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1화. 천지의 영령 (2)
잠시 후, 정효양이 한 비단 상자를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났다.
“효양 공자님? 마마를 살릴 수 있는 약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시화와 시묵이 몹시 기뻐하며 반겼다.
정효양은 서둘러 사방화에게 다가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 보물이라면 살릴 수 있을 거다.”
“그럼 어서 살려 주십시오! 마마만 살려주신다면 그 은혜는 다음 생에도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정효양은 슬쩍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희한테 무슨 은혜를 바라겠느냐.”
그리고 정효양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돌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돌은 마치 뿔이 자란 것처럼 사방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중간엔 ‘취영석(聚灵石)’이란 옛 글자도 적혀 있었다.
정효양은 조심히 돌을 꺼내 사방화 입술에 갖다 대다가 눈썹을 찌푸렸다.
“통째로 삼킬 순 없겠지?”
시화와 시묵이 깜짝 놀랐다.
“예? 효양 공자님, 이건 돌이잖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삼킵니까?”
“이건 내가 우연히 얻게 된 매족의 물건이다. 고서에서 말하기론 이걸 삼켜야 한다고 하던데……. 괜찮겠지?”
“그럼……, 한번 해볼까요? 매족의 물건이라 당연히 상식적으론 말이 안 되지만 마마께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공자님, 어서 마마께 먹여주세요.”
시화가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응, 어서 입술을 좀 벌려다오.”
시화가 서둘러 사방화의 입술을 벌리자, 정효양은 즉각 취영석을 사방화 입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돌은 생각보다 더 커서 아예 들어갈 생각도 하질 않았다. 정효양은 계속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다 그녀의 입술에 상처가 난 걸 보곤 깜짝 놀라 손을 내려놓았다.
“안 될 것 같다.”
“그럼 어떡합니까?”
시화, 시묵은 한순간 희망이 사라져버린 기분에 눈시울을 붉혔다.
정효양도 난감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고서에선 분명 삼켜야 한다고 적혀 있었는데…….”
“아니면 혹시 깨트려야 하는 건 아닐까요?”
이어진 시묵의 물음에, 정효양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 깨트렸다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끝이다.”
시화는 그래도 침착함을 찾으려 애썼다.
“효양 공자님, 고서에 또 뭐라고 쓰여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정효양은 고개를 저었다.
“다 헤지고 한 장밖에 남지 않은 잔본이었다. 취영석에 관해선 그저 천지의 영기를 모아 먹으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만 적혀 있었어.”
“그렇지만 도저히 삼킬 수가 없잖아요.”
정효양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삼킬 수만 있으면 일찌감치 내가 먹고 불로장생했지 지금껏 남겨뒀겠느냐? 소왕비마마는 매족의 핏줄이기에 삼킬 수 있을 줄 알았다만, 안 되겠구나.”
“마마께서 깨어계셔야만 삼킬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지금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잖아.”
사방화는 의술을 모르는 이들이 봤을 때도 호흡이 옅고 탁해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꼭 죽을 것만 같았다. 정효양은 조급한 마음에 진강을 흔들었다.
“강 소왕야! 어서 일어나 보십시오!”
하지만 진강도 꼼짝을 하지 않았다.
정효양은 초조함에 몇 번이고 진강을 더 세게 흔들었다.
“어서 일어나시지 않으면 정말 소왕야의 부인은 돌아가십니다!”
이 말 한마디의 힘이 그렇게도 센 건가. 진강이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소왕야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시화, 시묵이 크게 기뻐했다.
정효양도 진강이 깨어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 소왕야! 어서 소왕비마마를 살려주십시오. 소왕야를 살리겠다고 가져온 약 모두 강 소왕야께 드리고 마마의 피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보아하니 심혈이 고갈돼 어서 구하지 않으면 정말 위태로울 것 같습니다.”
진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화의 손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녀를 처연하게 바라보던 진강이 순간 급히 무언가를 찾았다.
“효양, 그 보배는 어디있지?”
“자, 여기 있습니다.”
정효양이 서둘러 취영석을 건네자, 진강은 순간 흠칫했다.
“이게 효양 네가 말하던 보배였구나.”
“뭔지 아십니까?”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모가 있겠어요?”
이어진 정효양의 물음에 진강은 살짝 입술을 깨물다 한참 뒤에야 답했다.
“응.”
이내 시화가 다급히 외쳤다.
“소왕야! 어서 마마를 구해주십시오! 더는 늦어선 안 됩니다!”
진강은 곧 사방화 손가락에 살짝 상처를 내 취영석을 가까이 갖다 댔다. 하지만 사방화에게선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고 취영석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심혈이 고갈됐는데 흐를 피가 어딨겠습니까.”
진강은 문득 자신에게 모든 피를 내줬다는 말을 떠올리곤, 자신의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취영석 위에 피를 떨어뜨리자, 취영석은 순식간에 엄청난 빛을 뿜어내며 사방화를 감쌌다.
“됐다! 이렇게 쓰는 거였어! 그럼 강 소왕야, 이렇게 되면 소왕야도 이제 매족의 피가 흐르게 되는 겁니까?”
정효양이 기뻐하며 묻자, 진강은 얼버무리며 답했다.
“그렇겠지.”
“매족의 핏줄이라니! 좋겠습니다!”
“부러워? 그럼 차라리 네게 다 줘버릴까?”
진강은 사방화를 살렸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전혀 없어 보였다. 정효양은 진강의 반응이 너무 의아해서, 희미한 빛에 휩싸여 여전히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는 사방화를 한번 바라봤다.
두 사람을 계속 보고 있으려니 매족 핏줄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목숨만큼 중한 것이 있을까. 정효양도 결국 말을 잃었다.
이내 시화, 시묵은 취영석 빛이 사방화를 감싼 것을 보며 매우 기뻐했다.
“이제 마마께선 살아나실 거야! 정말 다행이다.”
정효양도 이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에 흐르던 식은땀을 닦았다.
“간밤에 있었던 모든 일을 겪고 나니 여태 헛살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지금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어…….”
고요한 공간엔 정효양의 혼잣말이 공허하게 울렸다.
진강도 말없이 사방화를 바라보기만 했고, 시화와 시묵도 사방화를 지켜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효양은 이제 좀 기운을 차린 듯 홀가분한 몸으로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순간 그가 깜짝 놀랐다.
“소왕야! 저길 보십시오!”
진강은 천천히 정효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몹시 어두워진 눈빛으로 말없이 시선을 거뒀다.
시화와 시묵도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형양 정씨부를 곳곳에 메우고 있던 울창한 화초와 나무들……. 그 푸른 물결이 하나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물들이 다 말라 죽고 있는 것이었다. 반만 마른듯했던 나무도 완전히 시들어 가고 있었다.
시화, 시묵은 너무 놀라 딱딱하게 굳은 몸으로 천천히 고개만 돌렸다. 나무들이 메말라가는 건 분명 취영석 때문일 터였다. 취영석이 형양 정씨부 주변에 있던 나무와 식물의 정기를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었다.
정효양은 한참을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다 진강에게 겨우 물었다.
“강 소왕야께선……. 알고 계셨던 겁니까?”
“안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게 있나?”
진강의 말이 옳았다. 한 사람이 생명의 빛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데, 안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었다. 어쨌든 사람의 목숨부터 구해야 했다.
정효양은 그제야 고서에 적힌 문구를 완전히 깨닫게 됐다.
천지의 영기를 불어 넣어 만물은 파괴되나, 사람은 불로장생할 수 있으리.
만물을 파괴하고 생령을 촉진하는 능력……. 과연 이 천도를 거스르는 힘을 가진 매족을 천지가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늘엔 어렴풋이 동터오는 새벽빛만이 겨우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거기다 현재 사방화, 진강은 엄청난 호위들에 둘러싸여 취영석 일은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사방화가 진강, 정효양을 데리고 탈출했을 때도 천지를 뒤흔들 만큼 엄청난 굉음이 나긴 했지만, 이는 지하 깊숙이서 난 소리라 이를 느낀 사람들은 형양 정씨부에 있던 이들뿐이었다. 성내 백성들은 무엇도 느끼지 못했다.
형양성 백성들은 성주와 형양 정씨 사람들의 죽음으로 내내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느라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일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잠든 밤, 형양 정씨부 모든 초목은 사람들이 모인 이 객실을 중심으로 점점 바깥까지 퍼져 소리 없이 메말라갔다. 푸른 초목들이 생명을 다하니 썰렁해진 형양 정씨부엔 살을 에는 듯한 싸늘함이 번졌다.
정효양은 몸서리를 치며 소리 없이 누워있는 사방화를 내려다보았다. 현재 형양 정씨부 모든 화초들 정기를 다 받고도 그녀는 여전히 창백했다. 아마도 심혈 뿌리까지 메말라 이 정도 정기론 도저히 메워지지도 않는 것 같았다.
정효양은 잠시 바깥 담장 아래로 달려가 주변을 둘러보곤 안색이 더 창백하게 질려 진강에게로 달려왔다.
“강 소왕야! 점점 부랑 바깥으로도 퍼지고 있습니다! 만일, 정말 만에 하나 형양성 모든 나무들이 다 메말라 죽어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어떡합니까? 그 결과가 어떨지 생각은 해보셨어요?”
내내 아무런 말도 없던 진강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결과.”
“누군가 형양성 초목이 하룻밤 사이 다 말라죽은 게 모두 매족 핏줄을 가진 소왕비마마 때문이라고 말한다면요? 백성들은 아마 소왕비마마를 귀신 보듯 할 겁니다! 심지어 하늘이 진노해 남진에 천벌을 내린 것이라 민심이 요동칠 수도 있어요! 무엇보다 백성들 생명엔 지장이 없겠지만, 이제 한 달 후면 수확철인데 농경지까지 다 말라버린다면 올해 백성들 노고는…….”
“방화가 내 세상이다! 내 세상이 빛을 잃어가는데 지금 한가롭게 다른 사람 노고를 생각하라고? 그냥 내겐 다 다른 세상 얘기일 뿐이다.”
진강의 서늘하고도 처연한 눈빛에, 정효양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효양은 사방화, 진강이 서로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하는지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었다. 서로에겐 어쩌면 세상이란 표현도 부족할 텐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백성과 나라가 보이겠는가. 평소 아무리 나라와 대의를 생각하는 둘일지라도 이 연인들에겐 천하도 감히 이길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정효양이 침묵하자, 진강도 다시 사방화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때, 사방화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가 일어나며 손에 있던 취영석을 움켜쥐자 모든 빛도 다 사라졌다.
진강은 붉어진 눈시울로 얼른 사방화를 껴안았다.
“깼소?”
사방화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효양도 크게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왕비마마!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우리 집 초목이 메말라 죽는 건 그래도 덮을 방법이 있지만, 성 전체가 메말라버렸다면 정말 그 결과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시화와 시묵도 사방화가 깨어난 걸 보며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깨어나셨으니 됐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내 사방화는 진강의 품에 기대 말했다.
“얘기하는 거 다 듣고 있었어요. 깨어나지 못했을 뿐이에요.”
그러자 정효양이 물었다.
“그럼 제 말을 듣고 강제로 깨어난 겁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 하나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면 폐하와 다른 분들의 노고가 헛수고가 될 거잖아요. 백성들 민심을 흩트려서는 안 되죠.”
정효양은 사방화의 말에 감탄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곧 진강이 사방화의 손을 꼭 잡아왔다.
“좀 어떻소?”
“많이 좋아졌어요.”
“날 그만 좀 속이시오.”
굳어진 진강을 보며 사방화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힘은 없지만,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에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있으니 생명에 지장만 없다면 문제없소.”
“앞으론 당신이 가는 곳은 어디든 함께 갈 거예요. 이제 절대 떨어지지 말아요, 우리. 알겠죠?”
“응.”
진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