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9화. 경가의 신분
저녁 무렵, 날은 어두워지지만 경가의 답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더 깊어지려 하자 시화는 조심스레 사방화에게로 다가왔다.
“마마, 소인이 기다릴 테니 어서 쉬시지요.”
“오후에 좀 자서 안 피곤하니까 괜찮아. 경가는 내게 답신을 보내지 않을 사람이 아니니, 설령 아무 것도 적지 않은 서신이라도 반드시 보내줄 거야.”
시화도 말없이 그녀와 함께 경가의 답신을 기다렸다.
반 시진 후, 드디어 비둘기가 별원으로 날아왔다. 지붕을 한 바퀴 돈 비둘기는 곧장 창을 통해 들어와 사방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사방화는 서둘러 비둘기 다리에서 서신을 빼냈다. 짧은 문장은 그만큼 외려 더 응축된 충격을 안겨주었다.
「제 부친은 좌상 대인이시고, 제 모친은 사봉 황후마마십니다.」
“……!”
사방화는 여러 차례 서신을 더 확인한 뒤에야 겨우 서신을 내려놓았다.
경가의 친부모가 좌상과 사방화의 고모, 사봉이라니.
‘당시 고모께서 좋아한 사람이 바로 좌상이었나? 진옥을 위해 군신들과 연합해 그를 무명산으로 몰아낸 좌상? 그 충격으로 진실을 알고도 태후가 여전히 만나길 꺼린다는 그 좌상?’
좌상은 진강이 마차 위를 뛰어넘고 질주할 때마다 분노했으며, 같은 승상임에도 우상보다는 못해 항시 그를 짓밟으려 했다. 그리고 항상 우상에게 가문을 이을 번듯한 아들이 있어 부럽단 말을 습관적으로 뱉었다.
‘형양 정씨 정탐꾼 분포도를 나에게 건넸던 그 노설영의 부친이 경가의 아버지라고?
경가가 올해 몇 살이지? 운계 오라버니는?’
사방화는 정말 무엇에 얻어맞기라도 한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시화도 사방화의 표정을 지켜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경가 공자님이 정말 북제 사람이라도 되는 겁니까?”
사방화는 고개를 젓고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아니.”
“하지만……,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경가 공자님이 뭐라고 하셨기에 이러시는 거예요? 국세가 또 기울기라도 한 겁니까?”
“아니, 그냥 놀라서. 경가의 신분이……. 내게 숨기려고 했던 것엔 다 이유가 있었어. 언신도 알고 있었지만, 내게 숨긴 거였고. 경가의 아버님이…… 좌상 대인이시고, 모친은 우리 고모님이래.”
시화도 깜짝 놀라 입까지 떡 벌어졌다.
“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러게. 나도 믿을 수 없지만, 경가가 이런 걸로 장난칠 사람은 아니니 분명 사실이겠지. 고모님이 마음에 품고 계신 분이 있단 건 알았지만, 그게 좌상 대인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
“소인은 어릴 적 사 후야를 따라 충용후부에 들어왔지만, 지금껏 이런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좌상 대인께선 의용과 인물이 뛰어나 남진에서 유명한 인재라 불리셨다는 얘기는 들어보긴 했습니다.”
사방화는 말없이 시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젊은 시절 좌상의 모습이 어땠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사방화가 아는 좌상은 자신의 앞길을 위해 많은 이들의 미움까지 살 만큼 교활해, 자는 사이 누군가에게 찔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사봉 고모님이 그런 사람을 좋아하셨다고? 거기다 좌상과의 사이에…….’
사방화가 알기로 자신은 경가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았다. 또 그녀가 태어났을 때의 사봉은 북제로 시집을 갔으며, 3년 뒤 북제 황제와의 사이에서 사운계를 낳았다.
그럼 좌상은 훗날 북제까지 찾아갈 만큼 사봉과 계속 연분을 맺고 있었단 말인가? 아니, 그럴 일은 없었다. 이러한 풍문 하나도 돌지 않았을 뿐더러, 나이를 놓고 봐도 계산이 맞지 않았다.
경가가 만약 사운계보다 어리다면 지금 진경과 엇비슷한 나이로 보여야 했으나, 경가는 겉보기엔 사운계와 겨우 한두 살 차이밖에 나 보이지 않았다. 그럼 경가는 사봉이 북제로 시집가기 전에 가진 아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것도 또 문제였다. 경가를 회임한 채로 북제에 갔다면 북제 황제, 옥 귀비, 옥씨 가문이 저리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찌 아기를 출산할 수 있었단 말인가?
‘거기다 그 갓난아기를 다시 남진으로 돌려보냈다고?’
사방화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본래는 경가의 신분에서 무언가 단서를 찾고자 한 것이었지만, 진실을 알고 머릿속만 더 엉망으로 얽혀버렸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그때, 시화가 불쑥 건넨 말에 사방화는 다시 서신을 앞뒤로 살폈다. 과연 종이 사이에 얇은 금색 잎 하나가 끼어있었다.
언신의 정혼자가 제운설이란 사실을 알고 호기심에 알아봤지만 금세 언신에게 들켜 그만두게 됐고, 그럼에도 제운설이 몇 년째 정화곡에 있으면서 북제 옥가와 잘 왕래해왔다는 걸 알아냈단 내용이었다.
역시 값진 정보였다. 제운설이 언신의 정혼자로서 북제 옥가와 가깝게 지냈다는 건 이상할 게 없지만, 그녀는 본래 북제의 선황제가 승하한 뒤 곧장 북제 황궁을 떠나 실종된 상태로 다신 돌아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제운설이 사실은 언신의 정혼자로서 옥가와 왕래하고 있었다고? 무슨 꿍꿍이지?’
북제 옥가가 그동안 상당한 모의를 벌여왔단 게 사실로 밝혀졌다. 사방화는 그렇게 천천히 머릿속을 정리하다가, 문득 옥조천이 사방화와 진옥의 시선을 돌린 게 제운설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제운설이 바로 북제가 남진에 심어둔 가장 큰 정탐꾼은 아닐까?
지난 번 진강도 제운설을 찾아 언신을 대항하는 데 이용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운설도 줄곧 남진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강이 그 짧은 시간에 북제에서 제운설을 데려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배후가 제운설이든 아니든, 깊은 관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사방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신을 불에 태우며 말했다.
“분명 제운설에게 문제가 있어.”
“소왕비마마, 경가 공자님께 답신을 보내실 겁니까?”
사방화는 조용히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됐어. 무슨 말을 하든 적절치 않을 테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나면 얘기해야겠어.”
시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좌상 대인께서 경가 공자님을 어찌 그리 좋게 보시나 했더니, 본인의 아드님이란 걸 알고 계셨던 건 아닐지요……?”
“아니, 그럴 리는 없어. 알았다면 진즉에 찾았겠지. 친아들인데다 경가는 실력이 워낙 뛰어난 사람이니까. 좌상은 본래 쓸모 있는 사람을 좋아하잖아. 여태 이 사실을 숨겼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조부님은 아실지 모르겠네. 아니, 아셨을 수도 있겠어. 내가 무명산에 갈 때 경가랑 함께 갔으니까.”
“아니면 노후야께 직접 여쭤보시겠어요?”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서신을 보내면 분명 그 흔적이 남을 테니 안 돼. 탄로 나는 순간, 조부님께서 숨어 계신 곳도 들켜버리고 말테니까. 한평생 고생만 하셨으니 편히 쉬실 수 있게 해드려야지. 남진이 평화를 되찾으면 그때 모셔올 거야.”
그 말에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소인도 일전에 시정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좌상 대인께선 본래 지금처럼 교활하고 이기적이며 모든 이들에게 미움을 사지는 않으셨답니다. 선황폐하의 중임을 얻고, 승상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이 생긴 이후로 권력 다툼을 하며 전과는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그래, 내가 그동안 도성에 없었으니 그런 소문도 들어보지 못한 거겠지. 그럼 예전엔 사람이 괜찮았단 거야?”
“우상 대인만큼은 아니시지만, 재주를 믿고 거만한 것만 빼면 그래도 소문에 떠도는 것만큼은 아니셨다고 합니다. 사실 소인도 길거리에서 주워들은 말이라 정확하진 않을 겁니다. 아니면 소왕비마마께서 한번 알아보시겠습니까?”
“됐어, 지금 좌상의 뒤나 알아볼 만큼 한가하지 않잖아. 목청 공자에게 지금 바로 형양으로 가자고 전해줄래?”
시화가 깜짝 놀랐다.
“날이 저물었는데 밤길을 떠나시려고요? 강 소왕야를 찾으러 형양에 가시겠단 겁니까?”
“응. 형양에 있단 걸 알았으니 가봐야지. 진강이 일을 마무리하려면 나흘은 더 있어야 할 거야. 지금 서두르면 내일 저녁엔 형양에 도착할 수 있겠어. 그럼 시간 낭비도 하지 않고 좋잖아.”
시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향했다.
이목청은 시화의 말을 전해 듣곤 눈살을 찌푸렸지만, 반대하진 않았다.
“매시간 챙겨 먹던 약은 얼마나 있느냐? 챙겨가서 먹을 수 있겠느냐?”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내일 저녁이면 형양에 도착할 거라고 하시니 제때 다다르기만 한다면 문제없습니다. 도성을 떠나실 때 특별히 제조하신, 심혈을 보충하는 약도 챙겨왔습니다. 늘 약과 함께 드시고 계십니다.”
이목청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내가 내일 가자고 해도 듣지 않을 테니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기껏해야 좀 늦을 뿐이니까.”
“예, 사실 강 소왕야가 아니면 누구도 소왕비마마의 고집을 꺾을 수 없기에, 소인도 별말씀은 드리지 않았습니다. 어서 떠날 채비를 할 테니, 마차를 준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화는 짐을 꾸리러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
반 시진 후, 사방화, 이목청 일행은 정정헌의 별원을 나왔다.
평양성으로 온 뒤 이목청은 현지 관리와 알고 지내서, 야밤에 굳게 닫힌 성문을 빠져나가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일행은 순조롭게 평양성을 떠나 형양성으로 향했다. 형양성은 남쪽으론 영남, 북쪽으론 막북과 통하고, 중간엔 구곡 운하가 흐르는 곳에 있었다. 이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아주 번화한 곳이기도 했다.
당시 북제가 형양 정씨를 택한 것 역시 가문의 위세도 충분히 고려했겠지만, 이 지리적 위치도 선택에 단단히 한몫을 했을 터였다.
이목청은 사방화의 몸을 생각해 한껏 속도를 늦췄지만, 결국 밤새 길을 재촉하게 됐다. 그에 날이 밝자마자 잠시 그녀를 멈춰 세웠다.
“쉬다 갑시다.”
“안 힘듭니다. 조금 더 가다가 정오에 쉬도록 해요.”
사방화의 답에, 이목청은 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난 정말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소왕비마마를 제게 맡기신 겁니다. 소왕비마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제 목숨이 달아나겠지요. 그러니 제발 말을 들으세요. 여기 남수현(蓝水县)에도 제 별원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 반나절 쉬다가 다시 갑시다.”
“그리 오래 쉬면 오늘 밤엔 절대 도착 못 할 겁니다.”
“한밤중이라도 도착하면 되잖습니까. 마마의 몸을 생각해서 그런 것이니 말 좀 들으십시오. 폐하께서 어찌 그리 마음을 못 놓으시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과연 마마를 돌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요.”
“알겠어요. 말 들을게요.”
이목청의 엄숙한 표정에 사방화도 결국 손사래를 쳤다.
이목청은 즉각 남수현 성으로 들어가 자신의 별원으로 향했다.
* * *
별원을 지키던 이는 서둘러 문을 열고 일행을 안으로 들였다.
아침을 먹고 사방화는 이목청이 내준 방으로 가 잠들었고, 시화는 사방화가 곧장 잠든 것을 보고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아주었다.
“주무시느냐?”
이목청이 바로 다가와 묻자, 시화는 걱정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마의 몸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 대인께 마마를 맡겨주신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전처럼 돌아가지 못한다는 걸 아시면서도 저리 말로만 힘들지 않다고 하시니 참 걱정입니다.”
이목청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강 소왕야를 뵈면 내가 잘 말씀드려야겠어.”
시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목청은 미간을 문지르며 옆방으로 들어가 진옥에게 서신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