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3화 (883/978)

883화. 봄처럼 따스한

마차로 온 진강은 앞에 있던 호위에게 휘장을 걷으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마차는 텅 비어있었다.

“방화, 여기 있었던 게 확실하오?”

진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사방화는 깜짝 놀라 호위를 바라보았고 그도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형양 정씨부에 온 뒤로 마차는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어찌 제운설 공주가 사라진 것이지요?”

“계속 누군가 마차를 지키고 있었느냐?”

사방화의 물음에 호위는 순간 머뭇거리며 말했다. 

“객실이 무너지던 순간 소왕비마마께 큰일이 난 줄 알고 모두 달려갔었습니다. 하지만 그 잠깐 자리를 비운 게 다입니다.”

사방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제운설은 내복에 상처를 입고 미란초로 심맥까지 통제당한 상태였어요. 제가 직접 맥을 짚은 거라 그건 확실해요. 설마 누군가 제운설을 살려서 데려간 걸까요?”

“누가 있겠소?”

진강이 물었다.

“조 사야? 설마 아직도 형양성을 빠져나간 게 아닌 것 아닐까요?”

“어쨌든 우린 계획대로 움직일 것이오. 분명 다른 계략이 있을 테니 과연 어디까지 날뛸지 내 친히 지켜봐야겠소.”

“네, 우린 이제 양지에서 음지로 들어가려 하고 있으니 어떤 이들을 끌어낼 수 있는지 잘 지켜봐야겠어요.”

진강은 사방화를 안고 다시 계단으로 가 앉았다.

두 사람 모두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틈틈이 기력을 보충해야만 남은 일도 처리할 수 있었다. 

* * *

대략 반 시진이 지나, 시화와 시묵이 여자 시신 두 구를 가져왔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기 위해 형양 관아 내에서 시신을 찾아왔습니다. 어젯밤 조 사야 방에서 음주 가무를 즐기던 여인 중 저희와 비슷한 두 명을 찾아왔는데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응, 괜찮아. 키와 체격만 비슷하면 내 역용술로 하루 동안 너희인 척 꾸며낼 수 있어. 목청 공자와 소등자 외에 절명 이가 사람들은 너희 얼굴을 모르니 알아보지 못할 거다. 목청 공자와 소등자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고 해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을 테니 눈속임만 하면 돼.”

사방화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는 곧 두 사람에게 역용술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오라 시켜 시화, 시묵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최대한 완벽히 보이기 위해 두 사람도 입고 있던 옷과 보검을 비롯해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꺼내 곁에 두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진강은 모든 호위를 불러 각자 임무를 줬다. 그렇게 호위들을 남기고 진강은 사방화, 시화, 시묵과 함께 형양 정씨부를 나왔다.

넷은 셋째 어른 방에 있던 비밀 통로를 통해 조 사야의 부랑으로 향했다.

* * *

조 사야의 부랑엔 사방화, 이목청이 남겨둔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외엔 바람 소리도 굉음으로 들릴 정도로 무척 고요했다.  

네 사람은 먼저 조 사야가 머물던 방과 서재를 둘러보았다. 

서재는 아주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고, 진강은 내부를 한번 쓱 둘러보고는 사방화에게 말했다.

“방화,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소. 조 사야가 제운설을 데려간 것 같군. 유일하게 남아있는 발자국은 좀 전에 찍힌 것 같소. 약간 젖은 흙이 묻은 데다 금고의 문도 제대로 닫혀 있지 않은 걸 보니 도망쳐 빠져나왔다가 물건을 가지러 다녀간 것 같아.”

“물건을 가지고 다시 비밀 통로를 통해 형양 정씨부로 왔을 때가 아마 우리가 빠져나왔던 그때인 것 같아요. 제운설을 데리고 가면서 우릴 봤으려나 모르겠네요. 조 사야가 우릴 봤다면 우리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 거예요.”

“그건 아닐 것 같소. 우리가 빠져나온 그때 제운설을 데려간 거라면 우리도 눈치챘을 것이오. 아마 우리가 정신을 잃고 발칵 뒤집혔을 때 호위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사이 데려간 듯해. 봤다고 해도 멀리 가지도 못했을 테니 효양이 300리 안으로 소식을 막는다면 밖으로 알리려 해도 이미 늦었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었다. 

“당신에게 분명 큰일이 생겼을 거란 생각에 관아를 자세히 살펴볼 정신도 없었어요. 목청 공자와 당신 흔적을 찾아보려고 호위들에게도 샅샅이 살펴보라고 했지만, 서재는 더더욱 와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그 사이 조 사야가 다시 돌아와 물건까지 챙겨갔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요.”

그 순간, 진강이 사방화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당신이 날 걱정했다니 조 사야를 잡는 것보다 더 기쁘오. 그놈이 뭘 가져갔든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날 순 없어. 이 세상이 아무리 넓다고 한들 당신과 내가 힘을 합치면 사람 하나 찾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소.”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만 가요, 우리.”

네 사람은 다시 비밀 통로로 들어가 성을 빠져나왔다. 

* * *

통로와 연결된 출구는 성에서 3리 바깥에 떨어져 있는 숲속이었다.

진강은 주위를 둘러보다 사방화에게 말했다.

“방화, 여기서 5리만 더 가면 효양이 성 교외에 마련해둔 별원이 있소. 거기 가서 쉽시다.”

“네? 쉬자고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제 여기 일은 모두 효양에게 맡깁시다.”

“혼자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선 맡겨두는 것이오. 세상에 당신 몸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니 꼭 쉬어야 하오. 서신을 보낼 테니 우선 당신을 데려다주고 나중에 합류하면 되오.”

“전 이제 괜찮아요.”

“말 들으시오.”

사방화도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어요. 말 들을게요.”

진강은 다시 사방화를 안아 들고 앞으로 향했다. 

“진강, 근데 효양 공자에게 서신을 보낼 거라 하지 않으셨어요?”

“조금 전 전음을 보냈소. 봐, 그 큰 형양 정씨부 초목들 정기를 다 받고도 아직 심혈은 회복하지도 못했잖소. 10분의 1도 회복하지 못한 것 같은데. 나랑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내가 전음입밀을 하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다니. 몸이 이렇게나 망가졌는데 아직도 괜찮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오?”

사방화는 입술을 삐죽이며 진강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당신이 있는데 제가 정신 차리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다른 사람과 있었다면 당연히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전음을 가로막았겠죠.”

“다른 사람?”

진강이 살짝 눈을 가늘게 뜨자, 사방화가 헛기침을 했다.

“뭐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이죠.”

“비유도 안 돼. 앞으로 나 말곤 그 어떤 누구와도 가까이 있지 마시오.”

사방화가 픽 웃곤, 눈을 흘겼다.

“좀생이.”

진강은 바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왜, 당신 어항에 다른 물고기라도 들일 생각이 있는 것이오?”

“전혀요.”

사방화의 시원한 대답에, 진강도 만족한다는 웃음을 보였다.

“진강, 근데 아까부터 한참이나 절 안고 있는데 안 힘드세요? 혼자 걸을 수 있으니 내려줘요.”

하지만 진강은 사방화를 더 꼭 끌어안았다.

“전혀 힘들지 않소. 당신을 안고 있는 게 더 좋소.”

사방화도 미소를 지으며 진강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진강의 심장 박동, 진강의 따뜻한 체온……. 살아있다는 것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 다 무사히 살아남아 서로를 안고 있다는 것이 새삼 코끝을 시큰하게 울렸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부러운 게 없었다.

그러다 잠시 후, 사방화가 입을 열었다.

“진강.”

“응?”

진강이 발걸음을 멈추곤 그녀를 내려다봤다. 

사방화는 그냥 진강의 품에 머리를 폭, 파묻었다.

“그냥 불러봤어요.”

진강은 엷게 웃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후로도 사방화는 몇 번이고 진강의 이름만 부르길 반복했다. 진강은 귀찮은 기색 하나 없이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정성껏 응답해줬다. 그의 입가에 번진 미소도 내내 떠날 줄 모르고, 기분은 이미 하늘 끝까지 치솟은 듯했다.

시화, 시묵 또한 두 연인의 행복한 기분에 전염된 듯 방긋 웃고 있었다. 다정한 부부의 모습은 빛나는 태양도 멋쩍을 만큼 찬란하고, 눈이 부셨다. 

간밤에 있었던 엄청난 일도 이젠 어제가 돼버렸다.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이 앞길을 막는다고 해도 사방화, 진강이 함께 있는 한 어떤 고난도 함께 헤쳐갈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간밤에 있었던 어마 무시한 일들이 비에 씻겨 내려가고 날이 갠 것처럼 앞으로 그 어떤 일들이 두 사람의 앞길을 막는다 해도 소왕야와 소왕비가 함께라면 모두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 느껴졌다.

* * *

반 시진 후, 5리를 지나 푸른 강산을 끼고 지은 한 별장 앞에 다다랐다.

“형양성에 와서 정탐꾼을 제거할 때 효양과 여기서 함께 지냈소.”

진강의 설명에,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은 사방화를 안고 대문 앞으로 가며 시화, 시묵에게 문을 두드리라 눈짓했다. 그런데 그녀들이 막 손잡이를 잡으려던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며 집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나와 진강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소왕야, 조금 전 효양 공자님 분부를 받아 두 분께서 머무실 곳을 깨끗이 청소해 두고 따뜻한 탕도 준비해뒀습니다. 효양 공자님께서 바깥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쉬시라는 말씀도 남기셨습니다.”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다.”

집사는 고개를 저으며 네 사람을 안으로 들이곤 문을 닫았다. 

사방화는 진강의 품에 안겨 별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인들은 얼마 보이지 않았지만, 별장 주위를 둘러싼 암위와 호위들이 제법 보였다. 다들 실력이 상당한 무공 고수들로, 정효양이 특별히 준비해둔 것 같았다.

그리고 별장 가장 안쪽에는 먼지 하나 보이지 않는 안뜰이 있었다. 

진강은 안방으로 들어가 사방화를 침상에 편히 눕혀주었다. 

집사도 서둘러 세욕 물을 들여 병풍 뒤에다 놓도록 하고 공손히 물었다.

“강 소왕야, 시장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면 세욕 후에 드시겠습니까?”

“지금 다오.”

잠시 후, 식사가 차려지고 집사가 말했다. 

“소왕야, 다른 분부가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두 낭자에겐 서쪽 방을 내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집사가 나가자 방은 아주 조용해졌다.

사방화, 진강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고요히 쳐다보았다.

잠시 후, 진강은 천천히 사방화에게 다가가 입맞춤을 했다. 사방화는 온몸이 다 순식간에 부드러운 솜처럼 녹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녀도 곧 진강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그토록 그리워했던 진강을 한없이 느꼈다.

이내 진강은 혹여나 사방화가 힘들까 싶어 가벼운 입맞춤으로 마무리 한 뒤, 사방화의 몸을 다정히 토닥이며 말했다.

“당신이 이렇게 다치지만 않았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진강,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었으면서 배도 안 고프세요? 저랑 뭘 한다고 시장기가 가시는 건 아닐 텐데요.”

사방화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참나.”

진강이 피식, 웃으며 사방화의 볼을 콕, 찔렀다.

그때, 사방화가 갑자기 진강의 귓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정말 배 안 고프시면 이리 와요. 저도 당신을 원해요.”

그 말에, 진강은 정말 순식간에 터질 듯한 심장으로 진하게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사방화가 금세 숨이 넘어갈 듯 가쁜 호흡을 하자, 진강은 서둘러 사방화를 놓아주곤 침상을 내려왔다.

“그만합시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으니 아낄 줄도 알아야지. 일단 밥부터 먹고 기운 좀 차리면 그땐 정말…….”

사방화도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도 지금은 둘 다 조심해야 할 때란 걸 잘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을 내려왔다. 

두 사람은 간단히 씻고 함께 밥을 먹었다. 방을 비롯한 뜰 전체가 너무도 고요해 두 사람도 말없이 밥을 먹으며 간간이 서로 눈만 맞출 뿐이었다.

잠시 후, 사방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명산에서 돌아왔을 땐 지긋지긋한 당신과 떨어져 있기만 바랬는데 이렇게 한 발자국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날이 올 줄은 누가 알았을까요?”

진강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그리도 싫었소?”

“응, 정말 싫었어요.”

“난 당신을 기다리느라 가슴에 거대한 돌덩이가 앉아 있는 듯했는데. 날 기억 하지도 못하는 당신을 보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만일 한평생 날 기억하지 못하고,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 어쩌나 걱정에 메말라갔소. 그래서 온갖 수를 써서 내 옆에 꼭 묶어뒀지. 지금 생각하니 좀 웃기긴 하오.”

이내 사방화의 눈빛이 너무도 따뜻하게 변했다.

“진강, 당신이 날 포기하지 않고 운명을 바꿔줘서, 또 8년을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당신께 사랑받을 수 있어 너무 행복해요. 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거예요.”

진강은 호수 같은 사방화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손을 꼭 잡았다. 가슴엔 무수한 감정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동안 겪었던 많고도 많은 좌절, 처절한 대가……. 그래, 그것이 다 무슨 고생이라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사랑하는 정인이 눈앞에서 그 모든 고통을 견뎌줘서 고맙다고 말해주는데.

진강도 벅찬 마음에 입술을 살짝 깨물고, 살짝 붉어진 눈으로 답했다.

“방화, 당신의 운명을 되돌리고 8년을 기다려 당신을 만날 수 있게 된 건 내가 더 감사드릴 일이오. 당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고, 또 당신에게 사랑도 받을 수 있으니 나 역시 세상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오. 이 세상 모두가 부러워하는 당신의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것에도 매우 감사하오.”

사방화는 마음에 따뜻한 봄빛이 찾아온 기분이었다. 하룻밤 사이, 두 사람은 비로소 두 번의 생에서 내내 두 사람을 옥죄었던 고리를 끊고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사랑은 완전한 이해 속에 더욱더 진실해졌다.

그녀는 또 한 번 이렇게 진강과 진정으로 몸과 마음이 하나 될 수 있음에 매우 감사했다. 형양 정씨부 절명 장치, 하늘, 운명, 자운 도장, 정효양, 그리고 더 많은 이들……. 그녀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너무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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