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3화. 운란의 종적
잠시 후, 정효양이 성큼성큼 시원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휘장 너머로 한가로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진강을 보곤 있는 힘껏 눈을 부릅떴다.
“하! 팔자가 아주 늘어지셨군요! 저는 힘들어 죽겠는데요!”
정효양은 바로 소리 나게 걸어와 진강이 마시던 차를 단숨에 마셔버렸다. 차가 뜨거운지, 차가운지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는듯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갈증이 풀리지 않았는지 아예 주전자를 들고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진강은 정효양이 옷으로 입술을 닦으며 자리에 앉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다 운을 뗐다.
“빨리 돌아왔네.”
정효양은 진강을 바라보다, 왠지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그를 보고 금세 심각하게 물었다.
“강 소왕야,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마마 상태가 또 안 좋아지신 겁니까?”
“그리 좋진 않아.”
“좋은 약재라면 여기 한가득 있으니 마음껏 쓰십시오.”
선심 쓰듯 팔을 휘젓는 정효양을 보고, 진강이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래도 벌써 쓰고 있다. 효양 네 약고는 이제 앞으로 내 것이다.”
정효양은 바로 눈을 부릅떴다.
“와…… 낯이 어찌 저리도 두꺼우신지…….”
“황궁에도 없는 좋은 약재들이 전부 네 약고에 있는데 어떡하나. 체면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정효양이 콧방귀를 뀌었다.
“예, 약고야 얼마든 써도 좋습니다만 제게도 그만한 보상은 해주셔야지요.”
“이번에 세운 공이면 황상께서 반드시 널 중용해주실 거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예? 어찌 폐하께서 주시는 것과 강 소왕야께서 주시는 걸 하나로 칠 수 있단 말입니까? 천하에 진강 소왕야께서 약조하신 일은 세상이 뒤틀려도 절대 어길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답니까?
형양 정씨는 이제 서산에 저무는 석양이 됐지만, 곧 머지않아 다시 떠오르게 할 것입니다. 그날을 위해 수십 년을 기다릴 순 없습니다. 그걸 폐하께만 기댄다면 어찌 단기간에 이뤄낼 수 있겠습니까?
제 한평생 몇십 년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형양 정씨를 황성 귀족 가문으로 성장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단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전 그냥 일반 귀족도 아닌 황성 중심에 우뚝 선 가문을 꿈꿉니다.”
“뭐, 가문이라도 하나 세워달란 말인가?”
진강의 물음에 정효양이 다리를 꼬며 말했다.
“역시! 우리 강 소왕야는 너무도 똑똑하시단 말입니다. 저도 형양 정씨 가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으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황성엔 형양 정씨가 비집고 들어설 공간이 없지요.
폐하께서 제게 관저를 내주신다고 해도 기껏해야 중용을 무기로 삼을 수 있을 뿐이지, 마음에 들려면 어디까지나 좀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냥 소왕야께서 제게 집 한 채 내주시는 것만 못하지요. 뭐, 엄청난 걸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충용후부나 영친왕부 근처에 지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진강이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어딜 봐서 엄청난 게 아니란 거지? 충용후부, 영친왕부는 도성 핵심지에 있고 주변에도 세가들이 즐비한데 네게 내줄 자리가 어디 있다고?”
“아, 어렵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이리 부탁드리는 것 아닙니까! 천하를 뒤져도 얻기 힘든 진기한 약재들을 갖춘 약고가 집 하나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진강은 조용히 탁자를 두드리며 답했다.
“효양, 이제 도성에 가면 넌 더 이상 형양 정씨라 칭해선 안 된다.”
정효양이 눈썹을 들썩였다.
“예, 모든 걸 갈아엎고 죽을 고비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니 당연히 이름도 바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형양 정씨 역사를 다시 쓰고 도성 가문과 떳떳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어 한단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효양 네가 아무리 뒤에서 공을 들여도 사람들은 네 생각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어.
네 손으로 직접 형양 정씨를 무너뜨린 것이라 해도 구설수에 오르겠지. 넌 지금 그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뒤에서 열심히 공을 세운다고 한들 공개적으로 네게 그 수고에 대한 보상을 줄 수는 없다.
충용후부, 영친왕부 근처에 집을 세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황명을 받고 떳떳한 절차를 밟아야만 도성에서도 더 당당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거지. 금연과 혼인할 생각 아닌가?”
“네.”
“그럼 간단해지네. 이렇게 된 이상 형양 정씨가 매국 행각을 벌여왔던 건 묻어두고 그저 북제가 남진에서 화를 일으켰고 절명 이가가 형양 정씨를 해친 것으로 만들면 되겠군. 절명 이가에게 모든 죄를 다 뒤집어씌우는 거지. 어차피 다 죽어서 반기를 들 사람도 없으니까.”
정효양이 진강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형양 정씨가 커갈 수 있는 데에 영향을 끼칠 일도 없으니 저야 아주 좋습니다.”
“황상도 형양 정씨가 이렇게 무너진 걸 안타깝게 생각하실 거다. 거기다 금연이 오래도록 황상을 사랑했단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 황상은 금연을 사랑하진 않지만, 효양 너와의 혼인에 분명 후한 선물을 내려주실 거다. 그 명분으로 황상께서 혼인 전 너와 금연이 만족할 만한 집을 사해주신다면 누구도 뒷말을 꺼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체면 문제야 뭐 어려울 것도 없지요. 전 명성이든 공로든 남들이 어찌 떠들어대는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별 개의치도 않습니다. 직접 우리 집안 정탐꾼들을 없앤 것도 그다지 명예로운 일은 아니니 저도 원치 않아요. 그냥 영친왕부, 충용후부 근처에 집을 지을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습니다.”
진강이 말했다.
“신구세대가 교체되는 시기라 누구든 조정을 떠나 귀향하실 거다.”
“영친왕부, 충용후부 근처엔 아무도 사직한 자가 없다고 들었는데요?”
“네가 원하는 것이라니 그 문제는 신경 쓸 것 없다.”
정효양은 크게 기뻐하며 진강에게 깍듯이 공수를 올렸다.
“예, 그럼 이대로 소왕야 뜻에 따르겠습니다.”
진강은 곧 소등자를 찾았다.
“소등자, 이 잔을 깨끗이 씻고 차도 한 주전자 더 내오거라.”
“예, 소왕야.”
소등자가 물러나고, 정효양은 금세 불쾌한 티를 냈다. 자신이 입 좀 댔다고 주전자와 잔까지 깨끗이 씻어오라니……. 하지만 황성에 기품 있는 가문을 세울 수만 있다면 이 정도 무시는 얼마든 감당할 수 있었다.
머지않아 소등자가 새 차를 내오자, 진강이 차를 한잔 마시고 물었다.
“효양, 돌아올 즈음 거긴 상황이 어땠나?”
“청운관 말입니까?”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수라장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노후 한번 편히 즐기시지 못하다 그리 돌아가셨으니 왕 장군님도 참 안타깝습니다.”
“그 봉양성 동은사로 오라던 서신을 보낸 이가 죽었다는 것 외엔 뭐 또 다른 단서는 없었고?”
정효양은 천천히 차 한 잔을 마시곤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서신을 보냈던 이 외에 스님 두 명이 더 있었습니다. 한 방에서 세 명이 함께 살해된 것 같았어요. 또 벽에는 흘려 쓴 글씨 하나도 있었습니다.”
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글?”
“그 자리에서 베껴 온 겁니다. 한번 살펴보세요.”
정효양이 품에서 손수건 하나를 꺼내 진강에게 건넸다.
「방화에게 난 잘 있다고 전해주시오.」
이내 말이 없어진 진강을 보고, 정효양이 물었다.
“사운란 공자의 필체입니까?”
진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응, 확실해.”
정효양은 이내 탄식을 했다.
“세 사람 모두 사운란 공자가 죽인 것 같았습니다. 몸에 아무런 상흔도 남지 않은 걸 보니 매술로 사람을 죽인 건가 싶기도 하고……. 근데 어째서 제가 오기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글만 남긴 채 가버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뭐 어쨌든 무사하다니 다행이군. 방화가 걱정을 덜 수 있으니.”
정효양이 입술을 삐죽였다.
“아이고, 정이고 사랑이고 하나면 됐지, 넘치면 전부 빚입니다. 전 다행히 심신이 바르고 청렴해 그런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어 좋군요. 저도, 금연 군주도 서로 외엔 누구도 없고 전 제 부인에게만 잘하면 되니 이 얼마나 좋은 인연입니까.”
진강은 정효양을 힐끗 훑고는 손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틀만 쉬고 집으로 돌아가 시신 좀 수습해. 더 놔뒀다간 썩은 내가 진동할 거다. 하는 김에 절명 이가 시신도 같이 수습하고.”
진강은 그렇게 자신의 뜰로 향했다.
* * *
진강이 떠나자, 정효양은 차를 마시며 침상 위의 이목청을 바라보았다.
이목청은 그간 안색이 돌아와 전만큼 창백하진 않았지만,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은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효양이 문득 소등자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정말 이목청 대인이라고? 어찌 백발이 자란 것인가?”
소등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소왕비마마께서 돌아가셨단 소식에 이 대인께선 하루종일 절명 장치 아래를 파셨습니다. 파면 팔수록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모습이 변하시더니, 하룻밤 사이 백발이 자라나셨습니다.”
정효양이 탄식했다.
“정이 어찌 저리 깊을까, 참 대단하네.”
“예, 효양 공자님 말씀이 맞습니다. 소왕비마마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시던지, 소인은 더 이상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꼼짝도 하지 못할 동안 대인께선 손이 피투성이가 되셨는데도 그렇게나 깊이 파셨지 뭡니까.”
“하나 있는 누이동생마저 그리됐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본래 내 형수님이 될 뻔하기도 했었는데 말이지. 그렇게 참혹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그런 결말은 맞지 않았을 것을…….”
소등자가 살짝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자님은 행운아십니다. 금연 군주님은 아주 좋으신 분이니까요.”
“당연하지! 이 대인을 잘 돌봐드려라. 난 또 집에 돌아가 처리할 게 있으니. 간 김에 얼마나 큰 구덩이를 파놓았는지도 한번 보고 와야겠네.”
소등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정효양은 곧장 형양 정씨부로 향했다.
* * *
정효양은 진강이 준 영패가 있어 형양성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백성들도 곧 정효양이 사람들을 이끌고 성에 들어와 형양 정씨부로 가는 것을 보고 눈이 다 휘둥그레졌다.
기방에 들어 대장공주의 분노를 사고, 진옥이 지하 감옥에 가뒀다던 정효양이 어찌 형양성으로 돌아온 것일까? 진옥이 풀어준 건가? 아니면 형양 정씨에 큰일이 벌어졌단 걸 듣고 다급히 돌아온 것일까?
백성들은 절명 이가가 적과 내통했다는 죄명으로 황명에 따라 멸족됐다는 것에, 그동안 절명 이가와 가깝게 지내던 형양 정씨 또한 한 패였기 때문에 죽음을 맞은 것이라 생각했다. 사방화, 이목청이 형양성에 온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효양의 등장에 얘기는 또 달라졌다. 형양 정씨가 실로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다면 왜 절명 이가처럼 가문이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이게 사실이라면 정효양도 분명 이 일과 관련돼 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백성들은 또다시 분분히 여러 추측을 꺼내놓았다.
반면, 정효양은 남들이 무어라 떠들어대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형양 정씨부에 다다랐다. 분명 그날 이곳 초목들이 어떻게 메말라갔는지 두 눈으로 직접 지켜봤지만, 다시 봐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곧 객실로 가 흙더미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깊은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절로 탄식이 터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을 떠올리자 이목청이 장치를 파헤친 것이 꽤 통쾌하게 느껴졌다. 또 사람을 해치는 장치를 만들어낸 절명 이가가 멸족한 것도 전혀 과하지 않은 처사라 느꼈다.
다만 늘 온화한 군자였던 이목청이 절명 이가 사람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는 것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정효양은 사람들을 이끌고 시신을 수습하라 명했다. 다 같은 집안사람들인지라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가문 전체가 멸한 절명 이가의 결말보다는 더없이 나은 결과라 생각했다.
정효양은 자신이 진강과 손을 잡지 않았어도, 진강은 충분히 형양 정씨 정탐꾼들을 모조리 없앨 능력이 있음을 잘 알았다. 결국 시간문제일 뿐, 정탐꾼들은 이 나라에 완전히 사라질 운명이었다. 정효양은 그 결말에서 형양 정씨 노약자들을 보호하고 뿌리를 지키고자 엄청난 힘을 다 쏟아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