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7화. 선착순
조용히 있던 진강이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목청, 다 네가 이 지경까지 됐기에 양아버지가 돼달라고 한 거다. 안 그럼 넌 양아버지 자격을 얻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사람이야.”
이목청이 웃음을 지었다.
“이젠 자격이 충분합니까?”
“뭐 그렇다고 쳐줄 수 있지.”
이목청은 진강을 한번 째려보곤 사방화와 아이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하……, 그 험난한 장치에 빠져 고통을 겪고도 이렇게 건강히 살아있었다니. 하늘의 은덕을 받은 복이 아주 많은 아이입니다. 그 아이 양아버지가 된다는 건 나야말로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래, 목청이 너만 이득 보는 거다.”
이목청은 자신의 백발을 만지며 진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진강은 괜스레 허공만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방화는 그만 웃음이 터졌다. 진강도 이목청에 대한 미안함이 무척 컸기에 친우에게 내줄 수 있는 건 기꺼이 다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너무도 아낌없이 주고 싶은 마음에 주특기인 입씨름까지도 멈추지 않는 모양이었다.
곧 이목청이 절명 이가 일을 묻자, 진강은 형양 정씨와 절명 이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이목청은 고개를 끄덕이곤 담담히 답했다.
“형양 정씨엔 정효양이란 인물이 있어 세가를 굳건히 지켜낼 수 있다만, 절명 이가엔 그만한 자손이 없으니 이 파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 업보인 거지요.”
사방화도 이목청이 형양 정씨부에서 절명 이가 사람들을 휘어잡았던 일을 떠올리며 새삼 감개무량한 기분에 젖었다.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별장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는 소리에 셋은 일제히 대문을 돌아봤다. 소리의 주인공은 경가와 정효양이었다.
정효양은 형양 정씨부에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돌아온 거라지만 경가는 어찌 이렇게 빨리 온 걸까? 사방화는 의아한 마음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고, 진강과 이목청도 곧바로 사방화를 뒤따라 두 사람을 맞으러 나갔다.
정효양은 말에서 번개같이 내려와 사방화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소왕비마마, 집사가 회임하셨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사방화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경가에게 물었다.
“경가, 형양성엔 어찌 이렇게 빨리 온 거야?”
경가는 온몸에 먼지바람을 풍기며 말에서 내려선, 정효양의 말에 몹시 희색을 띠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주인님, 회임하셨다고요? 진짭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가는 그녀를 위아래로 훑곤 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였다.
“도성에서 크게 다치신 뒤로 형양성에 와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다고 들었는데 어찌 회임하셨단 말입니까?”
사방화는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웃어 보였다.
“얼마나 튼튼한지 그렇게 다쳤는데도 무사하기에 나도 깜짝 놀랐어. 나도 어제 확인한 거야.”
경가는 사방화의 배를 쳐다보면서도 여전히 의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이 야위셨는데 정말 회임하셨다고요? 진맥에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니겠지요?”
사방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했다.
“경가, 지금 내 의술을 의심하는 거야?”
경가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물론 뛰어나시긴 하나, 언신 형님만큼은 아니시잖습니까. 아직 한참 부족한 의술이긴 하지만, 희맥을 보는 것쯤이야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경가가 손을 내밀자 사방화도 바로 손을 내주었다.
“그래. 네가 한번 직접 확인해 보거라.”
경가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맥을 짚었다. 그러다 잠시 후, 진지한 표정에 변화가 일어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용히 탄성을 질렀다.
“실로 희맥이네요!”
“내 진맥이 어찌 틀릴 수 있겠어?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줘야지. 우리도 어젯밤에야 폐하의 서신을 전해 받았는데 어찌 이리 빨리 온 거야? 도성에서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크게 다치셨다기에 황명을 받은 즉시 쉬지 않고 달려온 겁니다. 배고파 죽겠네요. 먹을 것 좀 있습니까?”
경가는 말고삐를 내던지며 배를 문질렀다.
“그럼. 오는 동안 밥도 못 챙겨 먹었지?”
사방화가 시화에게 눈짓하자 그녀는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네, 주인님을 뵈러 오는데 식사 따위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이내 경가는 진강을 보고 인사를 올리다 대뜸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강 소왕야, 아이가 태어나면 절 작은 외숙이라고 부르도록 해주십시오.”
진강은 더 턱을 치켜들고 눈썹을 까딱였다.
“싫은데? 뭐 웃어른다운 모습이 있어야 말이지.”
경가는 바로 흥분해 눈을 크게 떴다.
“제가 어른스럽지 않다는 겁니까!”
“아직까진.”
“어른스러운 면이 없더라도 어른은 어른입니다!”
경가는 몰래 진강을 흘긴 후, 사방화를 돌아보았다.
“주인님, 근데 언신 형님은 아직 소식이 없습니까?”
“응.”
“전 언신 형님을 믿습니다. 절대 주인님을 해칠 사람이 아니에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정효양은 대뜸 진강에게 다가가 말했다.
“강 소왕야, 전 아이의 양아버지가 되겠습니다.”
진강은 귀찮다는 듯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한발 늦었다.”
“무슨 뜻입니까?”
정효양이 눈썹을 들썩이자 진강이 이목청을 살짝 턱짓했다.
“양아버지는 이미 임자가 있어.”
정효양은 진강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이목청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대인! 깨어나셨습니까?”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효양이 다시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저야말로 절명 장치에서 두 분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정이 있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이목청은 웃으며 자신의 백발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선착순이란 게 있지 않소.”
정효양은 그의 백발을 보곤 순간 목이 메어, 괜히 진강에게 화풀이했다.
“지금 저 백발로 위협하는 겁니까? 저게 지금 이 나라 승상사직이란 높은 관직에 계신 분이 하실 행동인가요?”
진강은 나른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정효양은 이내 구원처럼 사방화를 찾았다.
“소왕비마마, 작은 양아버지가 있는 것도 상관은 없지 않습니까?”
사방화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효양 공자, 공자는 금연과 혼인할 분이잖아요. 그럼 우리 아이 당고모부가 되실 텐데요? 외려 양아버지가 되면 촌수가 뒤죽박줄 될 것 같은데.”
정효양은 그제야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방화가 웃으며 시묵에게 분부를 내렸다.
“시묵, 우선 경가에게 세욕 준비를 해주고 식사도 내주도록 해.”
시묵이 고개를 끄덕이곤 경가에게 눈짓하자, 경가는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시묵을 따라갔다.
* * *
정효양은 진강, 사방화, 이목청과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효양, 형양 정씨 시신은 모두 잘 처리했나?”
진강이 물었다.
“예, 뭐 거의 끝났습니다. 힘들어 죽겠네요.”
정효양은 몹시 피곤한 얼굴로 대답하며 차를 한잔 따라 마셨다.
“그래, 뒤처리도 마무리했으니 내일 도성으로 돌아가라.”
진강의 말에, 정효양이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네? 저만 도성으로 돌아가라고요? 그럼 두 분은요?”
그때, 사방화가 입을 열었다.
“우린 막북에 갈 거예요.”
정효양은 살짝 눈썹을 들썩이다 시선을 내려 찻잔을 뱅글뱅글 돌렸다.
“저도 막북에 따라가고 싶습니다.”
진강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다 입을 열었다.
“효양, 네 숙조부님, 부친, 형님 모두 도성에 있지 않은가. 이제 곧 형양성 일도 도성에 전해질 거다. 근데 가족들은 위로해 주지 않으려고? 만약 그들이 또 무슨 일을 벌이기라도 한다면 그건 분명 목숨이 달린 일일 거다. 진옥은 네 체면을 봐서 가족들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있지만, 세상 물정을 몰라 멋대로 행동한다면 진옥도 결국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거야.”
정효양은 담담히 답했다.
“형양 정씨부를 정리하고 돌아가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지금 이 시기에 돌아가는 건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부자가 등을 지고 형제가 원수지간이 될 바엔 차라리 안 가는 게 낫지요. 시간이 지나 제 행동이 맞고 우리 가족들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하고 싶습니다.”
진강은 정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계획을 잘 세울 줄 아는 사람이었네.”
정효양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탁자를 두드렸다.
“계획도 없이 어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형벌을 받아 초토화됐지만 이제 정씨 가문은 제가 앞으로 굳건히 버티고 서 있어야만 합니다. 폐하께는 우리 가족들을 그 어떤 방법으로 고문해도 좋으니 도성에 숨만 붙여둘 수 있게 해달라 전해주십시오.
전 두 분을 따라 막북에 가겠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 황성에 돌아가는 날이 오면 당신들께서 틀렸단 걸 깨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저도 앞으로 고생하는 일은 조금 줄어들 테니까요.”
진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막북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을 수도 있다. 넌 막북 군영에서 공을 세우려 하는 건가, 아니면…….”
“당연히 두 분을 따라야지요. 공을 세우는 거야 뭐, 중요하긴 하다만 두 분 곁에 있는 게 창창한 앞날엔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도 영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리 귀한 약초들도 잘 구해다 놓았는데 앞으로 소왕비마마와 아이에게도 쓸 일이 많을 겁니다.”
“알겠다! 같이 가자.”
진강도 곧 흔쾌히 승낙했다.
그에 정효양이 사방화에게 눈을 깜빡이자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와 함께하면 쉴 새 없이 뛰어다녀야 하고 위험에 봉착할 수도 있어요. 형양 정씨가 그렇게 됐으니 앞으로 정씨 가문의 미래는 효양 공자에게 달린 거예요.
시대를 잘 파악하는 자는 걸출한 인물이란 말도 있듯 공자의 부친과 형님도 곧 깨닫게 되실 거예요. 혹시 사이가 틀어질까 걱정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돌아간다면 폐하께서도 당연히 공자를 중용해주실 거고요.”
“사람이 한평생 편하게만 살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안목도 넓히고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어쨌든 전 꼭 두 분을 따라갈 테니 시키실 일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라도 볼멘소리는 안 할 겁니다. 나중에 절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지요.”
사방화도 정효양이 진짜 감추고 있는 진심을 잘 알았다. 정효양은 진강과 사방화만 보낸다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아 여정에 따르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사방화 역시 아이를 가지게 된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한 명 더 생겼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정효양의 말이 끝나자, 이목청이 사방화, 진강을 보며 말했다.
“폐하께선 제가 도성을 떠나기 전부터 두 분과 함께하라 명하셨습니다. 마마께서 회임까지 하셨으니 내 양아들을 위해서라도 곁을 지켜야 합니다.”
진강이 순간 눈을 부릅떴다.
“목청, 아들인 건 어떻게 확신하는 거냐?”
이목청이 웃으며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마마께선 분명 아드님을 원할 테니까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목청이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꼭 마마께서 바라는 대로 될 겁니다.”
진강은 다시 눈을 부릅뜨고 사방화의 손을 잡았다.
“방화, 이제 갑시다. 당신 지쳤으니 이젠 쉬어야 하오.”
“아직 안 힘들어요.”
“내가 지쳤다면 지친 것이오.”
진강은 말투는 투박해도 사방화를 대하는 행동은 더없이 조심스러웠다.
“경가에게 물어볼 것도 있단 말이에요.”
“좀 쉬다가 다시 물어보면 되잖아. 경가도 쉬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좀 쉬어야 하오. 쉬지도 못하게 할 것이오?”
사방화는 그제야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렇게 떠나버린 사방화, 진강을 보고 정효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지극정성 아닙니까? 저분 질투에 하늘도 깜짝 놀라시겠네.”
이목청도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 편하게만 지내선 안 되니 가끔 경각심을 깨워주는 것도 좋소.”
정효양은 더 어이가 없어졌다.
“누가요, 강 소왕야가요? 그게 마음 편히 있는 겁니까? 우리가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내내 두려운 사슴같이 소왕비마마만 바라보고 있던데.”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그 긴장감 좀 풀어주려고 다른 생각으로 좀 돌려준 거지. 내내 마마가 걱정돼 홀로 끙끙 앓으며 긴장만 하고 있잖소.”
정효양은 엷게 웃으며 이목청을 바라보았다.
“역시 어릴 때부터 친한 죽마고우라 강 소왕야를 제일 잘 아시는군요. 앞으로 조정에서도 이 대인을 건드릴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만인의 위에 계실 분이니 전 이 대인을 돕겠습니다.”
이목청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뭐 나쁠 건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