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4화. 청천벽력 (1)
진강은 사방화의 눈빛에 또다시 이성을 잃을까 싶어 서둘러 말했다.
“어서 밥 드시오.”
사방화는 엷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불러요. 저 먼저 씻을게요.”
진강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는 발걸음이 꽤 힘겨워 보였지만, 이내 병풍 뒤로 들어갔다. 곧 병풍 뒤에선 바스락거리며 옷 벗는 소리가 들리고, 물소리도 들려왔다.
이제 진강의 모든 신경은 병풍 뒤에만 머물렀다. 그곳엔 두 번의 생을 반복할 정도로 온갖 고통을 견디며 사랑한 자신의 아내가 있었다.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도……, 자신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지난날 사방화는 무명산으로 향하며 위태롭게 버려져 있던 진강을 발견하고 심드렁하게 만두를 던져주고 떠나버렸다.
그때도 진강은 사방화가 과연 지옥 같은 무명산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그녀를 향한 걱정뿐이었다. 만약 이대로 자신이 죽는다면, 남은 사방화의 여생이 어떻게 될지 시름만 차올랐다.
사방화 홀로 충용후부를 지킬 수 있을지, 또 어떤 천하의 행운아가 사방화와 혼인하게 될지, 자신처럼 목숨보다 그녀를 사랑하고 소중히 대할지, 진강은 죽음 앞에서도 사방화에 대한 걱정만 했다.
그러다 진강은 기적적으로 정효양을 만나 목숨을 건진 후,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택했다. 하루하루 사방화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8년이 지나, 사방화는 마침내 남진 황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잃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과 차갑고 황량하게 식어버린 눈빛에 진강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전생의 사방화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한없이 따뜻하고 고운 미소를 가진 소녀였다. 서늘하게 얼어버린 그녀의 마음을 다시 녹여줄 수 있을까. 진강 역시 사실 너무도 두려웠다.
결국 진강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총동원하기로 했다. 전생의 기억이 없는 척, 아무것도 모른 척하며 살면서 한 번도 써본 적 없던 영친왕부 적통 황손이란 권력을 다 쥐어 짜내 사방화 곁에 있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노력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았다. 평생 사방화가 예전 그 온기를 되찾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이 그만큼 더 뜨겁게 태우면 되니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사방화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진강은 무엇이든 견딜 각오가 돼 있었다. 그가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은 오직 사방화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사방화는 결국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진강에게 더없는 사랑을 전해주었다.
이내 진강은 천천히 젓가락을 내려두고 병풍 뒤로 향했다.
* * *
사방화는 세욕통 따뜻한 물에 온몸이 다 녹아내리는 듯해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곧 병풍 너머로 진강의 그윽한 눈빛이 느껴졌다. 그의 눈빛은 금방이라도 이 병풍을 다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진강, 두 번의 생에서 변함없이 사랑했으며, 사랑하고 또 사랑할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방화는 그를 절대 포기할 수도 없고,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는 얼마든 내던질 수 있었다.
분명 운명을 거슬러 사방화를 살려낸 건 진강이었지만, 사방화는 꼭 사랑의 크기만은 반대가 된 것 같단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진강보다 자신이 더 그를 많이 사랑한다는 걸 기쁘게 확신했다.
나라 시국은 긴박하고, 암울하고, 배후자의 악랄한 계략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지만, 행복한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다. 앞으로 살날도 불투명할 만큼 위태로운 목숨줄을 연명하고 있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사랑하는 진강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녀는 언제든 넘치듯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다 사방화는 진강이 천천히 병풍 앞으로 걸어오는 소리를 듣고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심장은 터질 정도로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금 붉게 물든 얼굴은 결코 따뜻한 수증기 때문이 아니었다.
진강은 곧 병풍을 걷으려다 멈칫하며 간신히 마음을 추슬렀다. 이대로 사방화를 마주한다면, 분명 아픈 사방화를 더 지치게 할 것이 뻔했다. 사방화를 원하는 마음은 진강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기에 더욱더 위험했다.
얇은 병풍 너머, 진강의 긴 그림자가 어렴풋이 드리웠다. 끝없이 치솟는 진강의 뜨거운 열정은 사방화의 심장도 한없이 떨리게 했다. 진강은 점점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사랑해주고 싶다는 마음만 더 커졌다.
* * *
시간이 흐르고 모래시계 속 모래도 보슬보슬 비처럼 흘러내렸다.
진강은 병풍 앞에서 반 시진이 넘도록 꼼짝하질 않았다.
결국 사방화도 이젠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얼마나 서 있을 거예요? 조각상이라도 되려고요? 들어오실 거예요?”
진강은 짧은 숨을 내쉬며 병풍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당신 몸도 안 좋으면서 어찌 날 자극하는 것이오.”
사방화는 잠시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전……, 이제 괜찮아요. 당신…….”
“다녀와서 확인할 테니 편히 쉬고 계시오. 난 효양이 그놈이 잘하고 있는지 좀 보고 오겠소.”
진강은 순간 사방화의 말을 끊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사방화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몸은 다시 나른해졌지만, 어이가 없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자신도 참기 힘든데 그렇게 참으면……, 괴롭지 않나? 사방화는 문득 바람 빠진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열정 넘치는 사람이 돼 버린 것일까.
사방화는 그 후로 조금 더 몸을 담그고 있다가 침상으로 향했다.
이젠 진강이 있으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잠에서 깨면 진강은 돌아와 있으려나? 사방화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이내 잠이 들었다.
한편, 진강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문을 지키던 집사에게 분부했다.
“소왕비가 쉬고 있으니 여길 잘 지켜다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겼다간 바로 자네를 문책할 것이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왕야. 안 그래도 효양 공자님께서 특별히 이곳을 지키도록 호위들을 배치해 두셨으니 볼일이 있으시다면 편히 보고 오셔도 됩니다. 여긴 제게 맡기십시오.”
집사의 공손한 답에, 진강도 고개를 끄덕이곤 별장을 빠져나갔다.
시화, 시묵은 진강이 나가는 것을 보자마자 서둘러 사방화가 머무는 방 바깥의 화당을 지키고 섰다. 어젯밤 그녀가 함정에 빠지면서 받았던 충격이 컸던 통에 잠시도 그녀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만약 사방화가 죽는다면 죽음으로도 죄를 갚지 못할 것이고, 사묵함의 가르침에도 배반하는 격이었다.
또 여기가 아무리 정효양의 근거지라 해도 혹시나 일어날 일들에 대해선 장담할 수 없었다. 데리고 왔던 암위들도 모두 다른 곳에 가버린 데다 진강도 자리를 비웠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사방화를 지켜야만 했다.
* * *
다음날, 아침 햇살이 내리쬐고 맑은 하늘이 드리웠다.
형양성 백성들은 눈을 뜨자마자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간밤엔 아무 일도 없었고, 형양성 골목 곳곳 상점들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성 문과 관아를 지키는 이들은 죄다 바뀌어 있었다. 특히 성을 지키는 호위들은 모두 비단 옷차림에 감히 눈 마주치기도 힘들 정도로 엄숙한 얼굴들이었고, 성 밖도 3만 병사가 우직하게 서서 철통같이 자리를 지켰다.
백성들은 이내 성을 지키는 호위들과 같은 이들이 형양성 관아와 형양 정씨부를 봉쇄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영문을 알 순 없었지만, 어젯밤 분명 엄청난 일이 있었으리란 건 누구든 예상할 수 있었다.
다들 공포에 질리기 시작했고, 성은 어둡고 답답한 기운으로 가득해졌다.
그 후로도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지만 정오 무렵, 누군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섬뜩한 소식을 전해왔다. 이는 머지않아 형양성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어제 영친왕부 소왕비 사방화와 승상사직 이목청은 황명을 받아 형양성으로 왔다. 형양성에 벌어진 일들을 철저히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형양 관아 조 사야는 황명을 거역하며 성 문을 열지 않았다. 그에 사방화, 이목청은 형양성 문을 때려 부순 뒤 곧장 관아로 갔다고 한다. 그때, 조 사야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사방화, 이목청은 곧장 관아를 나와 형양 정씨부로 갔지만, 형양 정씨부에 미리 설치된 절명 장치에 그만 사방화가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목청은 격노해 사람들을 이끌고 300리 밖 절명 이가를 찾아갔다. 그러나 머지않아 형양 정씨부 객실이 기괴한 굉음을 내며 초토화됐다고 한다.
소왕비 사방화가……, 사방화가 죽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사방화의 시녀 2명도 자결하고 말았다. 이 소식은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형양성 전체를 뒤덮었고, 모두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형양 정씨에 300년을 이어 내려온 장치가 있단 소식은 형양성 백성들이라면 은연중에 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장치가 결국 사방화를 해할 거라는 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모두가 사방화를 기억했다. 임안성 백성들을 구하려 중상을 감수하면서까지 흑자초를 구해와 수십만의 목숨을 살린 위대한 여인, 남진을 살리는 사씨 가문 적통 아가씨이자, 영친왕부 소왕 진강이 목숨보다 아끼며 사랑하는 소왕비 사방화, 그녀가 어찌 죽을 수 있단 말이지?
모두가 아연실색했지만, 청천벽력같은 소식은 그만큼 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사시(*巳时: 아침 9 ~ 11시)가 됐을 땐 절명 이가 본거지에도 이 소식이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