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화. 피리 소리에 영혼을 뺏기다 (1)
침상에 누워 있는 여인은 분명 제운설이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의 그녀는 심각한 상처를 입은 듯 의식불명인 상태로 누워있었다.
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양손을 움직이느라 이불에 접힌 자국이 있는 걸 보니, 깨어나고 싶어 발버둥을 치지만 뜻대로 안 되는 듯 보였다.
사방화는 즉각 앞에 있던 시화를 비켜서 앞으로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사화가 즉시 그녀를 붙잡아왔다.
“소왕비마마, 조심하십시오!”
이목청도 사방화를 만류하고 나섰다.
“영친왕부 금옥란은 잊으셨습니까? 명 부인의 맥을 짚었던 것도 잊으셨어요?”
결국 사방화도 멈춰서 이목청에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명 숙모님께 맥을 짚어드렸을 땐 다치지 않았잖아요. 내가 정말 아무 힘도 없다면 이렇게 스스로 걸어 다닐 힘도 없었겠죠.”
이목청이 미간을 찌푸렸다.
“맥을 짚어보려는 겁니까? 그럼 다른 의원을 부릅시다.”
“여긴 조가진이에요. 도성에서 너무 먼 곳이잖아요. 아무리 공자와 내 사람들이 여기 있다고 해도, 정말 속임수가 숨어 있다면 여기 있는 의원이 당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그러니 내가 하겠습니다.”
이내 이목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사방화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시화는 곧장 제운설의 손목에다 손수건을 올려주었다.
사방화는 먼저 손수건 위에다 손을 대고 가볍게 눌러봤지만, 아무 이상도 없자 본격적으로 제운설의 맥을 짚기 시작했다. 이목청, 시화, 시묵, 소등자는 침상 위의 제운설과 그 주위를 빠짐없이 주시했다.
사방화는 수없이 안색이 변하더니 잠시 후에야 손을 뗐다.
“어떻습니까? 왜 여기 누워있는 거죠?”
이목청이 물었다.
“심한 상처를 입어 내복도 엄청나게 손실됐습니다. 어떤 약 때문에 심혈이 통제돼 스스로를 구할 수도, 깨어날 수도 없고요. 맥을 짚어보니 정신은 깨어있지만, 몸을 깨우진 못하고 있습니다.”
이목청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그런 것이죠? 무슨 약이 그렇게 독하단 말입니까?”
“미란초(迷兰草)예요. 환각을 일으키는 풀로, 이걸 먹으면 한 달 정도 깨어나지 못하지요. 다른 약은 먹고 나면 정신을 잃게 돼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이 풀을 먹고 나면 몸은 꼼짝 못해도 정신은 깨어있어 모든 걸 생생히 느낄 수 있어요.”
이목청은 제운설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그럼 아까 그 목소리도 정말 제운설 공주가 마마께 보낸 겁니까?”
“아마도요. 심하게 다쳤지만, 요술을 익혀 근방 5리 내를 왕래하는 이들을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내가 온 걸 알고 목소리를 전한 거죠. 하지만 요술의 힘마저 극히 미미해, 겨우 한 마디밖에 못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그 한 마디로도 충분했군요. 자길 구해달라고 마마를 여기로 부른 걸까요?”
“그런가 봐요. 누가 공주를 여기로 데려왔는지 모르겠네요.”
이목청이 바로 주인에게 물었다.
“이 여인을 데려온 자가 누군가?”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성함을 말씀하지 않으셨으니까요. 소인은 그저 돈에 눈이 멀어 혼절한 이를 돌보는 것도 별달리 힘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 넙죽 받았습니다. 매일 죽을 끓여 먹여도 죽지 않고 살 수는 있으니 말이지요…….”
“어떻게 생겼지?”
“검은 옷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보였습니다.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 같아 돈을 받는 것 외엔 감히 물어볼 수도 없었지요.”
“젊은이인지 어르신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잖나.”
주인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이대는 공자님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무예를 익혔는지 발소리도 크지 않았고요. 아! 생각났습니다. 몸에서 어렴풋이 약 냄새가 났습니다.”
이목청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무예를 익히고 약 냄새가 났다고?”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향운각을 운영한 지도 20년이 다 돼가는지라 한번 봤던 사람들은 웬만해선 다 기억합니다. 그런 쪽으론 아주 민감하지요. 특히나 베일에 싸인 신비로운 공자님이 아리따운 낭자를 데려와 황금 천 냥을 주는데 어찌 신경이 쓰이지 않을까요. 다만 그분의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다른 쪽으로 신경을 쓴 것이지요.”
이목청이 사방화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뗐다.
“나가요.”
사방화는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이목청도 뒤를 따랐다.
* * *
1층으로 내려온 사방화는 곧장 향운각을 빠져나가며 이목청에게 말했다.
“쉬던 곳으로 돌아가요.”
이목청도 동의한 뒤, 숙소로 돌아왔다.
사방화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목청에게 말했다.
“미란초는 희귀한 풀이긴 하지만, 천산설연처럼 한 줄기도 구하기 힘든 건 아니에요. 미란초 하나만으로도 환각에 빠져 의식을 잃을 순 있으나 몇 시진이나 반나절 정도가 전부이지요. 하지만 미란초를 다른 약초들과 함께 섞으면 제운설이 혼수상태에 빠진 것처럼 저 정도의 효과를 낼 순 있어요.”
이목청이 말했다.
“어떤 약초들과 함께 섞는단 말이지요?”
“열종이 넘어서 하나하나 다 말하기 어려워요.”
“그 정도로 많은 약초를 배합할 줄 아는 이는 이 세상에 몇 없지도 않겠습니까? 아주 드문 신의일 텐데요.”
“언신이라면 가능하죠.”
“조금 전 향운각 주인도 나랑 나이대가 비슷하고 무공을 쓸 줄 알면서 약 냄새가 풍긴다기에, 바로 언신 공자가 떠오르긴 했습니다. 그럼 언신 공자가 제운설을 저렇게 만들고 거기다 뒀단 말입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몰라도 그런 약은 언신에게만 있어요.”
이목청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운설이 열흘 전에 여기로 보내졌다면, 도성에서 일어난 일과 조가의 죽음은 제운설 공주와 무관한 것이란 말일까요? 언신 공자가 제운설을 여기로 보냈다면 열흘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정도로 다쳤단 말입니까? 지금껏 도성에서 사씨 정탐꾼에게 수를 쓰고 포각루에서 마마와 폐하를 죽이려 한데다, 월낙과 사씨 정탐꾼을 함정에 빠트린 건 또 누구란 말이지요?”
사방화는 계속 말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마마께선 월낭이 나타나 월낙을 구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분명 누군가에게 소식을 들었거나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월낙을 구한 뒤 내가 물어봤을 때도, 그저 우연이라고만 하고 황급히 떠났었습니다. 월낭도 천기각 사람이니 아무 관련 없는 듯 보여도 확실히 얽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사방화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분명 언신 공자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이목청의 말이 끝난 후, 마침내 사방화가 입을 열었다.
“마치 누군가 판을 짜놓은 듯 모든 정황이 너무도 정확하게 언신을 가리키고 있어요. 게다가 북제 소국구라는 그 신분과도 참 잘 맞아떨어지지요. 하지만 이 수많은 증거가 언신을 향하고 있기에 더더욱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분명 속임수거나 다른 계략이 있는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응, 난 언신을 믿어요.”
이목청은 굳건한 사방화의 얼굴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서 그렇다고 하시니 저도 언신 공자를 믿겠습니다. 부디 마마의 믿음이 헛되지 않길 바랍니다.”
사방화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목청은 곧 어둑어둑하게 내려앉은 하늘을 한번 보고 물었다.
“제운설은 어떡하지요? 살릴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만, 살릴 수 있다면 모든 의문은 해결될 수 있을 겁니다. 마마께서 세상에 요술을 쓸 수 있는 이는 제운설과 그 모친뿐이라 했잖습니까? 설마…… 제운설의 모친이 조가를 죽인 걸까요?”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릴 생각도 없고, 살리지도 않을 겁니다. 정말 언신이 벌인 일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고 언신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걸까요? 제운설을 살려내 말해달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가깝지도 않고 믿음도 없는데 살려내서 뭘 하겠어요?”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대로 둡시다. 향운각에 둘까요, 아니면 우리가 데려갈까요?”
“마차에 태워 우리와 같이 가도록 해요.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형양성에 가 서방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마의 안색이 이리도 나쁜데……. 조가진에서 형양까진 아직 100리나 남았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애써도, 뒤에 이 많은 하인을 데리고 있는 이상 숨겨지지도 않을 겁니다. 강 소왕야께서도 우리가 여기 있단 걸 이미 다 알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룻밤을 쉬든, 반나절을 쉬든 언젠가 강 소왕야와 만나게 되겠찌요. 어쩌면 소왕야께서 한발 앞서 오실지도 모르고요.”
“안 돼요. 의식이 없는 제운설도 우리가 왔단 걸 느꼈으니 이미 모든 이가 알 겁니다. 그럼 진강뿐 아니라 배후자도 알 수 있단 거잖아요. 어서 서방님을 만나야 해요. 난 괜찮아요. 약 하나 먹으면 속도를 내는데도 문제없고요.”
이목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마마의 뜻에 따라야지요.”
그때, 시화가 사방화의 옷자락을 잡았다.
“마마! 반나절 정도 쉬는 것엔 전혀 지장도 없습니다.”
“안 돼요. 난 어서 진강을 만나야겠어요.”
단호한 사방화를 보고, 시화도 더 이상 무슨 말도 하지 못했다.
이목청은 마차를 준비시켜 제운설을 향운각에서 데리고 나오라 지시했고, 또 다른 이들에겐 길을 재촉했다.
* * *
반 시진 후, 향운각 주인은 그 사내가 다시 찾아오면 어떻게 하냐며 제운설을 데려가는 걸 반대했다. 그러나 이목청이 데려갔다고 하라는 말에, 주인은 그제야 이목청의 신분을 알아차리곤 더 이상 막아서지도 못했다.
제운설을 마차에 싣고 사방화와 이목청 일행은 형양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조가진을 빠져나와 대략 오십 리쯤 왔을까. 갑자기 먼 곳에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한밤중 갑작스레 울려 퍼지는 피리 소리는 그 자체만으로 어느 정도 스산함이 느껴져야 했지만, 이 피리 소리에선 오히려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피리를 부는 이의 거리는 아주 가깝기도, 멀기도 한 것 같았다.
“참 흥취가 있는 피리 소리군.”
이목청이 말했다.
사방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먼 곳을 바라보았지만, 어두운 밤인데다 안개까지 껴 피리를 부는 이가 어딨는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목청 공자, 우리가 어디까지 왔나요?”
“50리 왔으니, 이제 여기서 3리만 더 가면 분수현(汾水县)이 나옵니다.”
“3리……? 아니에요. 피리 소리는 적어도 10리 밖에서 들려오는데, 어느 누가 10리 밖에서 내력을 이용해 소리를 전하겠어요? 모두 제자리에 멈춰서 눈과 귀를 막아요. 어서!”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피리 소리는 일순 귀를 따갑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목청과 사방화가 데려온 이들은 모두 월등한 무공 고수들이라 이들은 사방화의 경고를 듣자마자 의심의 여지없이 따랐다. 그들은 곧 말을 멈춰 세우고, 눈과 귀를 막은 뒤 기운을 안으로 거두어 피리 소리를 차단했다.
그런데 피리 소리는 한 바퀴를 맴돌더니 돌연 사방화에게로 향했다.
순간 사방화의 안색이 돌변했고, 이목청은 재빨리 내력을 발휘해 동그란 벽을 그려 사방화를 온전히 감쌌다.
사방화의 몸을 짓누르던 힘이 약해지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이목청을 올려다봤다. 그는 온 내력을 다해 사방화를 지키느라 고스란히 피리 소리를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술을 꾹 깨물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이를 다 묵묵히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