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1화. 단서를 없애다
정효양 별장은 형양성에서 멀지 않아 반 시진 만에 도착했다.
형양성은 이미 며칠간 봉쇄돼 있어 영패가 없이는 통행이 불가능했다.
거리엔 그 어떤 이도 보이지 않았지만, 형양성 문이 열리자 삼삼오오 모인 백성들이 보였다. 다들 사방화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저마다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사방화가 살아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이틀 전 형양성 안팎을 무겁게 짓누르던 어두운 공기도 완전히 다 걷히고 한결 더 반짝이는 생기를 되찾았다.
누군가는 조 사야가 사방화를 해쳤지만, 선행을 베풀고 덕을 쌓은 사방화는 하늘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단 이야기를 꺼냈다.
또 누군가는 형양 정씨가 절명 이가처럼 북제와 결탁해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기에 지금 이 사달이 난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형양 정씨는 절명 이가처럼 가문이 무너진 건 아니나, 현재 도성에 있는 정일, 정성, 정효순을 제외하곤 출세한 자손들이 죽을 만큼 죽었으니 그만한 업보를 받은 거라 말했다.
그렇게 분분한 백성들의 목소리를 넘어, 사방화와 진강이 탄 마차는 형양성을 거쳐 곧장 형양 정씨 부랑으로 향했다.
갑작스레 들어선 마차 한 대에 백성들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지만, 마차는 표식 하나 없이, 휘장도 굳게 내린 채 멀어져갔다.
* * *
곧이어 형양 정씨부에 다다랐다.
소등자는 얼른 휘장을 걷어줬고, 진강은 먼저 내려 사방화를 부축해줬다.
형양 정씨부는 사방화, 진강, 정효양이 절명 장치에서 탈출했던 그 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 메말라 버린 초목,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날에도 이곳은 온기 하나 없이 싸늘한 기운만 감돌았다.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꼭 잡고 객실로 향했다. 정원 객실에 마련돼 있던 빈소와 관들도 이미 다른 곳으로 다 옮겨진 듯했다.
마침 소등자도 두 사람의 뒤를 따르며 설명했다.
“날이 무더운지라 이 대인께서 시신을 잘 보호하기 위해, 관을 모두 형양 정씨 뒤쪽 암실에 옮겨 두라고 명하셨습니다.”
“응.”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이 놓여있던 곳엔 엄청나게 높이 싸인 흙더미가 있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니 흙더미 뒤로 수십 자(尺) 가까이 파인 구덩이가 드러났다.
사방화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깊이 파인 거대한 구덩이만큼 이목청이 느꼈을 고통이 엄청난 크기로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사방화의 죽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으면 이 정도로 깊은 구덩이를 팔 수 있었을까. 이 짙고도 깊은 정과 의리, 그에게 준 상처를 무엇으로 갚는단 말인가.
그때, 진강이 사방화를 감싸 안고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그만 봅시다.”
곧 소등자가 길을 안내했다.
“절명 이가를 가둬둔 곳이 근처에 있습니다.”
절명 이가 사람들을 가둬둔 곳은 문이 없는 나뭇간으로, 수십 명에 달하는 호위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 * *
호위들은 곧 진강과 사방화에게 일제히 예를 갖추었다.
안에는 바닥에 누운 한 사람, 서 있거나 기댄 사람 등등이 보였다.
“이소가 누구냐?”
진강이 물었다.
“저기 누워있는 자입니다.”
“깨워라.”
진강이 안을 힐끗 둘러보며 담담히 말하자, 호위가 즉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절명 이가 사람들은 충격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진강이 허리춤에 찬 옥패는 누가 봐도 그가 아주 존귀한 신분임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사방화는 임안성을 구한 뒤로 세상에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그 진강과 사방화가 멀쩡히 살아있다고? 백성들은 일찍이 사방화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이곳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그 소식을 알 리는 만무했다. 그들은 너무 놀라 한동안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편 호위는 이소를 몇 번이고 흔들었지만,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옆으로 누운 몸을 살짝 돌렸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이소를 보곤 호흡을 확인했지만, 그는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호위가 깜짝 놀라 진강과 사방화에게 말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이소가 죽었습니다.”
“죽었다고?”
“호흡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진강이 다가와 이소의 코 밑에 손을 대보았지만, 그는 정말 숨을 거두었다. 사방화 역시 이소를 이리저리 살펴보곤 진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죽었네요.”
“한시도 빠짐없이 이들을 감시해왔는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절명 이가 장치의 위력을 겪고 혹시 몰라 더 잘 지켜볼 수 있게 사방이 뚫린 이 나뭇간에다 가둬놓은 것이온데…….”
“어젯밤에 혀를 깨물고 죽은 것이다.”
사방화가 이소의 턱을 살짝 당기자 입속엔 이미 굳은 피가 흥건했다.
호위들은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진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절명 이가의 자제들에게 물었다.
“혀를 깨물고 죽었단 걸 알고 있었느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몰랐다고?”
말없이 고개만 열심히 젓는 그들을 보고, 진강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절명 이가가 죄다 말을 못 하는 집안이었나? 모두 다 참수시켜라.”
진강은 무심하게 명령을 내린 뒤, 사방화의 손을 잡고 나왔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호위들이 보검을 빼 들자 안에 있던 이들이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소왕야! 저희를 어찌……, 죽이시려는 겁니까!”
하지만 진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방화와 그곳을 빠져나왔다.
곧 여기저기 절명 이가 사람들의 시신이 널브러지기 시작했고, 사방화는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는 조용한 곳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 많은 호위가 사방에서 감시하고 있었는데도 이소가 혀를 깨물고 죽은 걸 보니 절명 이가가 몰수당했단 소식은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걸 알았다면 가주인 이소가 저렇게 조용히 혀를 깨물고 자살하진 않았을 텐데요.”
진강은 살짝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아마 저렇게 엄하게 감시당하는 와중에도 이소의 귀에 소식이 들어갔을 수도 있소. 절명 이가가 몰수당했으니 저 사람도 죄를 면피하고자 죽은 것 아니겠소? 스스로 죽어줬으니 수고를 덜어줘 고맙다고 해야하나.”
“이러면 일은 더더욱 쉽지 않을 거예요. 호위들이 저렇게 둘러싸고 있는 와중에도 이소의 귀에 소식이 들어간 거라면 전음을 통해 전해진 게 아니겠어요? 최고의 전음은 천리까지 전해질 수 있잖아요.”
“그렇지.”
“진강, 혹시 할 수 있어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천리는 불가능해. 당신은?”
사방화도 고개를 저었다.
“매술을 쓰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해본 적은 없어요.”
“형양성 300리는 이미 숙청됐으니 누군가 또 사건을 일으킨다면 그건 300리 밖에서 이뤄지는 것이오. 전음을 천 리까지 전할 수 있는 자가 극히 드물다면 매족인도 있잖소. 매족 사람에게 수백 리 정도는 가능할지 모르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이소가 혀를 깨물고 자살한 건 여기서 단서를 없애기 위해서였네요.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기에, 전음을 들은 이소가 절명 이가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혀를 깨물고 자살해버린 걸까요? 단서를 없애서 우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찾지 못하게 만들 생각일까요?”
“사람은 죽었지만, 영 알아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오.”
“이소가 죽었단 걸 알고 나머지 자제들도 모두 죽여버렸으니 더 이상 이 일을 캐지 않겠다는 착각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린 암암리에 계속해서 찾으면 어떨까요?”
진강은 미소를 지으며 사방화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우리 소왕비마마께선 어쩜 이렇게 똑똑하십니까.”
사방화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째려보았다.
“대낮에 이게 무슨 짓이에요?”
진강은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며 태연히 눈을 깜빡였다.
“어? 이 정도도 안 되는 건가?”
사방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때, 진강이 홀연 사방화의 손을 잡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남진은 제대로 된 숙청을 하지 못해 하루도 안온한 날이 없었소.”
언젠가 남진에도 말끔한 숙청이 이뤄진다면 평화가 도래할 것이다.
남진이 300년간 번영의 역사를 이어온 데는 진씨 황실뿐 아니라, 사씨 자손들의 충심도 든든한 한몫을 하고 있었다. 황위는 진씨 황가가 차지하고 있지만, 사씨 가문 또한 이 강산의 절반을 지니고 있었다.
그 진씨와 사씨 자손이 멸족하지 않는 한, 이 강산은 절대 무너질 수 없었다. 사방화, 진강은 말없이 굳건한 뜻을 나누며 마차에 올랐다.
* * *
성 밖으로 나서자 사방화가 무사하다는 소식 외에도 형양 정씨가 이 지경이 돼 버렸으니 앞으로 누가 이 형양성을 관리하게 될 것이냐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화는 마차 안에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진강, 앞으로 형양성을 어떻게 할지 폐하께 서신을 보내셨나요?”
“어제 보냈으니 지금쯤 받았을 것이오. 곧장 답신을 준다면 오늘 밤엔 받을 수 있을 거야.”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양 정씨와 절명 이가는 모두 처리했는데 그럼 황성에 남은 정효순과 정 어르신, 정 대인은 어떻게 될까요?”
“형양 정씨의 모든 정탐꾼과 절명 이가를 색출해낼 수 있었던 데는 효양의 공이 컸소. 저 사람들은 다 효양의 친아버지고, 친형님이잖소. 진옥도 효양 체면을 봐서라도 죽이진 않을 것이오. 분명 어디다 가둬두었다가 효양이 돌아오면 다시 처리하겠지.”
“네, 효양 공자 역시 형양 정씨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친가족만은 꼭 지키고 싶을 거예요. 실은 효양 공자도 마음이 많이 약하잖아요. 아버지와 형님이 이참에 생각을 바꿔 자신의 호의를 저버리지 않길 바라고 있을 거예요.”
진강은 홀연 사방화를 바라보다 볼을 톡, 건드렸다.
“방화, 대체 걱정을 달고 사는 이 모진 습관은 언제 고쳐지는 것이오?”
사방화는 살짝 한숨 같은 웃음을 지으며 진강의 어깨에 기댔다.
“진강, 목청 공자가 깨어나면 우리 막북으로 가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오라버니가 보고 싶어요.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조부님과 외숙부님도 보고 싶어요.”
진강은 살짝 고개를 돌려 사방화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 누구도 조부님을 찾을 수 없으니 숨겨두길 잘했소.”
“조부님께선 한평생 마음 편히 지내셨던 적이 없어요. 더 이상 양국 사이에 끼어 고생시켜 드리고 싶지도 않고요. 사씨와 충용후부를 세상 중심에서 숨기려 한 건 무명산에서 돌아올 때부터 생각했던 거예요. 조부님을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보내 편안히 쉬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배후자가 이 정도로 치밀한 계획을 세워 황실과 사씨를 또다시 전생의 결말로 만들려 했단 건 몰랐네요. 전 사씨를 지키겠단 마음뿐이라 황실에서 과하게 나올 시 판을 뒤집어버리면 끝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냥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생각한 거죠.”
진강은 부드럽게 사방화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기는. 이 천하엔 당신을 능가하는 인물은 찾아볼 수도 없소. 황실과 사씨가 화해해 힘을 합쳐 적에게 대항하도록 하고 남진 강산의 위태로운 정세를 뒤엎어 북제와 같은 자리에서 맞설 수 있는 사기까지 북돋아 줬잖아. 당신 고모님도 하지 못하셨을 일이오. 지금껏 북제 황후 자리만 지키고 계시잖소.”
사방화가 진강의 팔을 톡, 쳤다.
“하여간 당신도 참. 고모님은 지금껏 저와 오라버니가 무사히 자라 사씨를 거머쥘 수 있을 때까지 남진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신 일등 공신이세요. 그동안 홀로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보통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제가 어찌 고모님과 비교당할 수 있단 말이에요? 감히 그럴 감도 아니고, 전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당신도, 폐하께서도 해야 할 일을 하시는 것뿐이죠.”
진강은 웃으며 사방화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1,100년 후세에도 당신 이름은 천고에 전해질 것이오. 사관이 그간 해왔던 모든 일을 기록하겠지. 내가 당신을 칭찬한 것보다 더 많을 수도 있소.”
사방화가 픽, 웃음을 지었다.
“홍안화수로 이름이 남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어떤 사관이 감히 그리 적나 두고 볼 것이오.”
“효양 공자라면 가능하죠.”
“진옥이 어찌 효양에게 달랑 사관 하나만 시키겠소?”
“맞는 말이네요.”
“효양이 외엔 누구도 감히 그럴 수 없소.”
사방화는 점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진강, 무슨 1,100년 후의 일까지 생각하세요? 홍안화수로 기록돼도 어때요. 그땐 이미 전 한 줌 재가 되어 알 수도 없을 텐데요.”
“멍청한 사관은 식견이 천박해 표면만을 볼 것이고 지혜로운 사관은 당연히 이 강산의 배후가 당신과 관련이 있다는 걸 꿰뚫어 볼 것이오. 그래. 이런 걸 신경 써서 뭘 해. 여태 후기에 남은 이야기들은 전부 헛소리일 뿐이지. 당신과 내가 한평생 함께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역사요.”
사방화도 풋,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