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4화 (894/978)

894화. 부모가 되는 일

한편, 방으로 돌아온 진강은 침상 머리맡에 기대 눈을 감았다. 사방화가 깨어나길 기다리려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든 것이다.

사방화는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떴고 머리맡에 앉아 잠든 진강을 발견했다. 행여 그가 깰까 조심스레 돌아누워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진강은 반 시진 후에 일어났다. 그러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사방화를 보고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언제 일어났소?”

“조금 전에요.”

“왜 안 깨웠소. 배고프지?”

사방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안 고파요. 당신이 언제 잠든 지 몰라서 안 깨운 거예요.”

진강은 사방화를 쓰다듬으려다 쥐고 있던 손수건을 보곤 그녀에게 건넸다.

“아, 이거 효양이 가지고 온 건데 한번 보시오.”

사방화가 물었다.

“네? 봉양성 동은사에서 이렇게나 빨리 돌아왔다고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뭔가요?”

사방화가 접힌 손수건을 펼치며 물었다.

“보면 알게 될 거요.”

사방화는 곧 손수건을 펼쳐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 

“운란 오라버니 필체잖아요.”

“응.”

“효양 공자는 이걸 어디서 얻었대요?”

“봉양성 동은사에 도착하니 당신에게 서신을 보냈던 자와 스님 두 명이 함께 죽어있었다고 하오. 몸엔 아무런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들이 죽어있던 방 벽에 써진 걸 보곤 모사해 왔다고 하더군.”

사방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란 오라버니는 정말 무사한가 보네요. 걱정할 필요 없겠어요.”

진강은 손을 들어 사방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족 왕실 사람이니 당신보다도 뛰어난 매술 능력을 가졌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당연히 당신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하지만 분심독은 혼자서 억제할 수가 없단 말이에요.”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데 여태 아무 일 없는 거 보면 방법이 있는 듯해.”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꼭 움켜쥐었다.

“어쨌든 좋은 소식이네요. 근데 운란 오라버니는 또 어디로 갔을까요? 배후자를 쫓아 청운관으로 가신 걸까요?”

“그럴 수도 있어.”

“목청 공자는 아직 안 깨어났나요?”

“당신이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했잖소.”

사방화는 살짝 한숨을 쉬며 진강의 품에 기댔다.

“맞아요. 폐하께서 절 평양성에 데려다주신 후로 목청 공자에게 우릴 따르란 명을 내리셨죠. 지금 저렇게 돼버렸으니 홀로 두고 막북으로 갈 순 없어요.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죠. 또 폐하께서 이제 형양성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성지도 내려주셔야 하니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해요.”

“그래, 당신 몸도 이러니 이틀간 푹 쉬어야지. 밥 먹읍시다, 일어나요.”

진강이 사방화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지만, 사방화는 진강을 더 꼭 껴안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입맛 없어요.”

“그래도 먹어야지. 그날 이후로 매번 입맛 없다고만 하고 있잖아.”

진강이 손을 잡고 침상을 내려가자 사방화도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랐다.

곧 식사가 준비되자 진강은 사방화를 앉히고 그녀에게 반찬을 얹어주었다. 하지만 사방화는 정말 입맛이 없어 진강이 준 반찬도 이리저리 뒤적대다 겨우 몇 입만 먹을 뿐이었다. 

진강은 미간을 찌푸리며 국을 권했지만, 사방화는 입에다 갖다 대기도 전에 그릇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내 진강은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먹기 싫어요. 오늘 많이 자서 입맛이 없나 봐요. 당신 먼저 먹어요.”

사방화는 즉각 진강에게 반찬을 얹어줬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에 사방화도 그를 말없이 바라보자 진강은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아니면 당신이 맥을 짚어보는 게 어떻겠소?”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제 몸을 제가 가장 잘 알지 누가 알겠어요?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예요. 밥 먹고 같이 산보 좀 하다 보면 입맛이 돌지도 모르겠네요. 밤에 비가 오려는지 무더워서 더 입맛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당신……. 정말 회임한 것 같아서 그러는 것이오.”

사방화는 깜짝 놀라 잠시 굳어버렸다.

진강은 그런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며 최대한 성실하게 설명했다. 

“소등자에게 물어보니 매번 제때 월경을 했던 여인이 갑자기 주기가 늦어졌다면 십중팔구 회임한 거라 했소. 물론 당신 몸 상태도 그렇고 다치기까지 해서 아닐 수도 있지만, 쉽게 피곤해하고 입맛도 없다는 게 회임 증상과 비슷한 것 같아서 그렇소.”

사방화는 멍하니 진강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진강도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당신이 지금 몸 상태로 회임하는 건 그다지 원치 않지만, 만약…….”

사방화는 곧장 맥을 짚어보았다. 그러자 진강도 하던 말을 멈추고 긴장된 눈빛으로 사방화를 지켜봤다.

사방화는 아주 침착한 자세로 맥을 짚어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고 그녀의 표정에선 미세한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진강은 정말 숨이 멎을듯한 긴장감에 몸과 정신이 하나로 이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 후, 사방화는 반대 손도 짚어보았다. 

진강의 시선은 내내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고, 맥을 짚어보는 사방화의 표정도 늘 한결같았다.

이윽고 사방화는 천천히 손을 내려놓고 탁자만 보며 말이 없어졌다.

진강은 대답을 기다리다가 몹시 긴장된 눈으로 물었다. 

“어떻소……?”

사방화는 진강에게서 좀처럼 보기도 힘든 긴장한 모습에 갑자기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결국 진강은 다시 또 사방화를 보챘다.

“방화!”

사방화는 웃음을 멈추곤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강, 정말 희맥이에요.”

진강은 사방화의 말에 순간 조각이 된 듯 온몸이 다 굳어버렸다. 

정말 희맥이라니,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니……!

진강은 한순간 피가 다 멈춰버린 듯했다. 머릿속도 웅웅, 울리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정신은 또렷한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았다. 눈도 깜빡일 수 없어 멍하게 사방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화도 진강만큼이나 마음속에 거센 파도가 세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처음 맥을 짚었을 때 느껴지던 희맥에 정신이 멍해졌다. 설마 잘못 짚은 걸까 싶어 몇 번이고 다시 진맥했지만, 점점 실감할 수 있었다. 

임신한 지……, 한 달이 넘은 것이었다! 벌써 그간 큰 사고를 두 번이나 겪었으니 부모로선 자격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아주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이제야 사방화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사방화는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눈물은 눈이 아닌 가슴에서 거세게 터져 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런 몸으론 평생 아기를 가질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늘 가슴 졸이며 지냈다. 하지만 아기는 한 달간 그리 쓴 약을 먹었는데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도, 준비도 전혀 하지 않았을 때 갑작스레 찾아와줬다.

한참이 지나, 진강은 그제야 천천히 손을 내밀어 사방화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도 맥을 짚어보려는 듯, 사방화 손목에다 손가락을 올려뒀다.

그러자 사방화는 엷은 웃음을 보이다 진강의 손을 잡고, 자신의 맥박이 뛰는 자리에 옮겨준 뒤 정확한 진맥 방식을 알려주었다.

“맥은 이렇게 짚어요. 맥은 평맥(平脉), 부맥(浮脉), 침맥(沉脉), 지맥(迟脉), 수맥(数脉), 허맥(虚脉), 실맥(实脉), 활맥(滑脉), 홍맥(洪脉), 세맥(细脉), 현맥(弦脉), 촉맥(促脉), 결맥(结脉), 대맥(代脉)으로 나뉘는데, 정상적인 맥은 평맥, 상맥이라고 해요. 회임한 맥은 보통 활맥으로 나타나지요.”

진강은 잠시 눈을 들어 사방화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사방화는 그를 향해 더 엷게 웃어 보인 뒤 계속해서 설명을 이었다.

“활맥은 맥이 옥구슬처럼 이리저리 부드럽게 흘러가는 특징을 띠고 있어요. 제 말을 떠올리면서 자세히 한번 느껴보세요. 활맥은 거품이나 작은 구슬처럼 당신 손가락을 아주 힘차고 빠르게 지나갈 거예요. 여기 세 손가락에도 또렷이 느껴질 정도로 아주 경쾌한 맥상이지요.”

진강은 말없이 사방화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에 정말로 무언가가 느껴지는 듯 진강의 눈동자도 살짝 떨림을 보였다. 사방화는 살짝 미소를 짓다,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맥으로 성별을 구분 짓자면 남녀 모두 양기는 약하고 음기는 강해요. 왼쪽은 사관(司官)이고 오른쪽은 사부(司府)를 뜻하는데, 왼쪽이 강하면 남자고 오른쪽이 강하면 여자예요.”

순간 진강이 갑작스레 손을 놓았다.

“왜 그러세요?”

진강의 안색이 굳어졌다.

“왼쪽의 맥이 빠르면 남자고, 오른쪽 맥이 빠르면 여자라 했소?”

사방화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의서에선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해요.”

“그 의서가……, 틀림없이 정확한 것이오?”

“거의 정확하나 그것만 보곤 확정 지을 순 없어요. 의서도 선조들에게서 전해 내려온 것이니 틀린 부분도 있을 거고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니까요.”

진강은 손을 살짝 움켜쥐다가, 한참 후에야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 희맥이오?”

사방화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응, 정말 희맥이에요.”“당신……. 여태 실수로 잘못 진맥한 적은 없었소?”

진강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사방화의 상태로는 회임이 불가능하단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방화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만 터뜨렸다.

“네, 거의 없어요.”

이내 진강의 미간에 어둠이 드리웠다.

“진강…… 기쁘지 않은 거예요……?”

진강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사방화도 진강이 전혀 기뻐하지 못하는 것에 뭐라고 할 수도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토록 원했던 아기가 그 모진 시련을 버티고 굳건하게 살아있는 것에, 반드시 이 아기를 무사히 낳고 싶다는 굳은 결심이 섰다.

사방화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진강의 앞에 섰다. 그리곤 진강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진강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사방화가 하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사방화는 그의 머리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진강, 우리 아기가 이렇게나 강인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부모로서 우리는 더 강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무사히 이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않겠어요?”

진강은 말없이 사방화 가슴에 기대 입술만 달싹였다. 목이 멘 듯 노력을 해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태 같았다.

“응? 그렇지 않아요?”

진강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네?”

사방화는 집요하게 그의 대답을 들으려 했다.

한참이 지나, 진강은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쉰 목소리로 답했다.

“맞소.”

사방화가 가볍게 웃었다.

“그럼 아까 맥을 짚었을 때 어떠셨어요? 여자 같아요, 남자 같아요?”

진강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제대로 느끼진 못해서 잘 모르겠소.”

“저도요.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느껴지지 않나 봐요. 그럼 당신은 여자아이가 좋으세요, 남자아이가 좋으세요?”

사방화는 진강의 머리를 다정히 쓸어주며 물었다. 

“여자아이.”

진강은 답하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전 남자아이가 좋은데. 당신과 꼭 닮은 남자아이요.”

진강은 순간 몸에 긴장이 풀린 듯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몸속에 아기가 있다는 걸 알고부턴 그의 행동은 더더욱 조심스러워졌다. 

“부모로서 낳기만 하고 양육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지.”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낳아서 혼인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까지 보고 싶어요.”

“나도.”

진강은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전처럼 진하게 껴안지는 못했다.

“진강, 우린 반드시 살아서 이 아이를 무사히 낳고 살아가요. 어머님께서 당신을 이토록 훌륭히 키워주신 것처럼요. 저도 어머님께서 당신을 사랑해주신 만큼 이 아이를 사랑할 거예요.”

진강은 웃으며 그녀를 껴안은 손을 풀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사방화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께선 날 얼마나 버릇없이 키우셨는데. 당신도 그럴 거라고?”

사방화도 진강을 내려다보며 그와 가만히 눈을 맞췄다.

“왜요? 세상에 우리 강 소왕야처럼 담대하고 훌륭하신 분이 어디 있다고요. 우리 아기는 꼭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어요. 황조모님, 어머님께서 당신을 애지중지 키우셨으니 우리 아기도 사랑을 담뿍 주며 기를 거예요. 하지만 아버님께선 당신을 많이 아껴주진 못하셨으니 절대 그 점은 배우지 마세요.”

진강은 사방화의 눈을 바라보다 엷은 미소를 그렸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기를 벌써 감싸고 돌다니,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과연 내 자리가 남아있긴 할까?”

사방화는 농담으로 없다고 대답하려다, 깊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자리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거예요, 영원히.” 

진강이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폭, 껴안았다.

“방화!”

“네?”

진강은 이내 사방화를 자신의 다리에 앉히곤 진지하게 말했다.

“어서 밥을 드시오. 이제 입맛 없단 말은 통하지도 않으니까.”

사방화는 탁자 위에 올려진 음식들을 살펴보다가 진강의 품에 기댔다.

“먹여주세요.”

“알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