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6화 (896/978)

896화. 깨어난 이목청

시화, 시묵, 소등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다들 얼굴엔 기쁨도, 걱정도 한 가득이었다. 진강은 그들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 바깥엔 소식을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찌 안 것이냐?”

“조금 전 부엌에 먹을 걸 좀 가지러 갔다가 주방 어멈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됐습니다. 오후에 소왕야께서 특별히 부엌까지 오셔선 아기에게 좋지 않은 식재료는 피하라고 하셨다고요.”

시화의 말에 사방화, 진강 모두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주 똑똑하구나. 상을 내려주마.”

진강의 말에, 시화, 시묵, 소등자는 어느새 근심은 다 지운 채 싱글벙글 함박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소왕야.”

진강은 사방화에게 물었다.

“방화, 아이들에게 뭘 해주면 좋겠소?”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시화와 시묵은 혼인할 나이가 됐으니 좋은 배필을 찾아주는 게 좋겠어요. 소등자는…….”

“소인은 소왕야, 소왕비마마의 집사가 되겠습니다. 어디든 데려가 주십시오. 나중에 공자님께서 태어나시면 소인이 목마도 마음껏 태워드릴 겁니다.”

소등자가 도중에 앞으로 나와 사방화 대신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소등자의 말에, 진강은 눈썹을 들썩였다.

“왜 공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소등자는 되레 눈을 크게 뜨고 사방화에게 물었다.

“어? 공자님 아니십니까?”

사방화는 진강을 한번 째려보곤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 맞아. 그렇게 하게 해줄게.”

“황송합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소등자는 연신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반면 시화와 시묵은 모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저희는 혼인을 바라지 않습니다. 배필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진강이 눈썹을 까딱였다.

“내 고심하여 좋은 배필을 찾아주마. 내가 찾아준 사람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냥 나가고. 나가서 자유롭게 살면 된다.”

시화, 시묵은 순간 넋을 잃었다.

결국 사방화도 인상을 쓰고 진강의 팔을 찰싹, 때렸다.

“진강! 왜 그렇게 우리 아이들을 괴롭혀요? 시화, 시묵. 혹시 원하는 게 있거든 사양하지 말고 말해보거라.”

시화, 시묵은 진강의 눈치를 힐끔 살핀 후, 고개를 숙인 채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인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마마 곁을 떠나는 게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한평생 소왕야, 소왕비마마를 모시며 떠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소왕야께서 정해주시는 분들과 혼인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 외엔 마마 곁에 있으면서 그 어떤 것도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방화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알겠어. 아직 밥도 못 먹었을 테니 어서 가보거라.”

시화와 시묵은 부끄러움에 얼굴도 들지 못한 채 방을 나섰다. 

하지만 소등자는 한껏 신이 나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소인 황궁에서 바느질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 날 때마다 공자님 옷을 만들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대로 소등자도 달려나가자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진강이 갑자기 사방화의 손을 잡아왔다.

“방화, 방금 날 너무 세게 때렸소. 주물러주시오.”

“알겠어요.”

사방화는 진강의 팔을 가볍게 주물러주곤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

“아직도 아프세요?”

진강은 홀연 사방화의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허리는 안 아프다만 오늘 밤새 아파야 할 것 같은데. 이 길고 긴 밤에 당신이 옆에 있으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사방화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럼……. 따로 잘까요?”

진강은 바로 정색했다.

“싫소.”

* * *

그날 밤, 도성에 진강의 서신이 전해졌다. 진강은 당연히 진옥에겐 사방화의 임신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사방화는 낮잠을 깊게 잔 탓에 잠이 오지 않았고 진강과 함께 별을 보러 지붕 위로 향했다. 진강은 아주 조심스레 그녀를 지붕 위로 올려주었다. 그녀의 허리를 보호하는 손은 유달리 더 조심스러웠다.

결국 사방화도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진강,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요. 아직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앞으론 더 어쩌려고 이러세요?”

진강은 맥없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 당신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긴장되오. 어머니, 아버지도 도성에 계시고 조부님과 형님께서도 당신 곁에 없잖소. 게다가 당신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자꾸 긴장이 되는 걸 어떡해.”

사방화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진강, 저도 앞으로 더 조심할 거예요. 꼭 우리 아이 무사히 낳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니까 긴장하지 마요. 저도 덩달아 긴장하게 돼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긴장하지 않도록 노력해보겠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방화의 허리를 잡은 손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사방화도 그냥 웃으며 말없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과거 그녀는 오직 별의 풍운을 보기 위해서만 하늘을 바라봤었다. 전생엔 하늘이 어찌 이리 제게만 가혹한 건지 한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이번 생엔 더할 수 없는 축복만 쏟아지는 것 같아 실로 감격적일 따름이었다.

아이가 찾아오면서 사방화는 미래에 대한 동경, 희망, 투지도 품게 됐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자신과 오라버니 사묵함만 남겨둔 채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부모님과는 달리 진강과 함께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아이가 자라 혼인하고 아이를 낳는 것까지 지켜봐 주고 싶었다.

하고 싶은 건 마음껏 다 누리고 살아온 진강처럼, 이 아이에게도 전폭적인 후원자가 돼줄 생각이었다. 어렵게 얻은 귀중한 생명이니만큼 어떻게서든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키고 무한히 사랑해줄 것이다. 진강도 분명 어릴 적 영친왕에게서 받지 못했던 것들을 더 채워주는 아버지가 될 것이라 믿었다. 

사방화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 뭉클한 눈으로 밤하늘 별빛을 담았다. 진강도 곁에서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밤바람을 느꼈다.

반 시진이 지나고 진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갑시다. 한기 들면 안 돼.”

사방화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진강은 따뜻한 세욕 물을 들여오라 분부했다.

세욕 후, 사방화는 침상에 누워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는 진강을 불렀다.

“안 피곤해요?”

“피곤해.”

“근데 왜 거기 그러고 있어요?”

진강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당신 먼저 자면 그때 자려고.”

사방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진강은 괴로운 기색을 내비쳤다.

“지금 당신과 함께 침상에 누우면 멋대로 행동할까 열심히 참고 있는 것이오. 당신 먼저 자면 나도 괜찮을 것 같소.”

사방화는 잠시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그러나 이젠 아이부터 생각하고 싶었고, 몸도 성하지 않으니 되도록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잠을 청했다.

사방화는 금세 잠이 들었고, 진강은 창가 앞에 앉아 잠든 사방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강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영롱한 이슬이 떨어질 듯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아이가 이렇게나 강인하게 버텨주고 있으니 진강 자신도 더더욱 강해져야만 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다가 사방화가 깨지 않게 조심히 곁에 누웠다.

사방화는 잠결에도 진강을 느낀 듯 곧바로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고개를 묻고 깊이 잠든 사방화를 보던 진강은 더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사방화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한 그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이튿날, 해가 뜨자마자 소등자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이 대인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사방화는 눈을 번쩍 뜨곤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청 공자가 깨어났다고?”

“예! 조금 전에 깨어나셨습니다.”

사방화가 진강을 돌아보자 그도 곧장 몸을 일으켰다.

“씻고 바로 가봅시다.”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서니, 밖은 언제부터인지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소등자의 옷도 약간 빗방울에 젖어있었다.

이내 시화가 바로 달려와 우산을 건네자, 사방화는 밖을 한번 쳐다보곤 고개를 저었다.

“굳이 우산을 쓸 필요까진 없을 것 같구나.”

하지만 진강은 즉각 우산을 받아 사방화에게 한껏 기울여 씌워주었다.

“갑시다.”

사방화는 그냥 피식 웃곤, 진강에게 거의 안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 * *

이목청의 뜰에 다다르자 문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보슬보슬 내리는 가랑비 아래, 이목청은 유난히 더 청초하고 아름다웠다.

곧 사방화가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추자 진강도 따라 멈춰 섰다. 이목청도 두 사람이 온 것을 느꼈는지 천천히 그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욱한 안개비를 사이에 두고, 우산 속 두 사람과 방 앞에 선 한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고요한 적막, 잔잔한 빗소리만이 공백을 대신할 뿐이었다.

이목청 이마에 자라난 백발은 한겨울 지붕에 내려앉은 눈처럼 더없이 하얘 보였다. 사방화는 착잡한 마음에 순간 눈물이 차오르려 했지만, 애써 꾹 눌러 참았다. 사랑을 주지 못해 상처를 줬어도 끝끝내 묵묵한 정을 보여준 진심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건 생명까지도 초월한 깊은 마음이었다.

진강도 사방화의 죄책감을 느낀 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사방화는 다소 긴장한 듯 보이는 진강의 표정을 보곤 더욱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깨어났으니 다행이에요. 어서 가봐요.”

진강도 한결 편해진 얼굴로 걸음을 옮겼고, 이목청은 멍한 눈으로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진강이 우산을 접을 때까지도 눈 한번 깜빡이지 않던 이목청은 잠시 후에야 미간을 문지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정말 꿈이 아니군요.”

사방화는 마음이 아려와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당연히 아니죠. 내가 어찌 그리 쉽게 죽을 사람인가요?”

“그렇지요. 마마는 절대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지요. 강 소왕야가 있어 무사하신 듯합니다.”

이목청은 진강에게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회임해서 찬바람을 맞으면 좋지 않으니 안에 들어가서 얘기 나누자.”

이어진 진강의 말에 이목청은 깜짝 놀라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사방화는 금세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목청 공자,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기 양아버지가 돼 주세요.”

사방화는 푸른 연꽃이 피어나듯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이목청은 너무도 놀라운 충격에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탄성과 함께 웃었다.

“회임이라니……. 경사군요.”

모든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순 없었다.

이내 세 사람은 다 함께 이목청의 방으로 들어갔다.

* * *

사방화는 안으로 들어가 절명 장치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배후자를 속이기 위해 어떻게 판을 짰고 죽음을 가장하게 됐는지에 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미 며칠은 지난 일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진강은 아무 말 없이 한쪽에 앉아있었고, 이목청은 이야기를 다 들은 뒤 이마에 난 백발을 만지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마마께서 무사하니 흰머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앞으로 영패를 보이지 않아도 모두가 날 한눈에 알아볼 테니 귀찮은 일도 줄어든 셈이지요.”

사방화는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래도…….”

“죄책감 가질 필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강 소왕야께서 마마를 위해 하신 일들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지요. 나도 우리 남진 강산과 내 가문을 위해 그런 것뿐입니다. 마마께서 어찌 그리 쉽게 죽을 수 있겠습니까.”

이목청이 중간에 말을 끊자, 사방화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어찌 그런 말로 날 위로하시는 거예요? 목청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닌데요.”

“그렇다면 더더욱 그런 말씀은 하실 필요 없지요. 계속하시다간 저기 곁에 있는 어느 분께서 질투하실 겁니다.”

이목청은 진강을 힐끗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고, 사방화도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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