자신의 비극보다도 이목청이 더더욱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반 시진이 지나, 이목청은 탁자로 가 붓을 들었다. 그의 손끝에선 황제폐하라는 글씨가 그려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충과 효는 서로 양립하기 힘든 것, 이목청은 결국 효가 아닌 충을 택했다. 

정효양은 살짝 한숨을 쉬곤 밖으로 나가 사방화, 진강의 거처로 향했다.

* * *

사방화와 진강은 마당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었다.

정효양은 또 그 모습이 고까워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이고, 팔자 한번 늘어지셨습니다. 이 대인께는 관심도 끈 것입니까?”

진강은 정효양을 힐끗 본 후 담담히 답했다.

“관심을 준들 무슨 소용 있을까.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사람인데 끊을 걸 진작 끊어내지 않으면 반드시 그 난리를 겪게 돼 있다.”

정효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아버지잖습니까.”

“친아버지도 의롭지 못하다면 아들이 단호하게 나갈 수도 있지. 그게 진정으로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길이다.”

“말은 그렇다지만 누구라도 이런 일을 겪으면 견디지 못할 겁니다.”

진강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사방화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정말 이해가 안 가요. 그간 도성 모든 일을 우상 대인께서 직접 벌였거나 관련이 있다는 건데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한 걸까요? 아무리 우리 어머니를 마음에 품었다고 해도 제 부모님께선 선황폐하 때문에 돌아가신 것인데……. 애증의 문제라고 해도 매국을 할 정도까진 아니지 않나요?”

정효양도 따라 한숨을 쉬었다.

“그 이유 하나 때문이라고 보긴 힘듭니다. 예부터 정과 사랑 때문에 벌어진 진기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당시 전…….”

진강을 보며 말을 잇던 사방화는 문득 이 얘기를 꺼내 뭐하겠느냐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진강은 사방화의 마음을 다 읽고, 그녀가 흐려버린 말까지 대신 답해주었다.

“당시 당신도 천지를 무너뜨리고 싶어 한이 맺힐 지경이었었지.”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진강의 손을 꼭 잡았다. 

정이 극에 달한다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상이 아닌 그 누구도 그 당시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사방화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이목청이 마음이 어떠했는지 성성한 백발이 남지 않았다면 절대 상상할 수도 없을 고통이었다. 본래 타인은 누구도 타인의 일을 함부로 표현할 수 없고, 느끼기도 힘든 것이었다.

<『경문풍월』 31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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