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3화. 천만다행이라 (1)
쏴아아-
빗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거세져 마차를 뚫을 듯 쏟아져 내렸다. 날은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져 안 그래도 뒤숭숭한 오늘을 더욱 어지럽혔다.
“도성이 조용해졌으니 남은 서산 군영 병사들은 모두 철수시키시지요.”
사방화의 말에 진옥이 명을 내렸고, 25만 군사는 서산 군영으로 돌아갔다.
진옥과 사방화도 마차에 올라 막 출발하려는데, 소천자가 말을 타고 돌아와 가쁜 숨을 고르며 말했다.
“폐하, 이목청 대인께서 병사들을 데리고 뒤쫓아가셨습니다.”
“그래.”
진옥이 대답했다.
사방화는 곧 마차에 있던 이불을 덮고 진옥에게 물었다.
“폐하, 이번 조정에 사람을 얼마나 들이십니까?”
“34명.”
“모두 특출난 인재들만 뽑은 것이겠지요?”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좌상과 목청의 안목이니 당연히 재주가 넘치는 이들이겠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 소후야께선 군량미 준비가 어떻게 돼가고 있다고 합니까?”
“앞으로 길어봐야 열흘이면 모든 준비를 마칠 듯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순조로이 흘러가고 있소. 백성들도 도와줘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고.”
“북제는……, 고모님이 이 일을 알게 되신다면 남진으로 돌아오실지 북제에 남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북제 황제와 정을 나누며 지내왔잖소. 무려 일국의 황제에게 받았던 대우도 결코 박하지 않을 텐데 돌아오려 하진 않겠지.”
사방화가 말했다.
“사실 전 태어나 한 번도 고모님을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돌아오지 않으신대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강제로 갔든, 원해서 갔든 북제는 어쨌거나 고모님이 오래도록 사신 곳 아니십니까.”
“그렇지. 조정에서도 사봉 아가씨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딱히 상관없단 입장이오. 남진 백성들도 그대 고모님 수고를 다 알아서 돌아오지 않아도 북제 황제가 놓아주지 않는 거라 생각하지, 고모님을 탓하진 않을 것이오.”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모님은 애초 비난 같은 것엔 신경도 안 쓰실 겁니다. 저는 그냥 고모님을 한번 뵙고 싶습니다. 이제 이 남진 도성엔 사씨 육방을 제외하면 저 혼자밖에 없지 않습니까.
요즘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외롭게 살다 갈 운명으로 정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태어나 고작 몇 년 살다 8살엔 무명산으로 떠나 최근까지 홀로 지냈습니다.
그렇게 겨우 다시 집으로 돌아왔는데 조부님, 오라버니들과 얼마 지내지도 못하고 혼인을 하게 됐지요. 할 수 없는 상황에 또 조부님, 외숙부님, 임계 오라버니를 떠나보내고 우리 오라버니마저 막북에 가셨으니 이 도성엔 또 저 홀로 남게 됐습니다.”
진옥이 그녀를 나무랐다.
“그대가 어찌 그런 운명을 타고났단 말이오! 하여간 또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군. 몸조리나 신경 쓰고 매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만 찾으면 앞으로 함께할 날은 널렸소.”
사방화는 웃음을 터뜨리곤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요즘은 쓸데없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 머리도 다 굳어버린 것 같고요. 몸뿐 아니라 머리까지 다친 것 같은 기분인데 황궁이 너무 답답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폐하, 지금 영친왕부로 데려다주실 순 없겠습니까?”
“안 돼. 진강이 돌아올 때까진 절대 그럴 수 없으니 꿈 깨시오.”
“이젠 도성도 잠잠해졌지 않습니까.”
“정말 잠잠해진 건지 장담할 수 없어. 악랄하고 간사한 적을 만났으니 긴장을 늦춰선 안 돼. 이틀 내로 도성을 빠짐없이 조사해 갈아엎어야겠어.”
사방화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진옥도 사방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조용하게 말했다.
“오늘 많이 무리했으니 더 이상 그대는 이 일에 신경 쓸 필요 없소. 몸조리에만 신경 쓰시오.”
“네.”
* * *
도성 입구엔 영친왕부, 영강후부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 진옥의 마차가 오는 것을 보고 영친왕, 영친왕비, 연석, 연람이 각자 마차에서 나란히 내려왔다.
소천자가 이를 아룄고, 진옥은 곧장 마차를 세우라 분부했다.
막 잠이 들려던 사방화가 바깥의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방화, 백모님, 백부님, 연석과 연람이 왔소. 소식이 전해졌나 보군. 마음이 놓이질 찾아오신 것 같아.”
진옥이 바로 마차 휘장을 열어젖혔다.
“백모님, 백부님.”
네 사람은 곧장 마차 앞으로 다가왔다.
영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옥과 인사를 나눴지만, 영친왕비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듯 곧장 마차 휘장을 열고 사방화의 손을 붙잡았다.
“아가야! 괜찮니? 다친 데는 없고?”
사방화도 금세 마음이 따뜻해져 뭉클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 전 괜찮습니다.”
“정말이냐? 근데 안색이 어찌 이리 나빠? 손은 또 왜 이리 차고?”
사방화를 여기저기 살피는 영친왕비를 보고,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힘들어서 그럴 겁니다.”
“그래, 어서 궁으로 들어가 쉬거라.”
“어머님, 왕부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황궁에만 있으니 너무 답답해요.”
사방화가 영친왕비 손을 잡으며 울적하게 말하자, 진옥이 눈을 크게 떴다.
“낙매거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땐 가만히 있다가 어찌 궁에 들어오니 답답하다고 하는 것이오? 조용히 궁에서 지내시오. 도성이 이리 시끌벅적한 데다 백부님, 백모님께선 아직 계수 때문에 놀라셨던 마음도 추스르지 못하셨소. 그러니 폐 끼치지 말고 가만히 계시오.”
사방화는 순간 말문이 막혔고, 영친왕비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그래, 방화야. 황상 말씀이 옳아. 황상께서 곁에 계시고 네가 무사하다니 어미도 마음이 놓인다. 황상 곁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하단 걸 너도 알잖니.”
사방화는 답답한 마음에 더 이상 말도 잇지 못했다.
영친왕비도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방화는 여태 단 한 번도 이렇게 아이처럼 투정을 부린 적이 없었다. 얼마나 황궁에 가기 싫고 답답했으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너무 가여웠다.
“방화야, 조금만 참자. 응? 안 그래도 강이가 오면 널 당장 왕부로 데려가려 할 때니 그때까지만 조금 참자꾸나.”
‘진강은 대체 언제쯤 돌아올까. 잠은 잘 자고 밥은 잘 먹고 있을까? 다치진 않았으려나? 나를 보고 싶어 하긴 할까?’
사방화는 진강의 이름 하나로 갑자기 쏟아지는 그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님. 잘 참아보겠습니다.”
영친왕비도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옥은 곁에서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소왕비마마, 짐이 입는 것부터 먹는 것까지 전부 좋은 것으로만 극진하게 대접해드리고 있는데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고 투정만 부리시는 겁니까? 사방화, 정말 양심은 있는 것이오?”
사방화도 순간 자신이 조금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화제를 돌리며 연석과 연람에게 물었다.
“석 소후야, 연람! 두 분은 어떻게 오셨어요?”
연람이 가까이 다가와 조금 소리를 낮춰 말했다.
“당연히 걱정돼서 왔지요. 오라버니가 소식을 듣자마자 가겠다기에 저도 바로 따라나섰어요. 방화, 근데 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바로 이 황궁 아닌가요? 기회가 있을 때 마음껏 누려요!”
사방화는 바로 입술을 삐죽였다.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고요? 연람, 차라리 연람도 여기 와서 같이 지내는 게 어때요?”
연람이 곧장 뒤로 물러났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어머니 출산이 임박해서 곁을 떠나면 안 돼요.”
그러자 진옥이 연람을 보며 말했다.
“산파들을 보내 후 부인을 보살피라 해드릴 테니 들어와 지내도 괜찮다. 어차피 혼인을 하지 않은 낭자라 아이를 받지도 못하잖아.”
연람은 깜짝 놀라 연석의 뒤로 숨으며 얼굴을 반쯤 쏙, 내놓고 답했다.
“폐하! 황궁이 좋긴 해도 어머니 곁을 떠날 순 없습니다. 산파가 몇 명이 되더라도 친딸이 곁에서 보살펴주는 것보단 못할 테니 말입니다.”
진옥이 픽, 웃음을 지었다.
“일리는 있군.”
연람은 몰래 눈을 크게 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황궁이 얼마나 답답한 곳임을 아는데 당연히 제 발로 들어갈 리는 없었다.
연석은 연람을 힐끗 보곤 다시 사방화를 훑어보다 진옥에게 말했다.
“폐하, 목청을 보내버렸으니 이젠 누구에게 제 뒤를 봐주라 하실 겁니까?”
“정효순을 써라.”
“필요 없습니다! 다른 이로 주시지요.”
진옥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효순이 어때서? 도움이 되질 않는 거야, 말을 듣질 않는다는 거야, 아니면 쓸 수가 없다는 거야?”
“꼴 보기가 싫어서 그럽니다! 쓸모가 있든 없든, 말을 듣든 안 듣든, 쓸 수 있든 없든 무조건 안 쓸 겁니다.”
“그럼 혼자서 해결하던가.”
진옥이 간단히 답한 뒤, 영친왕과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백모님, 백부님.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있는 한 문제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도성에서 있었던 일은 백부님께서 같이 힘을 좀 써주셔야겠습니다.”
“염려 마세요, 황상. 도성도 한바탕 정돈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니.”
진옥도 영친왕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마차 휘장을 내리며 분부했다.
“궁으로 가자!”
* * *
도성 안으로 들어섰지만, 줄곧 내리는 비에 백성들은 오늘 남진의 피바람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성루 포각루에 짙게 풍기던 피비린내도 억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비에 삽시간에 다 씻겨 내려갔고, 남진 도성은 폭우가 주는 고요함 속에 그 고유의 성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방화는 휘장을 걷고 밖을 한번 바라보았다. 거리는 짙은 빗줄기에 한층 더 깨끗해졌지만 사방화의 마음엔 더 울적한 얼룩이 졌다.
시무룩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눕는 사방화를 보고, 진옥이 말했다.
“걱정 없이 먹고 자게 해주는 황궁을 감옥 들어가듯 하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그대 하나뿐일 것이오. 사실 나도 황궁이 좋지만은 않아.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잖소. 내가 아니면 들어갈 사람도 없으니. 나도 황궁이 싫지만 그대처럼 싫은 티 마음껏 내면서 지내지는 않잖소.”
“이 나라 황제폐하께서 어찌 한낱 여인과 비교하시는 겁니까?”
사방화는 진옥을 살짝 째려보곤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뒤 이불을 덮고 편전에 돌아가면 약을 먹고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 지금 한낱 여인이라고 했소?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그에 맞게 살아야지. 세상 어디도 그대처럼 나랏일에 골머리를 앓는 여인은 없을 것이오.”
사방화는 아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조용히 쫑알거렸다.
“황제폐하께선 잔소리에도 일가견이 있으시군요. 뭐라고 하셔도 전 한낱 여인이 맞으니, 폐하께선 부디 저보다 멀리 앞을 보는 제왕이 되어 주십시오.”
진옥은 기가 찬 듯 웃다가 등받이를 잡곤 그녀의 몸에 살짝 기댔다. 사방화도 그냥 모른 척 눈을 감고 잠들기 위해 애썼다.
사방화는 번데기처럼 이불을 꽁꽁 싸곤 머리카락 하나 보이질 않았다. 이제야 좀 추위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진옥은 그런 사방화를 보고 명했다.
“소천자! 지금 시화에게 곧장 생강탕을 끓여 소왕비가 궁에 드는 즉시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해두라 전해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천자는 서둘러 먼저 황궁으로 향했다.
사방화는 이불 안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스스로 아주 짜증 나게 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진옥은 화 한번을 내지 않았다. 과연 그는 일국의 제왕답게 포용력도, 마음도 매우 넓은 사람이었다.
그때, 마침 진옥이 등받이에 기대며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짐이 아무래도 그동안 눈이 멀었던 것 같소. 그대가 평생 진강의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오.”
사방화는 이불 속에서 다시 눈을 부릅뜨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