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6화. 하염없이 터져 나오는 사랑
사방화는 정효양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한시라도 진강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며칠 내내 그녀는 마음 편할 날 없이 조마조마하며 지내온데다 특히 오늘은 분명 큰일이 생겼단 걸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진강을 찾을 수가 없어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하루가 꼭 1년, 10년 같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진강을 찾았는데 어찌 떨어질 수 있겠는가? 정효양이 비웃든 말든 상관할 바도 아니었다. 사방화는 진강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진강은 못 본 새 더 야윈 사방화를 내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안 그래도 한 손에 잡히던 허리는 더욱 가녀려져 있었다. 진강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가 행여 부서지기라도 할까 살짝 힘을 풀고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사방화에게선 은은한 약 냄새가 흐르고, 진강의 눈엔 파도가 휘몰아졌다.
처음 사방화가 금옥란 때문에 위험에 처했다고 했을 땐 당장이라도 날아가고 싶었다. 포각루에서 한바탕 난리가 있었을 때도 심장이 다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물론 곁에는 황제 진옥이 있지만 걱정은 가시질 않았다.
그러다 사방화가 황궁을 나와 평양성에 다다랐다고 했을 땐, 형양성으로 오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그에 어서 형양성 일을 처리하고 재회를 꿈꿨지만 뜻하지 않게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나갈 수도 없고, 자신을 찾지 못해 사방화가 얼마나 마음 졸일까 하는 걱정이 앞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사방화가 뜻밖에 이 함정으로 떨어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사방화의 말이 맞았다. 서로가 함께할 수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지금 이 순간, 진강은 실로 폭발할 것 같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처음 그 다가가기조차 힘겨웠던 차가운 여인은 어느 시간 너머로 사라져버렸나. 진강은 이 여리디여린 사방화에게서 강대하고 단단한 사랑과 진심을 느꼈다.
한참 후, 진강은 가볍게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과연 하늘은 날 도와주시는군.”
진강은 실로 하늘의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그것이 아니곤 이 축복을 설명할 길도 없었다.
전생의 그는 후회의 고통 속에 스스로 생을 끊어버리려 했었다. 그 순간, 사부 사운 도장에게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단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것엔 막대한 대가가 필요했지만, 진강은 사방화를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다시 태어난 사방화는 전생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진강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또 이번 생에선 사방화와의 혼인도 성공했고, 이렇게 깊은 사방화의 사랑도 받을 수 있었다. 이 어찌 하늘의 축복이 아닐 수 있을까.
진강은 이제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이번 생은 세상보다 더 크고 값지고, 귀한 것들을 얻었으니, 일말의 한도 없었다.
“맞아요. 하늘은 당신과 제게 아주 큰 은혜를 베풀어 주고 있어요.”
그 순간, 사방화가 진강의 품에 더 깊이 고개를 파묻으며 말했다. 진강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도 더없이 편안해졌다.
진강도 그녀의 말에 더 끓어오르는 감정으로 천천히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러자 사방화가 재빨리 진강의 입술을 막고 정효양을 힐끗 쳐다보았다.
“신경 쓸 것 없어.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진강은 사방화의 손을 내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사방화는 심장이 빠르게 뜀과 동시에 자신의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개져 가는 걸 느꼈다. 오래도록 그리워하다 만났으니 진강을 계속 껴안고 있는 것까지는 크게 자각이 없었으나 입맞춤은 망설여졌다. 사방화가 갑자기 천하제일 뻔뻔한 성격이 된다고 해도 이것까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곧 사방화가 진강을 밀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요.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생각할 순 없어요.”
“아니면 지금 바로 죽일까?”
진강은 그녀와 제대로 입맞춤하지 못했다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 정효양이 기가 찬다는 듯 실소하며 말했다.
“강 소왕야! 진짜 양심이란 게 있습니까? 다 소왕야를 구하려다 이렇게 된 사람한테 할 말씀입니까! 눈 감고 있을 테니 마음껏 하세요!”
사방화의 얼굴은 더 붉어졌고, 진강은 코웃음을 쳤다.
“네 자식이 너희 집에 이런 엄청난 장치가 있었단 것만 알았어도 내가 여기 떨어질 일은 없었다! 근데 뭐? 날 구하려다 이렇게 돼? 날 구하려고 했다면 제대로 구했어야지, 어째 열 시진이 넘도록 나랑 여기 갇혀 있는 것이냐?”
그러자 정효양은 웃으며 진강을 힐끗 보았다.
“입씨름할 시간에 하던 거나 마저 하세요. 눈 감고 있을 테니.”
그리고 그는 정말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때, 사방화가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다.
“어디 다쳤소? 어디가 안 좋은 건가?”
사방화는 기침을 겨우 멈추고 걱정 가득한 진강을 보며 힘없이 말했다.
“괜찮아요…….”
진강은 곧장 그녀를 이리저리 살폈다. 얼굴도 붉고 숨소리도 탁해 한눈에 봐도 힘들어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괜찮단 말이 나와? 내 아무리 의술을 몰라도 분명 크게 다쳤단 것은 알고 있소.”
사방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손을 치우곤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정말 괜찮아요. 전 당신만큼 얼굴이 두껍진 못하다고요.”
진강은 순간 심장 박동이 반 박자는 느려지는 듯했다.
“안 보고 있잖아.”
“그래도 안 돼요.”
사방화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했다.
진강은 자신이 다가가지도 못하게 막는 사방화를 보곤 조용히 중얼댔다.
“방화,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거 맞소? 지금 당신 태도로 봐선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데.”
“당신이 보고 싶어서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어요.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알겠어. 하여간 어찌나 걸리적거리는지.”
진강은 다시 사방화를 꼭 껴안고 중얼댔다.
정효양은 눈을 감고 죽은 사람 보듯 하라고까지 배려한 자신을 욕하는 진강을 보니 어이가 없어졌다.
진즉 다른 곳으로 피할 수 있었으면 얼마든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방이 막혀 있는데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부부가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여 귀한 목숨을 끊을 순 없지 않겠는가!
그럼 정혼자는 어떡한단 말인가. 가여운 정혼자 아니, 정효양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소중한 정혼자가 아니던가.
정효양은 부부가 더는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이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고 살짝 눈을 떴다.
“아무것도 안 하실 거면 저도 눈 뜹니다? 닭살 돋는 행각도 끝났으니 어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 갇혀 죽을 순 없잖습니까.”
이내 사방화가 진강을 살짝 밀었으나, 진강은 역시 미동도 없었다.
“무슨 방법이 있어? 있으면 진즉 나갔지 여태 이러고 있었을까.”
정효양이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지혜와 문무를 겸비하기로 유명하신 소왕비마마께서 오셨는데, 어찌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진강은 엷게 웃으며 사방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방화, 당신이 저리 유명했어? 난 어찌 몰랐지?”
사방화는 살짝 그의 허리를 꼬집으며 말했다.
“당신도 빠져나가지 못했는데 제게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까요? 천하에 떠도는 풍문일 뿐이에요.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묻지 마세요.”
진강은 웃음을 터뜨리다 이내 앓는 소리를 냈다.
그에 사방화가 깜짝 놀라 얼른 손을 뗐다.
“다치셨어요?”
진강은 고개를 끄덕이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심한 건 아니니 괜찮소.”
사방화는 얼른 그의 맥을 짚었다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이렇게 심하게 다쳐놓고 괜찮다는 소리가 나와요?”
“그래도 당신보단 나을 거요. 다치지만 않았어도 이깟 함정 따위에 걸려들 일도 없었을 텐데.”
사방화가 다시 그를 밀어내자 진강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방화, 왜 날 자꾸 밀어내는 것이오?”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약을 가지고 온 게 있으니 일단 놔주세요.”
그래도 진강은 사방화를 더 꼭 안고 아이처럼 떼쓰기 시작했다.
“싫어. 약은 나중에 먹어도 되니 안고 있을 것이오.”
사방화는 진강을 쏘아보면서도 그의 애교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우선 약부터 먹고 어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요. 저 혼자 온 게 아니라 목청 공자님, 폐하께서 제게 보내주신 소등자랑 시화, 시묵도 왔어요. 사씨 정탐꾼들과 황실 호위들도 다 있는걸요? 제가 떨어지는 걸 직접 목격한데다 지금 상황도 모르니 미칠 지경일 거예요.”
“몰라, 일단 내가 더 미칠 지경이오. 얼마나 힘들게 당신을 만났는데…… 지금 남 생각해줄 겨를도 없소.”
사방화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듣고 있던 정효양 역시 기가 차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정말 저 사내가 강 소왕야 맞습니까? 세상이 염라대왕 대하듯 두려움에 떠는 그 영친왕부 소왕야? 얼마 전 저는 단시간에 형양 정씨 정탐꾼 전체를 휩쓸어버린 강 소왕야란 분과 함께 했는데. 그 강 소왕야는 함정에 빠지고 꼭 폭우에 잠긴 듯한 얼굴로 지내셨습니다! 그분 어디 갔는지 못 보셨나요?”
진강은 콧방귀를 뀌었고, 사방화도 웃음을 터뜨렸다.
“진강, 어서 나가지 않으면 밖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또 폐하께서 절 평양성에 데려다주시며 목청 공자께 하루에 한 번씩 꼭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우리 둘 다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면 폐하께서 곧장 찾아오실 거예요. 전쟁을 준비하는 시기에 황제폐하께서 안 계시면 대신들도 난리가 나지 않겠어요?”
그러자 진강이 코웃음을 쳤다.
“내 도성을 떠날 때도 진옥에게 당신을 잘 챙기라 신신당부를 했소. 근데 지금 이렇게 감히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놔? 내 절대 가만있지 않겠소. 반드시 결판을 낼 것이오.”
난데없이 진옥을 욕하는 진강을 보고, 사방화가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왜 폐하의 잘못이에요? 폐하의 탓도 아니잖아요.”
진강은 마침내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며 말했다.
“진옥의 탓 맞소. 이 강산이 진옥의 것인데 누굴 탓하오?”
사방화는 틈이 생기자 지체 없이 약병을 꺼내 알약 3개를 건넸다.
“진강, 어서 드세요.”
“먹여 주시오.”
진강이 아기새처럼 입술을 벌리자, 사방화도 곧 약을 일일이 넣어주었다.
마지막 약 한 알을 넣어주던 그때, 진강은 돌연 그녀의 손가락을 물었다.
사방화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화를 내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얼굴로 진강을 빤히 올려다봤다.
진강은 그 매혹적인 외모로 사방화의 손가락을 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사방화 역시 금세 진강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빠져버렸다. 시선을 뗄 수도 없으며, 말도 필요 없는 환상의 순간 같았다.
결국 정효양은 참다못해 헛기침을 하며 소리쳤다.
“소왕비마마! 강 소왕야보다 제가 더 심하게 다친 것 같은데요! 저도 약 좀 주시면 안 됩니까? 떨어지실 때 절 깔아뭉개시는 바람에 겨우 나아진 몸도 도로 망가졌습니다.”
사방화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정효양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정효양의 안색은 진강보다 더더욱 창백했다. 사방화는 정효양에게 미처 미안하단 말도 하지 못했단 게 생각나 급히 다가갔다.
“효양 공자, 정말 미안해요. 밑에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맥 좀 짚어봐 드릴게요.”
진강은 곧장 손을 뻗었지만, 사방화를 놓치자 그냥 그대로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