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9화. 생사를 함께 하다
좁은 장치 내 어렴풋이 비치는 빛 아래 두 사람의 표정도 생생하게 보였다. 두 사람의 피는 멈출 줄 모르고 쏟아져 나와 옥가락지로 빨려 들어갔다.
옥가락지는 마치 끝없이 깊은 굴처럼 입을 쩍 하니 벌리고 두 사람의 피와 영혼을 삼켰다.
두 사람의 피가 분출되며 목숨 또한 빠르게 줄어들어 가는 듯했고, 두 사람은 얼굴을 비롯한 온몸 전체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버렸다. 둘은 꼭 텅 비어버린 구멍처럼, 살짝 손가락만 튕겨도 금방 깨져버릴 것만 같았다.
정효양은 자신의 숨결 하나에도 두 사람이 쓰러질까 두려워 호흡도 멈춘 채 두 사람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사실 세상도 부럽지 않은 최고의 신분을 가진 이들이었다.
진강은 사실상 이 나라에 유일한 적통 황손으로, 황제보다 칭송을 받으며 세상 최고의 부귀영화 위에 우뚝 선 인물이었다.
또 사방화는 황손은 아니어도, 남진을 주름잡는 거대한 사씨 대족의 유일한 적녀로 부귀영화는 물론 황실 공주보다 존귀한 대접을 받는 인물이었다.
모두 이들을 보고 그저 팔자가 좋아 고귀한 삶을 산다고 여기지만, 지금 두 사람은 바람 앞의 촛불 마냥, 위태로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아무리 세상에 귀하디귀한 목숨이라 칭송받는다 한들, 현재는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는 절명의 장치 앞에 염라대왕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가여운 상황 속에 갇혀버렸다.
심혈이 분출하고 뼈를 깎아내리는 고통은, 귀한 사람이라고 피해가는 통증이 아니었다. 세상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 영친왕부, 충용후부를 등에 지고 머리 위론 남진 강산 천하 백성들과 하늘땅을 짊어진 채 굳건히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정효양은 두 사람을 보며, 심혈이 찢기는 고통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이라 탄복했다. 세상도 이 두 사람의 거대한 사랑 앞에 일순 작아져 버린 기분이었다. 숨쉬기도 힘들었던 철판 장치마저 두둥실 구름 위에 떠가는 듯했다.
정효양은 이내 마음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세상엔 이 두 사람과 같은 이들은 없을 터였다. 생과 죽음마저 뛰어넘는 깊은 사랑이 또 있을까?
하늘도, 운명도 측은지심이 있다면 이대로 두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둬선 안됐다. 제발 하늘이 두 사람을 보살펴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정효양은 한평생 불교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손을 모아 그들을 위해, 또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정말 간절히 두 사람이 살 수 있길, 이 생사의 기로를 헤쳐나가길, 자신도 함께 이곳을 탈출해 행복한 날들을 지켜볼 수 있길 소망했다.
저렇게 빼어난 두 사람이 여기서 끝을 맺는 건 정말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100년을 넘은 두 사람의 미래까지 미리 엿보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강과 사방화가 이렇게 죽는다면 이 남진의 미래 역시 어디에 있겠는가.
시간은 계속해서 조용히 흘러갔지만, 사방화의 눈물은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강은 끓는 듯한 뜨거운 그녀의 눈물에 가슴이 데는 듯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방화도 이번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정효양이 있다고 한들, 생사의 기로에 선 이상 더는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죽게 되는 것이라면 이기적일지라도 오직 진강 하나만 바라보고 싶었다.
사방화는 심혈이 빠져나가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에 더는 남은 힘도 없었지만 사력을 다해 진강을 안고 그와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진강도 찢어질 듯한 고통에 남은 힘이 없어 그녀와 겨우 입술만 맞닿은 수준이었다.
전의 그 수없이 뜨거웠던 입맞춤에 비해 초라할지라도, 두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마음속 영혼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느낌을 절절히 받았다.
정효양은 시선을 피해주려다, 두 사람이 끼고 있던 옥가락지에 박힌 영석이 일순간 빛나는 노을빛을 뿜어내는 걸 발견했다.
노을빛이 이곳 전체를 비춰 눈이 아파 뜰 수가 없는 와중에도 정효양은 안간힘을 쓰며 눈을 부릅떴다. 그 사이 노을빛은 진강과 사방화의 머리 위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두 사람 전체를 감쌌다.
노을빛은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감쌌다가 이내 꼭대기에서 사라지더니, 갑자기 붉은빛 두 줄기를 내며 진강과 사방화의 가슴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모두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일이었다.
정효양은 동공이 확장되고 아픔이 극에 달해 참을 수 없어 눈을 한번 감았다 떴다. 그 순간, 진강과 사방화는 온몸에 힘이 빠진 듯 그대로 쓰러졌다.
정효양은 깜짝 놀라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로 달려갔다.
진강과 사방화는 소리 없이 쓰러져 있었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 있던 옥가락지는 빛을 잃어 차갑게 식어있었다.
정효양은 깜짝 놀라 주저앉아 소리쳤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두 사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효양은 서둘러 두 사람의 코 밑에다 손을 가져다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했지만, 둘은 전혀 숨을 쉬지 않았다.
그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이렇게 죽었단 말인가? 천하제일 존귀한 영친왕부 소왕과 그 뛰어난 충용후부 아가씨가 이렇게 죽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남진 강산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두 사람에게 기대를 걸어왔는데, 가족들과 인척들은 이제 이 커다란 짐을 어떻게 지려나? 두 사람의 목숨을 세상 무엇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이야?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수없이 뒤엉키는 생각들에 눈빛이 초점 없이 잔뜩 흐려졌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린 정효양은 사방이 봉쇄된 장치를 올려다보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꺼냈다. 그리고 입술을 꼭 물고 자신의 목에 갖다댔다.
“잠시나마 두 분과 함께할 수 있었고, 이 자리에서 함께 죽을 수 있어 영광입니다. 이제 이 몸도 살 만큼 산 셈이지요.”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 갑자기 팔 하나가 올라와 검을 쥐고 있던 정효양의 팔을 툭 쳤다.
챙-
검은 때 아닌 영롱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정효양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 팔의 주인을 확인했다. 진강이 정효양을 막은 것이었다. 어느새 진강과 사방화는 눈을 뜨고 있었다.
정효양은 몹시 기뻐 반짝이는 눈빛으로 외쳤다.
“두 분…….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진강은 사방화를 부축해주며 정효양에게 말했다.
“아직 마음껏 살아보지도 못했는데 뭘 죽어? 그나저나 나와 함께 죽겠다고 할 정도로 충성심이 있는진 몰랐는데.”
정효양은 두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 진강이 무슨 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껑충껑충 뛰었다.
“죽지 않았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진강은 바보 같은 동생을 보듯, 한심하단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방화도 정효양을 보며 웃음이 터졌지만 한편으론 감동이 밀려들었다.
물론 정효양은 이목청, 연석, 정명, 송방 같이 진강과 어릴 때부터 함께 한 죽마고우는 아니었지만, 죽음까지 함께하려 한 의리는 마음을 울렸다.
이내 사방화가 진강을 바라보자,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저런 멍청이는 상대하지 마시오.”
정효양은 이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큰소리치기 시작했다.
“강 소왕야! 양심은 매번 어디다 팔아먹고 오시는 겁니까? 두 분이 돌아가신 줄 알고 하마터면 자살할 뻔했잖아요! 죽지도 않았으면서 어찌 그리 한참 동안 기색조차 없었던 겁니까?”
“우리가 제때 일어나 염라대왕을 만나지 않았단 거에 감사해야지. 잠시 질식했던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내 양심을 운운하는 것이냐?”
정효양은 순간 할 말이 없어 한참 뒤에야 말을 이었다.
“그땐…… 깜짝 놀랐는데 질식을 생각할 겨를이 어딨습니까!”
정효양이 민망함에 소리를 높이자, 진강이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효양, 비밀로 해줄 테니 걱정마라.”
이어 정효양이 사방화를 바라보자, 그녀도 웃음을 터뜨렸다.
“응, 나도 절대 말 안 할게요.”
정효양은 입술을 삐죽 내밀곤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댔다.
“스스로도 아깐 너무 멍청했다는 생각이 드니 부디 잊어 주세요.”
진강은 피식 웃다가 사방화의 손을 잡고 그녀가 처음 정효양 위로 떨어진 벽 앞으로 왔다. 그리곤 벽의 한쪽 구석을 두들기며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가 바로 잠긴 곳이오? 아까 심혈로 영력을 발동시켰을 때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는데 그게 여기서 온 것 아니오?”
정효양도 가까이 다가왔다.
“출구를 찾은 겁니까?”
사방화가 정효양을 슬쩍 보곤 말했다.
“아무리 정교한 장치라도 허점은 존재하는 법이에요. 일반적인 장치는 살아나갈 수 있는 문과, 죽음으로 가는 문이 있지만, 여긴 죽음으로 가는 문밖에 없죠. 출구도 없고, 살아나갈 수도 없단 거예요. 하지만 죽음으로 가는 문도 어쨌든 문은 문이잖아요?”
정효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진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강은 사방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오.”
사방화는 곧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모두 저 죽음의 문에서 떨어진 거니까 다시 저길 열고 나가야 해요.”
정효양은 실낱같은 틈조차 보이지 않는 그 벽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일찌감치 소왕야와 벽이란 벽은 다 건드려 보았습니다. 특히나 저 천장은 세 겹으로 쌓여있어, 가지고 있는 절세 명검으로도 깨지지 않았어요.”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바로 함정이죠. 두 분은 무명산에 가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곳의 훈련 기지엔 더더욱 가 본 적 없으실 테니 이런 장치를 완벽하게 알진 못하겠죠. 여긴 무명산 훈련 기지보다도 먼저 만들어졌을 테니 죽음의 문 다음으로 살아나갈 수 있는 문이 생겼을 거예요. 그게 바로 이 위죠.”
“하지만 이 위를…… 열 수 있을까요?”
정효양이 물었다.
“처음엔 열리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당연히 열릴 거예요.”
사방화는 검지에 낀 옥가락지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진강의 손을 맞잡곤 두 옥가락지를 내려다보며 그에게 물었다.
“진강, 반 시진 정도 더 버틸 수 있겠어요?”
“응.”
정효양은 사방화가 함정으로 떨어지기 전보다 거의 투명에 가깝도록 창백해진 진강의 안색을 보곤 물었다.
“반 시진을 더 버틴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조금 전 이 옥가락지를 통해 진강의 심혈이 내게 옮겨온 거예요. 자운 도장께서 말씀하신, 이 옥가락지를 써서 심혈을 닳게 하는 건 내가 아닌 우리 서방님인 거죠.
난 본래 매족의 혈맥이 흐르고 있어, 심혈이 갑자기 옥가락지에 빨려 들어갔어도 진강의 심혈이 내 몸으로 흘러오게 된 덕에 매술로 입은 상처가 완전히 다 낫게 됐어요.
하지만 내가 이걸 빨리 발견해 막지 않았더라면 진강은 심혈이 고갈돼 죽었을 거예요. 강제로 끊어내서 잠시 질식했던 거고요. 반드시 반 시진 내에 탈출해 내가 다시 심혈을 보내줘야 해요.”
정효양은 크게 놀랐다.
진강은 분명 깨어나자마자 장난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놀려댔기에 두 사람 다 당연히 무사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진강이 이토록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렀을 줄이야…….
심혈이 빠져나간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그 고통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픈 기색도 보이지 않는 진강의 모습에 그도 탄복을 금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