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8화. 뼈에 사무치는 사랑 (1)
사방화는 창밖 저 멀리 어둠이 져가는 걸 바라보며 말했다.
“진강과 약속했어. 이제 진강이 있는 곳 어디든 함께하겠다고. 여기서 기다릴 거라고 했으니 아무 데도 안 가고 여기서 기다릴 거야. 운란 오라버니는 나와 혈맥이 이어져 있어. 오라버니가 죽으면 나한테도 좋진 않겠지.
하지만 이건 내가 진강과 혼인하기 전부터 결정한 일이야. 난 죽음을 각오하고 진강을 택한 거야. 운란 오라버니에게 미안해도 어쩔 수 없어. 진강과 함께 오라버니를 따라 죽었으면 죽었지, 봉양성엔 가지 않아.”
사방화의 가녀린 그림자 뒤로 짙은 먹구름이 떠가는 듯했다.
시화는 두 사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지만, 분노를 감출 순 없었다.
“소왕야와 효양 공자님께서 형양성 300리 안으로는 소식통을 모두 끊어놓으셨는데 마마께서 살아계신다는 건 또 어찌 안 걸까요? 여기까지 찾아와 또 수를 쓰려고 하다니, 대체 이 악랄한 놈이 누구란 말입니까!”
사방화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이 서신은 진강이 절명 이가를 손에 넣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 온 걸 거야. 처음부터 내가 죽지 않았단 걸 알고 있던 게 아니라 그때야 안 거지. 그럼 이 옥패는 일찌감치 누군가 손에 쥐고 있었던 게 분명해.”
시묵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운란 공자님께서 이 자의 손에 붙들린 것이 아니니 무사하실 수도 있단 말씀이십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자에게 붙잡혀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분명한 건 줄곧 형양성 주변 방원 내에 있다가 절명 이가가 진강 손에 들어갔단 소식을 듣고 운란 오라버니 옥패로 날 유인했다는 거야. 이 단시간에 봉양성과 소식을 주고받을 순 없어. 굳이 가능성 있는 걸 꼽자면 즉시 봉양성에 있는 이에게 연락해 자시 전까지 내가 함정에 빠지게 준비해두라 시키는 것밖엔 없어.”
시화가 말했다.
“마마, 300리 내론 소식통을 모두 끊어놓았잖습니까. 절명 이가는 남동쪽에 있고 봉양성은 북서쪽에 있으니 모두 형양성 300리 내에 포함되는 곳입니다. 설마 마마께서 가지 않으시더라도 장악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곤 집사에게 말했다.
“응, 맞아. 집사, 이 서신을 효양 공자에게 전해 처리할 수 있게 해줘.”
“예, 최대한 빨리 전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소왕비마마.”
집사는 서둘러 밖으로 떠났다.
잠시 후, 집사가 서신을 전했다고 알렸고, 반 시진 뒤에는 정효양의 답신이 전해졌다. 방원 300리 내에선 하늘을 날든, 땅을 기던, 물살을 가르던, 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알아서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서신이었다.
사방화는 정효양의 답신에 풋, 웃음을 지으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만약 매족인이 매술을 쓴다면 단번에 그 종적과 신분이 드러날 테니 곧장 뒤를 밟아 찾아낼 수 있을 테고, 매족인이 아니라면 아무리 뛰어난 무공 고수일지라도 정효양을 능가하진 못할 테니 그의 말은 결코 과장도 아니었다.
사방화는 이런 때일수록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진강을 걱정시키지 않는 게 최상의 선택이란 생각을 했다.
집사가 물러나자 시화, 시묵은 사방화 곁을 지키며 혹시나 그녀가 울적 해할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말동무가 돼주었다.
* * *
어느덧 한밤이 됐지만, 여태 아무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시화, 시묵은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사실상 잠든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반면 오전에 충분히 잤던 사방화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사방화는 잠시 시화, 시묵을 바라보다 안쓰러운 듯 말했다.
“시화, 시묵. 이제 들어가서 자.”
그제야 두 사람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 상태로 날 어떻게 돌보겠단 거야? 어서 말 듣지 않으면 앞으로 안 데리고 다닐 거야?”
“마마, 저희는 참을 수 있습니다.”
사방화는 한숨을 내쉬다 두 사람을 기절시켜서라도 재워야겠단 생각에 손을 들었다. 그러자 시화, 시묵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멀찍이 물러섰다.
“마마! 뭐 하시는 겁니까?”
사방화는 힘없이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내가 손을 드는 것마저도 너희가 이렇게 단번에 알아채는 걸 보니 내 몸뚱이가 얼마나 쓸모없어졌는지 잘 알겠네.”
시화, 시묵이 얼른 다시 가까이 다가와 위로했다.
“마마, 이러니 저희가 마마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겁니다. 소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물러갈 테니 곁에 있게 해주세요. 지금 이 상태론 쉬는 것도 쉬는 게 아닙니다.”
“알았어.”
시화, 시묵은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이젠 졸음이 싹 달아난 것 같았다.
* * *
또 시간이 지나 자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마침내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세 사람 모두 밖에서 들려오는 집사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소왕야!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사방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치맛자락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화, 시묵도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사방화 뒤를 따랐다.
뜰 밖에서부터 진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왕비는 주무시고 계시느냐?”
집사가 고개를 저었다.
“소왕비마마께선 정오에 일어나시어 지금껏 소왕야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별일 없었고?”
집사는 사방화를 위협했던 서신 이야기를 서둘러 전해주었다.
진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답하곤 안으로 들어섰다.
집사는 곧장 진강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그런데 강 소왕야, 효양 공자님은 어디 계시는 겁니까?”
“다른 일이 있어서 오늘 안엔 돌아오지 못할 거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식사는 하셨습니까? 간단히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좋지.”
진강이 뜰로 들어서는 순간, 막 문턱을 넘은 사방화가 서둘러 달려왔다.
그녀는 서둘러 진강의 상태부터 이리저리 살펴봤다. 진강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사방화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다.
사방화는 진강의 맥까지 짚어본 뒤,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일순간 진강의 심장은 폭발할 듯 요동을 쳤다. 가슴에 폭, 기댄 사방화의 머리칼에선 그녀 특유의 향기가 코끝을 은은하게 간지럽혔다.
“나갔다 돌아오면 이렇게 당신이 달려와 날 안아주는 순간을 꿈꿔왔었소.”
사방화는 진강을 더 세게 껴안아주었다.
“저녁까지 절명 이가에 있다가 쉬지 않고 달려온 거죠? 안 피곤해요?”
“괜찮아.”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일은 다 해결됐어요?”
“기본적으론 다 해결됐소.”
진강은 곧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번쩍 안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방화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진강, 온종일 힘들었으면서 또 절 안고 뭘 하시려고요?”
“그냥, 당신 안고 있는 게 좋아서.”
진강은 사방화의 눈썹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진강 입술의 따뜻한 온기는 사방화의 심장을 뚫고 저 깊은 곳까지 내려가 오래도록 잔잔한 사랑의 울림을 전했다.
* * *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진강은 사방화를 침상에 눕히고 진한 입맞춤을 했다.
사방화는 제 손끝이 닿는 곳마다 그의 피로가 풀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진강의 부드러운 뺨부터 여기저기를 다정히 쓸어주었다.
잠시 후, 진강이 조금 거칠어진 호흡으로 살짝 몸을 일으켰다.
“씻고 오겠소.”
“아직 식사도 안 하셨잖아요. 먹고 해요.”
진강이 고개를 저었다.
“씻은 다음에 당신 먼저 먹고 밥 먹을 것이오.”
사방화는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 돼요.”
“안 된다고?”
진강이 눈썹을 들썩이자 사방화는 그의 눈썹을 톡, 쓸며 말했다.
“몸이 먼저예요. 당신이 한 말이니 나도, 당신도 끝까지 잘 지켜야죠.”
진강은 픽,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서 일어나세요. 벌써 상을 차려 왔을 거예요. 당신이 들어오라 하지 않으면 계속 저기서 꼼짝없이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에 진강은 일어나 손과 얼굴을 간단히 씻고 탁자에 앉았다.
사방화는 밖을 향해 들어오라 외쳤고, 집사는 하인들을 데리고 식사를 들였다. 탁자에 정갈히 차려지자, 집사가 말했다.
“강 소왕야, 밤이 늦어 간단히 양춘면과 반찬 2개만 준비했습니다. 우선 이렇게 가볍게만 드시지요.”
“고맙다. 세욕할 물도 좀 준비해다오.”
집사가 떠난 뒤, 사방화는 등불을 켜 턱을 괴고 진강을 가만히 지켜봤다.
“혼자서도 밥 잘 챙겨 먹었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진강이 살짝 흘기며 반찬을 집어주자, 사방화는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후, 집사가 세욕 물을 들여와 병풍 뒤에 놓아주었다.
“소왕야, 다른 분부는 없으십니까?”
“응.”
진강은 음식을 깔끔히 비운 뒤, 일어나 사방화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좀 씻겨주시오.”
사방화는 얼굴을 붉히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씻겨드릴 순 있지만, 멋대로 하시면 안 돼요.”
“왜? 진짜 그러면 안 되나?”
나른히 내려다보는 진강의 시선에, 사방화는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
“안 돼요.”
“내가 안 보고 싶었던 것이오?”
살짝 허리를 감싸는 진강의 손길도, 아름다운 미모도 무척 매혹적이었다.
“보고 싶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안 돼요.”
진강은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사방화도 엷게 웃다가, 발끝을 세우고 진강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푹 쉬고 나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드릴게요. 괜찮죠?”
진강은 마음이 단번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응.”
사방화는 진강의 손을 잡고 병풍 뒤로 들어섰다.
진강은 세욕 통 앞에 서서 사방화가 직접 옷을 벗겨주길 기다렸다가 물속에 들어가 편안히 눈을 감았다.
사방화는 세욕 통 한 편에 서서, 그에게 살짝살짝 물을 끼얹어주며 부드럽게 몸을 어루만졌다.
지금 몸을 녹이고 있는 건 진강이었지만, 사방화는 자신이 치유 받는 느낌이 들었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는 마음까지도 부드럽게 물들이는 듯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사방화가 바란 건 그저 이런 것뿐이었다. 평범한 행복을 그리고, 부부의 화목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집…….
사방화는 진강을 전체적으로 한번 씻겨주곤 그의 어깨를 가볍게 안마해주었다. 곧 고요한 방엔 새근새근, 진강의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 상태로 잠이 든 걸까? 이렇게 고단한데도 진강은 전혀 힘들지 않다고 웃으며 말했었다.
사방화는 자세가 불편할 듯해 진강을 깨우려다, 그냥 그가 깨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안마를 해주었다. 그렇게 어느덧 한 시진이 지나갔다.
* * *
진강이 홀연 잠에서 깨 사방화의 손을 잡고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 몇 시지?”
사방화가 밖을 한번 보곤 말했다.
“사경(*四更: 새벽 1~3시)이 다 됐네요.”
“뭐? 그럼 한 시진 동안 계속 안마하고 있었던 것이오?”
“이대로 자면 목이랑 어깻죽지가 불편할 것 같아서요. 어느새 한 시진이나 지났을 줄은 몰랐네요.”
진강은 물 온도를 확인해 보다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아……, 물만 식지 않았어도 당신을 여기 들이는 건데……. 안 되겠다. 집사한테 물을 새로 갈아오라 해야겠소.”
사방화는 얼른 진강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제가 여기 온 이후로 집사는 온종일 여기를 지키느라 내내 긴장하고 있었어요. 이제 겨우 쉴 수 있게 됐으니 방해하지 말아요. 일어났으니 이제 침상에 가서 쉬어요.”
진강은 세욕 통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충분히 쉬어서 힘이 불끈불끈 솟는데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되오?”
사방화는 얼굴을 붉혔다.
“겨우 한 시진 쉬셨는데요.”
진강이 시무룩하게 입술을 살짝 내밀자, 사방화도 말문이 막혔다.
사방화는 결국 일어나 병풍 입구로 가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당연히 원하는 대로 해드려야죠. 근데 물에서 나오지도 않으시면서 어떻게 원하는 걸 들어드리란 거예요?”
진강은 픽, 웃으며 나와 대충 옷으로 감싸고 방으로 들어섰다.
침상 이불을 정리하는 사방화의 뒷모습은 유난히 더 아름다워 보였다.
진강은 성큼성큼 다가가 사방화를 안고 하얀 목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사방화는 붉어진 얼굴로 겨우 조그만 소리를 냈다.
“아직 이불도 제대로 못 깔았어요…….”
진강은 말없이 그녀를 침상에 눕히고는 휘장을 내렸다.
방은 따뜻한 봄볕에 내리쬐는 꿈처럼 찬란한 환상에 젖어 갔다. 부드럽고 완곡한 곡선, 황홀한 욕망이 영롱한 별빛과 등불처럼 뒤엉키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