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8화. 그 당시의 경가
경가는 세욕 후 시화가 전해 준 진강의 말을 듣고, 든든히 배를 채운 뒤 잠을 청했다. 밤새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진강은 사방화를 편안히 침상에서 쉬게 했다.
“회임했을 때 누워 있기만 하면 안 좋아요.”
진강이 살짝 콧방귀를 뀌자, 사방화가 그를 째려보았다.
“진강, 딱 봐도 목청 공자가 일부러 그런 건데 뭘 질투를 해요? 진짜 뒤에서 흉볼지도 몰라요.”
“나도 알아.”
“아는데 질투해요?”
사방화의 웃음에 진강은 그녀 옆에 앉아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너무 과하게 긴장한 것 같소?”
사방화는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도 당신을 잘 보살펴야겠다는 마음에 그런 걸 어떡하오. 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사방화는 웃으며 그의 품에 기대 생각했다. 여태 진강이 이렇게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조심스레 행동한 적이 있던가? 자신과 아이로 인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린 진강, 모든 게 기적이고 감사할 일이었다.
* * *
저녁 무렵 경가가 사방화를 찾아왔다.
사방화는 자고 일어나 활기차진 경가를 보고 웃음을 보였다.
“형양성도 큰 성이니 앞으로 짊어져야 할 무게가 만만치만은 않을 거다. 오늘처럼 늘어져 자는 일도 그리워지겠지.”
경가는 가볍게 웃으며 대충 손을 휘젓곤 나른히 다리를 꼬며 앉았다.
“무명산에 비하면 형양성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놀면서도 잘 다스릴 수 있겠던걸요. 말 안 듣는 자들은 성문에다 내걸어 두면 금세 조용해질 겁니다.”
사방화는 어이가 없었지만, 진강은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거들었다.
“참 좋은 방법이네.”
경가는 진강에게 뜻이 통한 형제처럼 능글맞은 눈빛을 보냈다.
사방화는 조용히 웃음 짓다가, 점점 진지한 얼굴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경가……. 그날 내게 보냈던 서신 내용 말이지……, 사실 아직도 잘 믿기지 않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좀 말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경가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저도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충용후부에서 자랐다는 것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노후야께서 제게 주인님을 따라 무명산에 가지 않겠냐고 여쭤보셨지요.”
“뭐? 어릴 적부터 충용후부에서 자랐다고?”
“네.”
“어째서 난 기억이 없는 거지?”
경가가 웃음을 터뜨렸다.
“충용후부 아가씨로 내내 해당원에서만 지내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충용후부엔 사람도 적고 하인들도 많지 않지만, 다른 가문에 비해선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다 기억하실 수 없겠지요. 게다가 저처럼 바깥 뜰에서 길러진 이는 더더욱 기억하지 못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사방화도 일리가 있단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노후야께서 제 신분을 알려주시던 순간 처음엔 저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후야 말씀에 거짓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사실이라 믿었지요.”
“우리 조부님?”
“네, 제 외조부님이시기도 하지요.”
사방화는 여태 자신에게 이 모든 것을 숨겨 온 조부 충용후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우리 오라버니도 알아?”
경가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실 겁니다.”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네 신분을 알고 나랑 무명산에 가기로 한 거야?”
경가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당시 노후야께서 말씀하시길 제 신분에 대해 앞으로 영원히 세상에 알려선 안 될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제 친부모님이 누군지에 대해선 평생 저만 안고 살아야 할 비밀이라 하셨지요. 그러니 전 가족이건 가문이건 어떤 것도 바랄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충용후부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마냥 충용후부에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노후야께서도 저를 충용후부에서 거둬들인 아이로서 키워주셨으니 훗날 충용후부가 위험에 빠지는 날엔 저 자신을 지켜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미래는 저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당시 조부 충용후가 그런 걱정을 한 것도 다 이 세상사 변화를 위해서 그랬을 터였다. 사방화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노후야께선 주인님을 무명산으로 보내시면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어린 여자아이가 사씨를 짊어져야 하니 가지 말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당신께서도 연로해지셔서 사씨를 비롯해 충용후부조차 지켜내기 힘들 거란 생각에 늑대 무리에 가도록 보내신 것이지요.
지옥의 수련장이라 불리는 무명산이지만, 수련하기엔 가장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을 살아나온다면 반드시 이뤄낼 수 있는 것도 많다고 하셨지요. 저도 어렸지만 노후야 말씀을 듣고 이해득실을 따져봤습니다.
한평생 충용후부란 큰 그늘 아래 살 수는 없었고, 밝힐 수 없는 신분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고 어머니를 평생 만나 뵙지 않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가겠다고 응했던 것이고요.”
경가의 얼굴엔 나이답지 않은 무거운 기색이 드리워졌다.
사방화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간간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때 경가가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앞다투어 성을 나가 무명산으로 향했을 때 절 기억할 수 있도록 일부러 일을 꾸몄지요. 그러자 자연히 물길이 트여 절 믿으시더라고요.”
사방화는 이마를 문지르며 경가를 살짝 흘겨보았다.
“지금껏 네 심사가 그리 깊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구나.”
경가가 즉각 눈을 부릅뜨자 사방화가 풋, 웃으며 물었다.
“근데 조부님께서 내게 말하지 말라곤 하지 않으셨어?”
경가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말라곤 안 하셨고 쉽게 얘기를 꺼내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천기각을 세우시던 무렵 다시 생각해봤지만, 괜히 얘기했다가 절 다르게 보실까 싶어 얘기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거고요.”
사방화도 그 당시 경가의 숨겨진 신분을 알았다면 분명 갈등을 겪었을 거란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한쪽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진강이 입을 열었다.
“경가 네가 조정에 들게 돼 좌상이 참으로 좋아하시던데, 아직도 네 진짜 신분을 모르는 건가?”
경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르십니다.”
진강이 홀연 웃음을 보였다.
“여태 잘난 아들 하나 없어 한을 품고 살던 노인장께서 눈앞에 이렇게 특출난 아들이 있는데도 알아보질 못한다니, 참 고소하네.”
경가가 웃음을 터뜨리며 진강을 째려보았다.
“대체 얼마나 깊은 원한이 있으시기에 그리 눈꼴사나워하시는 겁니까?”
진강이 조용히 콧방귀만 뀌자 사방화가 대신 웃으며 답했다.
“폐하와 어릴 적부터 사이가 안 좋으셨잖아. 좌상 대인은 쭉 폐하의 사람이었으니 그런 거야.”
경가는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사방화는 문득 진강을 보고 물었다.
“진강, 지금쯤 북제가 남진 국서를 받은 지도 며칠 됐을 텐데 왜 아무 움직임도 보이질 않을까요? 고모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어요.”
진강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고모님께서도 분명 뜻이 있으실 텐데 북제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아직 결단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요. 목청 공자도 깨어났는데 언제 움직이실 거예요?”
그런데 진강이 입을 열기도 전, 경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뭘 그리 급하게 가려 하십니까. 전 이제 방금 도착해 이곳 사무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데 적어도 사나흘은 제 곁에 있어 주셔야지요. 게다가 회임까지 하셨으니 그리 급하게 나서실 거 없습니다. 주인님 몸은 챙기지 않더라도 아이 생각은 하셔야지요.”
“맞는 말이오.”
진강이 동의하자,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대화는 더 이어졌고, 경가는 저녁 식사까지 함께한 뒤 뜰을 떠났다.
* * *
“방화, 오늘도 별 볼까?”
진강의 물음에, 사방화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온종일 비가 내려서 이렇게 흐린데 별이 어디 보이겠어요?”
진강도 하늘을 한번 보곤 자신도 어이가 없었는지 잠시 말이 없어졌다.
이내 사방화는 진강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진강, 당신 이틀간 편히 쉬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일찍 쉬어요.”
“아직 시간이 이렇게 이른데 어찌 잠이 오겠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진강은 또 사방화를 얌전히 따라갔다.
“옛날이야기 들려주세요.”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응? 무슨 뜬금없이 옛날이야기?”
진강이 의아한 눈빛을 하자, 사방화는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어르신들 말씀에 아기는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말을 알아듣는대요. 우리 아기한테 옛날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정말?”
“네.”
진강은 그녀의 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 손가락보다도 작은 생명이 말을 알아듣는단 말이오?”
“응, 태어나면 한번 물어보세요.”
사방화가 웃음 짓자, 진강도 웃으며 그녀를 침상으로 데려갔다.
“그래, 이야기해 주겠소.”
진강은 침상에 누워 굉장히 심사숙고해 이야기 하나를 골랐다. 진강의 이야기는 아주 생동감이 넘쳐서 사방화는 저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야기 하나가 끝나고, 진강은 목이 말랐는지 내려가 물을 마셨다.
“어찌 이리 재밌게 잘하세요? 다방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것만큼 재밌어요.”
사방화의 말에, 진강은 금세 우쭐해져 탁자에 여유롭게 기댔다.
“더 듣고 싶어?”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연석이 틈만 나면 날 데리고 다방에 갔었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으니 뭐 어려울 것도 없지. 아직 얘기할 거 엄청 많소. 그 쪼끄만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얘기해도 모자라지 않을 거야.”
진강이 침상으로 돌아오자, 사방화는 이불을 끌어안고 앉아 미소 지었다.
“그럼 앞으로 수고 좀 해주세요.”
진강은 갑자기 사방화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기가 생겼다고 이 서방을 소홀히 대해선 안 될 것이오.”
사방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선을 다해 볼게요.”
진강은 홀연 사방화의 미소에 마음이 흔들려 그녀와 진하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질 무렵, 진강은 겨우 입술을 떼어내고 말했다.
“당신이 날 유혹한 것이오.”
사방화가 억울해하자, 진강도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등불을 껐다.
* * *
이튿날 아침, 경가가 이 이른 시각부터 사방화, 진강을 찾아왔다.
진강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경가가 온 것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 처리는 안 하고 아침부터 여긴 왜 온 것이냐?”
“어차피 할 일도 없어 보이시니 저 좀 도와주십시오.”
“안 간다.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경가는 문을 붙잡고 서서 물었다.
“진짜 안 가실 겁니까?”
“안 간다. 그럴 시간에 잠이나 더 자지.”
경가는 이내 사방화를 향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님, 오면서 보니 형양성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회임 초기이시니 함께 관아에 가주십시오. 그냥 앉아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몸을 힘들게 하진 않겠습니다. 네?”
사방화가 풋, 웃는데 진강이 눈을 부릅뜨고 경가를 바라보았다.
“네가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하지만 경가는 더 도발적인 눈빛으로 아주 여유롭게 나왔다.
“강 소왕야, 왜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남에게 도움을 청하기보단 직접 하는 게 낫단 말도 있잖습니까. 주인님과 전 지금껏 최고의 신뢰를 구축한 동료입니다. 강 소왕야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제가 도움을 청하는 것까지 방해하셔선 안 되지요.”
진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경가는 곧장 또 두 손을 모아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너무 그리 야박하게 굴지 마십시오. 저보다 형양성에 대해 잘 아시니 도움을 좀 주시면 저도 얼른 일을 처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 맡은 바를 잘 끝내야 두 분을 또 돕지요. 언신 형님과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은 접니다. 지금은 어딨는지 찾을 수 없지만, 평생 찾지 못한다는 법도 없지요.”
진강은 결국 고개를 돌리며 대충 손짓했다.
“뒤따라갈 테니 먼저 가 있거라.”
“알겠습니다!”
경가는 신난 듯 펄쩍펄쩍 뛰며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