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5화 (895/978)

895화. 한평생 부인으로 살다

진강은 곧장 젓가락을 들고 이것저것 살뜰히 먹여줬다.

곧 배가 어느 정도 차자, 사방화는 진강의 다리에서 내려와 그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저도 먹여줄게요.”

진강이 풋,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렇게 너 하나, 나 하나 알콩달콩 시간을 보내며, 반나절 만에야 겨우 식사를 끝마쳤다.

“이제 침상에 가서 쉬시오.”

진강이 말했다. 

“많이 먹어서 바로 누우면 안 좋아요.”

“그럼 앉아라도 있으시오.”

진강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려 했다.

“무슨 인형도 아니고, 이 정돈 괜찮아요. 여태 그 고생을 겪고도 버틴 아이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평소대로 하면 돼요.”

진강은 홀연 인상을 찌푸렸다.

“회임까지 했는데 막북에는 또 어떻게 가겠소? 차라리…….”

“갈 수 있어요. 회임했으니 더욱 도성엔 돌아갈 수 없어요. 어머님, 아버님께서 제가 회임했단 걸 아시면 매일 마음 졸이시며 절 지켜보기만 하실 텐데 제가 어찌 버텨요? 그간 황궁에서 숨 막히게 지냈던 걸로도 충분해요.”

진강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방화, 나랑 헤어지고 진옥의 황후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땐, 황궁의 삶이 얼마나 고될지 생각해본 적 없었소?”

사방화는 있는 힘껏 진강을 흘겨보았다.

“그래요! 없어요.”

진강이 웃자 사방화가 그의 손을 잡고 달랑달랑 흔들었다.

“진강, 저 정말로 막북에 가고 싶어요. 천기각에도 가보고 싶고요. 거기 있는 고서 중에 이 매족 천도에 관한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이대로 도성에 돌아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아이까지 생겼으니 더더욱 이대로 죽기만을 기다릴 순 없잖아요.”

진강도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신 뜻에 따르지. 하지만 내 말 잘 들어야 하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도 의술을 배울 테니 더 이상 내게 괜찮은 척 숨기지도 못할 것이오.”

사방화가 웃으며 눈을 반짝였다.

“의술을 배우시겠다고요?”

“응, 지금껏 배우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불편한 게 너무나도 많소. 당신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희맥도 알아챌 수 없으니……. 내가 이렇게 무능력하다고 느껴진 건 처음이오. 전생에서도 이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지만, 이번 생엔 당신이 아플 때마다 내가 정말 쓸모없게 느껴져.”

사방화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가 가르쳐드리지요. 하지만 제게 가르침을 받는다면 절 사부라고 불러야 하지 않겠어요?”

진강이 눈썹을 들썩였다.

“당신을 사부라 부르라고?”

사방화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식을 가르쳐 주는데 사부가 아니고 뭐란 말이에요?”

“사부는 부친을 모시듯 존중해야 한단 말 못 들어봤소?”

진강이 한쪽에서 종이를 가져와 글씨를 써 내려갔다. 아비 부(父)자가 아닌 눈에 띄게 큼지막하게 쓴 며느리 부(妇), 사방화도 헛웃음이 터졌다.

“한평생 부인으로 살라는 뜻이죠?”

“그럼 뭐겠소?”

“알겠어요. 달게 받아들이지요, 뭐.”

진강은 웃으며 사방화에게 입을 맞추고는 갑자기 표정을 구겼다.

“그럼 앞으로 당신과 아무것도 하면 안 되는 것이오? 어찌 참으란 거야?”

진강은 몹시 괴로워했지만, 사방화는 말없이 눈만 깜빡일 따름이었다.

“응? 어떡하오?”

사방화도 결국 실소하며 이야기했다.

“전날 당신이 그랬을 때도 아이가 다칠 정돈 아니었어요. 의서에도……, 석 달이 지나면 안정을 찾고 괜찮다고 하니……, 적당히 하는 건 뭐…….”

“정말?”

진강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의술이나 잘 배워요.”

사방화가 흘겨보자, 진강은 아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바탕 닭살 돋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사방화도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진강은 그런 그녀를 위해 서둘러 침상에 살포시 눕혀주었다.

사방화는 금세 잠이 들었고 진강은 곁에 누워 그녀의 손을 가지고 놀았다. 

두 사람 사이에 정말 아이가 생겼다! 반나절이 지났지만, 진강은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달간 온갖 고생을 하며 다치고 심혈이 고갈되기까지 했지만, 아이는 무사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적적인 일인가. 정말 하늘에서 내려주신 아이일까?

그날 밤, 마차가 스스로 도성 거리를 몇 번이고 배회할 동안 진강은 끝없이 샘솟는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그녀에게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바로 그날 탄생한 사랑의 결실이었다. 여자아이일까, 남자아이일까? 진강을 닮았을까, 사방화를 닮았을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아이라니……. 아이가 생긴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나? 진강은 태어나 처음 맞는 벅찬 설렘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이 핑 돌고, 코끝이 다 시큰거릴 지경이었다.

사방화는 자면서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토록 원하는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에 자면서도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진강은 잠시 부엌으로 가 분부를 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와 한참 동안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다른 무엇보다 사방화가 이렇게 기뻐한다는 것이 한없이 행복하고 벅찬 마음이었다.

* * *

밤이 되자, 누군가 밖에서 조용히 외쳤다.

“소왕야, 폐하께서 보내신 전서가 도착했습니다.”

진강은 즉각 창가로 다가가 서신을 건네받았다. 서신은 무려 3장에 달했고, 진옥의 필체로 빼곡한 글씨를 보고 진강은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평생 나한테 이렇게 긴 서신을 쓴 적이 있었나? 무슨 잔소리가 이렇게 많은 거야…….”

저도 모르게 내뱉은 중얼거림에, 사방화가 천천히 잠에서 깼다.

“진강, 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 일어났어?”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진강의 손에 들린 서신을 보고 물었다.

“폐하께서 보내신 건가요?”

“날도 어두워졌는데 눈이 어찌 그리 밝소.”

진강이 침상으로 다가오자 사방화가 생긋 웃었다.

“당신이야말로 등도 켜지 않고 그 서신이 보이세요? 황궁에서 쓰던 묵 향기가 느껴져서 폐하라 짐작한 거예요. 저녁 무렵엔 서신이 도착할 거라고도 하셨잖아요.”

진강은 침상으로 다가와 서신을 건네주곤 등을 켰다. 사방화는 곧장 침상에서 내려와 등 앞에 서서 서신을 읽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말이 맞네요. 온통 잔소리뿐이에요. 경가를 형양성 성주로 만들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진강은 콧방귀를 뀌었다.

“경가는 당신 사람이니 진옥을 속일 수도 없잖아. 사람을 쓰기 전 분명 샅샅이 조사해 봤을 것이오. 거기다 효양은 도성에 자리를 잡으려 하고 정효순, 정 어르신 두 분을 처벌하진 않았다만 다시 형양성으로 돌려보낼 리도 없잖소. 본래 도성 자제들은 외지인들을 그다지 반기지 않소. 경가는 도성에 뿌리가 없지만 문무를 겸비했으니 형양성을 다스리긴 그만한 인물도 없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는 말이에요. 그럼 며칠 뒤에 경가가 올 테니 만날 수도 있겠네요?”

“응, 곧장 경가를 여기로 보낸다고 했으니 서두른다면 모레 저녁쯤엔 도착할 수도 있겠네.”

사방화가 미간을 문질렀다.

“북제 쪽엔 무슨 소식이 없나요?”

“청암을 말하는 것이오?”

“네.”

“없소. 하지만 머지않아 소식이 올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강의 품에 기댔다.

“배고파요.”

진강은 그녀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곧장 밖으로 외쳤다.

“여봐라! 식사를 내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진강은 다시 웃으며 사방화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두 사람 다 배불리 먹여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사방화도 피식 웃으며 배를 문질렀다.

“근데 시화와 시묵은 어딜 갔는지 하루종일 보이질 않네요?”

“아, 약고에서 당신 약을 달이고 있소. 황궁에서 제조하던 그 약 처방 그대로 달여도 되오? 회임했으니 피해야 하는 약재가 있는 건 아닌가?”

“효양 공자 약고요?”

“응, 내게 줬소.”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는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진기한 약초들을 어마어마하게 갖고 있다던데 그걸 다 내줬다고요? 강제로 뺏으신 건 아니고요?”

“충용후부와 영친왕부 근처에 집을 지어달라더군. 거래를 좀 했소.”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죠. 그 무수한 약재들과 토박이들도 비집고 들어가기 힘든 충용후부, 영친왕부 근처의 집이라면 정말 손해 볼 것도 없는 거래네요.”

“똑똑한 사람이 손해 볼 짓 하는 거 봤소?”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또 어디 간 거예요?”

“형양 정씨부에. 시신들 수습하러 갔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심혈을 보충하려 만든 거라 귀한 약재만 들어가서 몸에 해로울 건 없어요. 3일에 한 번씩 먹는다면 별문제는 없을 거예요. 지난 한 달간 먹은 약이 너무 많아서 조금 신경 쓰이긴 하지만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맥 짚었을 때 아이가 건강하단 것도 확인한 거 아니었소?”

“태아가 잘 들어섰단 것만 알 수 있어요. 아직 다른 건 모르고요.”

“건강한지는 언제쯤 알 수 있소?”

사방화는 몹시 긴장한 진강을 올려다보곤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 달은 더 넘어야겠지만 제 느낌에 아주 건강한 듯하니 걱정마세요.”

진강은 사방화를 폭, 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윽고 탁자엔 맛있는 식사가 하나둘 차려지기 시작했다. 사방화는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입맛이 돌아 진강이 먹여 주는 것을 곧장 잘 받아먹었다.

식사를 다 끝내고, 진강도 기분 좋게 젓가락을 내려놓고 웃으며 말했다.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에는 입맛이 없어 도통 먹질 않길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지금은 또 어찌 이리 잘 먹소.”

“회임하고 나면 모든 게 다 바뀐대요. 당신도 서서히 적응해야 할 거예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 달 동안 아이를 품어야 하는 당신이 힘들지, 내가 뭐 힘들겠소.”

“저도 진강 당신만 곁에 있다면 힘들지 않아요.”

진강은 사방화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사방화는 그런 진강이 귀여웠는지 풋, 웃다가 물었다.

“폐하께는 아직 답신 안 하셨죠?”

“지금 하려던 참이오.”

진강은 아주 간단히 몇 자를 적은 뒤 사람을 불러 서신을 전했다. 

“근데 청운관 왕 장군님께서 돌아가셨단 건 폐하께서도 아시겠죠? 서신에는 언급이 없던데……, 누굴 청운관으로 보내신 거예요?”

“청운관은 남진의 두 번째 천험(*天險: 천연적으로 험함, 천연 요새) 장벽인 만큼 후임 총병을 성급히 정할 수 없소. 우선 혼란스럽게 만들고 다시 얘기해보려고.”

사방화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혼란스럽게 만든다고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 장군은 분명한 왕가 일맥이었소. 문무, 병법, 전략에도 능한, 대대로 가풍을 이어받은 집안이지. 호랑이 새끼는 자라면 사람을 물게 된단 말이 있지 않소? 그 후손 또한 예외는 아니오. 우선 혼란스럽게 만들어 그들 중 누가 청운관의 정세를 압도할 수 있는지 보자는 것이오. 누군가 또 나오면 청운관엔 계속 왕가 사람을 쓰고 없다면 그때 조정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오.”

“이 기회에 왕가 사람들을 시험해 보자는 뜻인가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그런데 그때, 시화, 시묵, 소등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은 휘장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서선 짜 맞춘 듯이 동시에 외쳤다.

“마마! 회임하셨습니까?”

사방화는 순간 멍해졌고, 진강은 웃음을 터뜨렸다. 

“들어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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