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5화. 목청의 서신
저녁 무렵, 사방화도 이목청으로부터 서신을 전해 받았다.
서신엔 아주 간단명료한 한 마디뿐이었다.
「제가 고꾸라졌던 일을 기억하십니까? 소왕비마마께서 살려주신 그때 말입니다.」
사방화는 서신을 보며 안색이 수차례 변했다. 이목청이 고꾸라졌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드물었던 데다 그녀가 살렸다는 것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서신을 들여다보다 이내 불에다 던져버렸다.
마침 진옥도 어서재에서 상소를 살피다 식사를 하러 돌아왔다가, 창가에 서 있는 사방화를 보고 흠칫했다. 너무 어두운 기운이 흐르는 까닭이었다.
“무슨 일이오?”
“폐하, 도성을 좀 나갔다 와야겠습니다.”
곧장 진옥의 안색이 굳어졌다.
“또 무슨 일이오?”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지만, 제가 꼭 직접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가야 합니다.”
사방화는 진옥이 반대하기도 전, 굳건한 표정으로 절대 제 뜻을 굽힐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에 진옥도 곧장 화를 냈다.
“그래도 무슨 일인지는 알려줘야 할 것 아니오! 지금 그 몸 상태로 밖에 나가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오?”
“약도 챙겨갈 것이고, 도성을 나가자마자 서방님께 갈 테니 걱정 마십시오.”
“가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진강을 찾기 전까진 어쩌겠단 말이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대가 직접 나가 확인 해야 된다는 건가? 다 목청과 진강에게 맡기기로 얘기했잖소.”
“못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꼭 나가야만 하는 것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짐도 함께 가지.”
사방화가 즉각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성이 이제 막 평온해지고 있는데, 폐하께서 어찌 황성을 떠나신단 말입니까? 며칠 내로 준비를 마쳐 북제와 전쟁도 치러야 하잖습니까.”
“짐이 된다면 되는 거요! 계획이야 바꾸면 되는 것이고.”
사방화도 결국 화를 냈다.
“폐하, 수많은 백성들은 폐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백성의 존경을 받는 남진의 황제폐하께서 저만 감시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짐이 한 눈 판 사이 그대가 죽어버리면 백성이 다 무슨 소용이오! 황위도, 백성들의 존경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폐하……. 대체 제가 뭘 위해 이리도 애쓰는지 정녕 모르시겠습니까? 다 남진 강산을 위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폐하께서 황위를 지키지 않으시면 제 수고가 뭐가 되는 것입니까? 폐하처럼 총명하신 분이 이해득실 하나 따지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저를 따라 나가 뭘 하시려고요?”
진옥도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짐이 뭘 모르는 것인가, 그대가 뭘 모르는 것인가. 그대가 이 강산보다 더 중요하다고 짐이 몇 번이나 얘기했잖소!”
사방화와 진옥은 서로를 노려보다가, 사방화가 먼저 맥이 풀려 운을 뗐다.
“폐하께서 절 걱정하시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몇 배는 더 조심할 겁니다. 절대 다쳐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평양성에 가서 목청 공자와 만나 확인할 게 있어 그러는 것입니다. 도성에서 평양성까진 이미 숙청이 이뤄졌으니 그 짧은 길엔 위험할 것도 없습니다.”
진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목청과 만나 합류하겠다고? 목청에게 서신을 받은 건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말뜻이 애매모호 한데다 극도로 신중한 걸 보니 예사롭지 않습니다. 반드시 가봐야 합니다.”
진옥이 크게 화를 냈다.
“목청은 그대 몸 상태가 어떤지도 모른단 말인가! 소식을 전할 게 있으면 내게 알리면 되지! 반드시 짐을 기만한 죄를 벌해야겠군!”
사방화는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이런 걸로 벌을 내리신다고요? 그럼 정말 우둔한 군주가 되시는 겁니다. 지금 바로 출발해 자정엔 반드시 목청 공자와 합류하겠습니다.”
진옥은 안색을 굳힌 채 바깥에다 소리쳤다.
“소천자! 말을 준비하라!”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사방화도 즉각 화를 냈다.
“그대가 평양성에서 무사히 목청과 합류하는 걸 보고 다시 돌아오겠소. 그 정도론 내일 일정에 무리가 가지도 않을 테니 괜찮아. 그리고 월낙이 다쳤으니, 짐이 직접 보고 데려오려 하오.”
“폐하, 지금도 충분히 지치셨습니다. 제가 비바람 하나 견디지 못할까요?”
진옥은 콧방귀만 뀌었다.
“옷 갈아입고 올 테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준비나 하시오.”
사방화는 이마를 문지르며 앞으론 차라리 진강이 가는 곳을 따라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진강은 그래도 자신의 남편이고, 자신에겐 늘 져주는 정인이었지만 진옥은 당최 사람이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데다 이 나라 제왕이기까지 하니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그녀가 황제를 어찌 이기겠는가.
황송하게도 군주의 지극한 보살핌을 넘치도록 받았고, 군주의 성질도 충분히 다 감당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진강이 어떠한 거친 곳을 가든 내내 진강의 곁에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사방화도 이젠 진강이 가는 곳을 계속 따라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진강과 자신은 이미 생사를 함께할 운명이 됐고, 이대로 아무 일 없이 평생을 살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이렇게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먹자, 한결 홀가분해졌다.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강과 생사를 함께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진옥의 바람을 따라 평양성까지 동행한 뒤, 두 번 다신 진옥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평생에 폐를 끼쳐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남편 진강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길고도 짧은 일생,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도 나쁠 건 없었다.
사방화가 곧 시화에게 분부를 내렸다.
“시화, 지금 바로 평양성으로 떠날 테니 어서 짐을 꾸리거라.”
시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사방화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마마, 그런데 영친왕부에 가서 왕비마마께 말씀을 올릴까요?”
“어머님께서 아시면 분명 걱정에 잠도 못 이루실 테니 말하지 마.”
시화는 다시 방을 나가려는데, 사방화가 갑자기 시화를 불러세웠다.
“아, 시화! 옷은 많이 필요 없으니 사제로 만들어 뒀던 심혈을 보강하는 약만 모두 가져오도록 해.”
시화가 깜짝 놀라 말했다.
“마마! 열두 병이면 자그마치 반년 치 양인데, 이걸 전부 가져가시겠다고요? 그럼…….”
“상황을 보고 결정할 거야.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수도 있으니 금방은 돌아오지 못할 거다.”
“알겠습니다. 그럼 품죽과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데려가실 겁니까?”
사방화는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랑 시묵만 있으면 충분해. 나머지 아이들은 영친왕부로 돌아가 낙매거를 지키라고 해줘.”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시화가 떠나고, 사방화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내전을 빠져나왔다.
* * *
먼저 준비를 마치고 입구에서 기다리던 진옥이 사방화를 보고 말했다.
“이 아이도 데려가시오. 이제부턴 그대의 사람이오.”
사방화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내관을 데려가서 뭘 하겠어요. 불편하기만 하니 됐습니다.”
소등자는 즉각 땅에 무릎을 꿇었다.
“소왕비마마,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소인은 이제 마마의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마마께서 어딜 가시든 반드시 함께 따를 것입니다. 소인, 목소리를 바꿔 절대로 소왕비마마께 불편을 끼치는 일은 만들지 않겠습니다. 마마께서 소인을 원치 않으신다면 이 쓸모없는 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대가 필요 없다면 그냥 죽이면 그만이오.”
진옥이 끝으로 쐐기를 박자, 사방화는 그를 노려보며 소등자에게 말했다.
“그래, 따르도록 해줄 테니 그만 일어나. 그러나 내 사람이 된 이상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하루가 멀다고 다른 이에게 내 소식을 전했다간 큰일이 날 수 있다.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있지만, 내 낭군님이 누구신지는 알지? 천하의 강 소왕야가 두렵지도 않다면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
“예, 소왕비마마! 소인, 마마와 소왕야 뜻을 잘 따를 것입니다.”
소등자의 답을 듣고 진옥은 콧방귀를 뀌며 밖으로 향했다. 이내 사방화도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 * *
황궁 밖에는 말과 호위들, 시화와 시묵이 떠날 채비를 마치고 서 있었다.
진옥과 사방화는 말에 올라타 함께 성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거리에는 여전히 비가 오고 난 뒤의 상쾌한 기운이 남아 있었고 말의 움직임에도 먼지 한 점 일지 않았다.
일행은 곧 성문에 다다라, 막 성을 나가려는데 순간 왼쪽에서 마차 한 대가 튀어나와 성 입구를 가로막았다. 다급히 고개를 내민 건 좌상이었다.
“폐하! 이 밤에 소왕비와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다사다난한 시기이니만큼 옥체를 보존하셔야지요. 소왕비도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진옥은 웃으며 좌상에게 말했다.
“좌상, 마침 잘 오셨군. 내일 조회 전까지 짐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변함없이 그대로 일을 진행토록 하라 전해주시게.”
“폐하! 소왕비와 어디로 가시는 건지 말씀해주시지 않으셨잖습니까!”
“평양성. 최대한 내일 조회 전까지 돌아오도록 할 테니 더는 묻지 말게.”
진옥은 손을 내젓고 먼저 성문을 빠져나갔다.
이내 사방화도 좌상을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좌상 대인, 왕비마마께서 제가 나간 걸 아시면 몇 날 며칠 걱정에 잠 못 이루실 테니 비밀로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녀도 곧장 진옥의 뒤를 따라 성문을 빠져나갔다.
좌상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 호위대가 두 사람의 뒤를 따랐고 눈 깜짝할 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차를 붙잡고 한숨을 내쉬며 또 평양성엔 무슨 일이 있기에 그러는 것인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평양성은 도성에서 쉬지 않고 달리면 두 시진 반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옥은 사방화의 몸 상태를 배려해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며 자정이 지나서 평양성에 도착할 수 있도록 했다. 사방화의 예상대로 평양성으로 가는 길은 이상하리만큼 고요했으며 아주 순조로웠다.
성 입구에 닿으니, 일찍 소식을 듣고 이목청이 사람들과 기다리고 있었다.
진옥은 말고삐를 당기며 이목청을 향해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고 이목청이 예를 갖추자 진옥은 아무렇게나 손을 저으며 다짜고짜 그에게 경고를 했다.
“목청, 어서 짐에게 방화가 평양성에 와야만 하는 이유를 대라. 그렇지 않았다간 곧장 죄를 물을 거다.”
이목청은 곁에서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사방화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신도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확실한 이유를 대진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즉시 벌을 내려주시어 신이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진옥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금 짐과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죽으라면 죽을 준비도 돼 있습니다.”
“알면 됐다! 지금 어디서 묵고 있나?”
진옥은 살짝 이목청을 흘겨보곤, 말을 성 쪽으로 몰며 물었다.
“정정헌(井亭轩) 별원에 묵고 있습니다.”
“그래, 안내하라!”
이목청은 말에 올라 진옥과 사방화를 정정헌 별원으로 안내했다.
이내 이목청이 사방화에게 물었다.
“마마, 힘들지는 않으십니까?”
“응, 괜찮아요.”
사방화의 답을 듣고, 진옥이 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힘들면 그게 더 이상하지.”
결국 사방화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진옥에게 말했다.
“폐하! 벌써 이렇게 다 왔잖아요. 뭘 그리 쓸데없는 말씀이 많으십니까? 그래요, 가는 길마다 어슬렁어슬렁 당나귀 타는 것보다 더 느리게 와서 힘들 리도 없습니다!”
진옥은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목청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폐하께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된 겁니까?”
사방화도 헛웃음을 지었다.
“새장에 갇혀 매일 감시당해 봐요. 공자님도 그렇게 될 겁니다.”
진옥은 바로 사방화를 째려보며 말했다.
“그대는 원래 짐에게 예의를 차렸던 적이 없었소.”
사방화도 픽, 웃음을 터뜨리며 지난날을 떠올렸다.
진옥이 황자이던 시절부터 황태자, 황제에 오르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드높고 존귀한 신분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방화는 자신이 정말 한순간도 진옥에게 예의를 차렸던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이제 진옥이 황위에 오르고부턴 죽마고우인 이목청, 연석도 그를 한껏 공경했고 노신들도 더더욱 전전긍긍했지만 사방화만은 바뀐 적이 없었다. 아니, 세상에 사방화보다 황제를 더 막 대하는 이는 한 사람 더 있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했던가. 사방화는 그래도 높임말이나마 갖추며 마음대로 한다면 진강은 심지어 존칭, 높임말은커녕 심부름까지 시켜가며 황제에 대한 예는 깔끔히 생략했다. 어쨌든 생각해 보면 진옥이 황제란 자각도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대하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진강과 사방화 뿐이었다.
사방화는 다시 피식, 웃으며 문득 이목청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목청 공자, 그런데 우리 낭군님과는 연락이 닿았나요?”
이목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요.”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 멀리 가 있는 거 아닐까요? 막북에서 돌아오려면 한참 걸리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마마께서 한 번 더 연락해 보시지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