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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9화 (889/978)

889화. 뼈에 사무치는 사랑 (2)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 어느덧 날이 밝아왔다. 

사방화는 힘이 다 빠져 나른한 솜처럼 늘어졌고 진강을 살짝 밀어냈다.

“진강……, 적당히 한다고 했으면서…….”

진강은 사방화의 얼굴을 어루만지다 더 이상은 그녀가 버티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입술을 꾹 물곤 손을 잡고 곁에 누웠다.

“내 탓만 해선 안 되지……. 당신을 보고……, 내가 어찌 참소…….”

사방화는 이제 말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진강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살포시 입을 맞추곤 애틋하게 말했다.

“방화, 더 이상 안 할 테니 힘들면 어서 주무시오.”

“당신은요?”

사방화는 눈을 감은 채 힘겹게 말했다. 

“나도 잘 것이오.”

사방화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를 만지면 온몸이 누그러지듯 녹아내리는데 어찌 그에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가 멈추지 못했다고 한들, 마냥 진강의 탓만 할 순 없었다.

진강은 지친 두 눈에 새벽빛 아래 빛나는 사방화를 소중히 담았다. 꼼짝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사방화도 그새 지쳐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애초에 사방화가 전심전력을 다해 진강을 구하고, 모든 심혈을 넘겨주고, 챙겨온 약을 모조리 넘기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몸이 약해질 일은 없었다. 

진강에게 행복이란 오직 사방화와의 혼인뿐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외려 혼인 후에 찾아든 것 같았다. 일심동체가 되어 생사까지 함께할 운명이 되고 나니,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진정한 행복이란 실감이 났다. 사방화, 진강의 사랑은 이미 뼛속 깊이 새겨져 되돌아갈 길도 없었다.

사방화는 사운란의 소식에도 곧장 봉양성으로 향하지 않고 일단 침착하게 이곳에서 진강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일전에 진강이 사운란에게 느꼈던 질투와 묵은 감정이 있다면 이미 다 지난 날로 사라져버린지 오래였다.

진강은 한참 잠든 사방화를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집사가 문밖에서 조심스레 아뢰었다.

“강 소왕야.”

진강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이목청 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소왕비마마께서 무사하시단 걸 아시곤 오신 것 같습니다만…….”

진강은 사방화를 한번 보곤 답했다.

“우선 쉬도록 자리를 마련해드려라.”

“알겠습니다.”

* * *

별장 입구.

이목청은 하염없이 안쪽만 바라보며 애타는 얼굴로 서 있었다.

형양성에서 이곳까지 오는 그 짧은 순간에도, 사방화가 죽지 않았단 얘기에 길고 오랜 기쁨과 안도감에 휩싸였다.

불 꺼진 세상에 따뜻한 햇볕이 찾아든 느낌이었다. 저 멀리 달아나버린 살아갈 의미가 다시금 이목청의 마음에 부리나케 되돌아왔다. 

어떻게 그 장치에서 빠져나온 걸까? 게다가 무슨 수로 절명 이가를 한 손에 넣은 거지? 어찌 자신에게까지 숨겨가며 죽음을 가장해, 그토록 비통한 마음에 젖도록 만들었나.

사방화를 찾기 위해 미친 듯 파헤친 바닥은 무려 수십 자(尺)에 달했으나, 이목청이 받은 상처의 깊이는 그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사실 지금도 사방화가 죽지 않았다는 걸 믿을 수 없어, 꼭 직접 두 눈으로 사방화를 봐야만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집사가 뛰어와 이목청에게 공수를 올렸다.

“이 대인, 소왕야께서 우선 쉴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드리라 하셨습니다.”

이목청은 정신을 가다듬고 집사에게 물었다.

“소왕야라 했나? 소왕비마마가 아니라?”

“예, 진강 소왕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소왕비마마는 어디 계시지?”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선 지금 한 방에 계십니다.”

집사도 이목청의 명성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무려 황제 진옥에게 중용돼 승상사직에 오른 그는 머지않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인재였다. 최고의 자리에 있어도 늘 모두에게 온화하고 다정해서 꼭 그를 보고 있으면 봄바람이 부는 듯 아름다운 공자란 칭송이 따랐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이목청은 영패가 아니었다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 명성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소왕야와 함께 계신 거였군. 그럼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마음 놓…….”

안 그래도 추운 겨울 메마른 가지같이 위태로워 보이던 이목청은 그 자리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집사는 깜짝 놀라 서둘러 그를 부축했지만, 이목청은 이미 혼절한 뒤였다.

“이 대인!”

집사는 서둘러 이목청과 함께 온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형양성에 온 이후로 대인께선 쉼 없이 달려오셨습니다. 그러다 절명 이가에 다다라 소왕비마마께서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고 다시 형양성으로 달려가셨습니다. 그 후로 계속 절명 장치만 파헤치셨지요. 조금 전 소왕비마마께서 살아계신다는 소식에 간신히 잡고 계시던 정신력도 끊어지신 듯합니다.”

집사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선 이 대인을 안으로 모시어 의원을 불러야겠습니다.”

사람들도 얼른 이목청을 데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이목청을 안전히 눕히고 의원을 불러 그를 진맥하게 했다.

“이 대인께선 화병으로 심신이 망가지시고 과로한 탓에 신장도 그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혼절한 것입니다.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마음의 고질병으로 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집사가 놀라 말했다.

“이렇게 젊고 창창하신 분에게 고질병이 생긴다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있는지요?”

의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신의가 계신다면 아마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이 늙은이의 의술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집사가 말했다.

“소왕비마마의 의술이 아주 뛰어나시다 들었는데 이 대인을 살펴보시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예, 어서 소왕비마마께 약 처방을 내달라 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의원의 말에 집사도 입술을 꽉 깨물고 말했다.

“예, 소왕비마마께 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 *

집사는 서둘러 진강과 사방화가 머무는 뜰로 향했다. 

시화, 시묵은 자정 무렵 진강이 돌아온 뒤로 마음 편히 쉬었던 덕에 일찌감치 깨어 있었다. 그러다 집사가 찾아오자 먼저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시화가 집사를 가로막고 물었다.

“집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집사는 두 사람이 사방화가 믿고 맡기는 이들임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이목청의 상태를 알렸다.

두 사람은 곧장 깜짝 놀라 말했다.

“본래 이 대인께 이 사실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미안해하셨지만, 큰일을 위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참으셨습니다. 이 대인께서 지금 여기 계신다니 마마께서도 곧장 나오실 겁니다. 바로 모셔오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시화가 문 앞에서 조심스레 아뢰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사방화는 곤히 잠들어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대신 잠에서 깨어 있던 진강이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이냐?”

시화가 이목청의 상황을 설명하자 진강은 곧바로 눈을 떠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한번 보곤 말했다.

“그래, 지금 바로 나가마.”

진강은 곧바로 살짝 사방화를 흔들어 깨웠다.

“방화, 일어나 보시오.”

사방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조금 더 흔들어보던 진강은 사방화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며, 그녀의 몸 곳곳에 입맞춤을 했다.

사방화는 결국 졸음이 한가득 쏟아지는 눈을 떠 진강을 흘겨보았다.

“당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아직도 만족 못 한 거예요?”

“이번엔 정말 당신을 깨우려고 그런 것이오. 목청이 당신이 살아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쓰러졌다고 하오. 의원이 말하길 생명엔 지장이 없다만 어서 신의에게 진찰받지 않으면 고질병이 될 수도 있다고 하는군. 지금 의원의 의술로는 방법이 없어 당신이 가줘야 한다고 했소.”

사방화는 순간 잠이 싹, 달아나버렸다.

“네, 지금 바로 가봐야겠어요.”

“응, 같이 갑시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옷을 입으려 팔을 뻗었지만,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자 진강을 탓했다.

“전부 당신 탓이에요!”

“그래, 그래. 다 내 탓이오. 내가 해줄게.”

진강은 정성껏 사방화를 수발했다.

사방화는 옷을 입혀주는 진강을 노려보다가도 다시 눈빛이 암담해졌다.

앞날이 창창한 이목청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에 너무도 미안했다. 아무렴 큰일을 위해서였다지만, 그를 뒷전에다 둔 것은 옳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미안한 마음은 파도처럼 커져 자꾸만 사방화의 기분을 삼키고 들었다.

진강도 사방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용하게 말했다. 

“나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소. 최대한 치료해 본 뒤에 만일 고질병이 된다면 당신과 내가 책임집시다.”

“어떻게 책임을 져요? 마음의 병이 한번 자리를 잡으면 감정에 기복이 있을 때마다 한평생 통증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고요. 목청 공자에겐 숨기지 말았어야 했어요.”

“우선 살펴보고 얘기합시다. 만약 목청에게 숨기지 않았더라면 배후자들을 속일 수도 없었을 것이오. 그 덕에 내가 절명 이가를 손에 넣고 형양성 방원 300리 내의 모든 소식통을 찾아낼 수 있었잖소. 남진 강산을 위해 큰 공을 세운 셈이나 마찬가지지.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다면 여러 방법을 찾아봅시다. 좋은 배필도 찾아보고, 진옥에게도 최고로 큰 보상을 해주라고 하고.”

“만약에라도 고질병이 된다면 한평생을 지고 가야 하는 일이니 그 어떤 것으로 보상한다고 하더라도 그 무게는 메울 수 없어요.”

이목청의 마음은 태산보다도 무거워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진강은 곧 사방화에게 옷을 다 입혀주곤 침상을 내려와 눈썹을 치켜떴다.

“어쨌든 당신을 양보해 줄 순 없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방화가 그를 노려보았다.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조급하게 굴지도 말고 나쁜 쪽으로도 생각하지 맙시다. 당신 의술이라면 설사 고질병이 된다고 하더라도 약으로 한평생 그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해줄 수 있을 것이오.”

“맞아요, 어서 가봐요.”

두 사람이 방을 나오자, 집사가 즉각 앞장섰다.

“우선 이 대인을 가까운 난취원(兰翠园)에 모셔다드렸습니다.”

“심각해 보였어?”

사방화는 직접 보기도 전이었지만, 이목청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그토록 치밀한 배후자도, 형양성 백성들까지 모두가 사실이라 믿었으니 이목청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던 건지 더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영패를 지니고 계시지 않으셨다면 소인도 알아보지 못할뻔했습니다.”

집사의 말에 사방화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 * *

잠시 후, 두 사람은 이목청이 머무는 뜰에 다다랐다.

진강과 사방화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지금 혼절해 침상에 누워있는 저 사람이 이목청이라고? 옥처럼 아름답고, 상냥하고, 온유하고, 늘 모든 이에게 봄날처럼 따뜻했던 그 이목청……?

이목청은 이미 앞쪽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 백발이 돼 있었다.

사방화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눈시울만 붉게 젖어 들었다. 앞으로 가 보고 싶었지만 온몸이 굳어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진강도 온 세상이 내려앉은 듯 참담한 눈빛으로 입술만 깨물었다.

조금 뒤, 사방화는 결국 진강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방화, 시기를 놓치기 전에 어서 살펴봐주시오.”

진강이 부드럽게 사방화를 토닥이며 말했다.

사방화는 입술을 꼭 깨물고 침상으로 다가갔다. 

진강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고, 사방화는 떨리는 손으로 이목청의 맥을 짚어보았다.

양쪽 손을 다 짚어본 사방화는 한참 후에야 손을 내려놓고 말했다.

“고질병이 되지 않게 할 순 있지만, 백발이 된 머리는 평생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머리카락을 지키려면 마음의 고질병이 돼 버릴 거고요. 약이 상극이라 한 가지만 선택할 수 있어요.”

“백발이 뭐 어떤가, 고질병만 만들지 않으면 되지.”

진강이 다가와 말했다.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럼 어서 약을 내주시오.”

사방화는 약방문을 시화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집사에게 이 약재들이 모두 마련돼 있는지 물어봐. 있다면 네가 직접 약을 달여서 보름 동안 매일 하루 3번 제시간에 약을 챙겨 먹는지 살펴봐 주고. 부족한 약재가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서둘러 마련해야만 한다.”

시화가 약방문을 받아들곤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소왕야께서 계시니 저희도 마마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이 대인을 잘 보살펴 절대 고질병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시화는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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