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2화. 치밀한 계획
마차 밖으론 눈과 비를 막는 지붕이 있어 내부가 아주 말끔했다.
사방화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생각에 잠겼고, 진옥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무슨 생각 하시오?”
“그 자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 폐하도, 저도 아는 사람일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선 여태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정탐꾼들을 버리면서까지 스스로를 지킬 방법을 쓰진 않았을 겁니다. 겉보기엔 그저 스스로를 위해 아주 악랄한 수단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폐하와 제게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 그랬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럼 누구일 것 같소? 추측이 좀 되시오?”
진옥이 눈썹을 들썩였다.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떠오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는 오직 사운란 뿐이오. 이상하지 않소? 여운암에서 그대와 죽으려다 진강이 심수간에서 찾아내자 곧장 거기를 떠났소. 도성에도 돌아오지 않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그런데 오늘 배후자가 사운란 별원에서 나와 도성을 떠나갔소.”
사방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잠시 한숨을 쉬었다.
“폐하, 제가 아니라면 아닌 겁니다. 설령 오라버니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거나 별원 비밀 통로를 빌려 떠났다고 해도 우리 시선을 운란 오라버니에게로 돌리려는 수작일 뿐입니다. 그 자가 시선을 돌리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폐하께서도 다 보셨잖습니까. 얼마나 치밀한지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 말도 일리가 있군.”
“운란 오라버니 별장에 도착하면 다시 이야기해보기로 하시지요.”
사방화가 피곤한 듯 눈을 감자, 진옥이 바로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래놓고도 몸이 다 나았단 말이 나오는가? 그대 안색이 좀 어떤지 보게.”
“폐하, 폐하의 안색도 좀 확인해 보시지요. 전 폐하보단 낫습니다.”
사방화는 다시 눈을 감았고, 두 사람이 탄 마차는 5천 호위들과 함께 폭우를 뚫고 사운란의 별장으로 향했다.
* * *
사운란의 별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쳐부숴라.”
진옥은 사방화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명령을 내렸다.
날카로운 도끼질 한방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우당탕 열렸다. 호위들은 한발 앞서 들어가 신속하게 곳곳을 점령해 살폈고, 진옥과 사방화는 우산을 쓰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별장은 텅텅 빈 채로 방치돼 뜰에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호위 통솔자는 한 바퀴 수색을 마친 뒤 진옥에게 아뢰었다.
“폐하, 아무도 없습니다.”
“암실의 비밀 통로도 살펴보거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진옥이 사방화를 내려다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여기저기 둘러보시지요.”
본채와 화당을 지나 암실 문을 열자 사운란이 분심을 억제하기 위해 마련해 둔 밀실이 보였다. 이미 이곳엔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텅텅 빈 별장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계단 위로는 이끼까지 끼어있었다.
사방화는 방을 나와 지붕 아래서 뜰을 쳐다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운란 오라버니 별장을 이용해 또 우리 시선을 돌린 것 같습니다. 5리 밖에서 사람이 나타난다면 제가 곧장 여길 떠올릴 거라는 걸 알고 꾸민 짓이지요. 성동격서(聲東擊西)네요.”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우리의 시선을 돌리는 걸로 간단하게 끝나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대 생각은 어떻소?”
사방화는 순간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폐하, 월낙이 떠난 지 얼마나 됐습니까?”
“반 시진은 됐겠지. 혹시……. 유인해 내려는 게 아니라 설마……!”
진옥의 안색도 순간적으로 돌변했다.
“유인해 죽이려는 것 같습니다. 어서 월낙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정말 또 다른 계략이 숨어 있는 거라면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진옥이 소리쳤다.
“여봐라!”
“예, 폐하!”
누군가 곧장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은위는 즉각 월낙을 쫓아가 총력을 다해 구출해내도록 하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그는 곧장 사운란의 별장을 뛰어 넘어갔다.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서산 군영의 5만 명도 더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옥이 바로 그녀를 내려다보자, 사방화가 다시 침착하게 이야기했다.
“정말 도성 거점에 있던 132명 정탐꾼이 끝일까요? 분명 사씨 정탐꾼을 제거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거점에다 더 심어뒀을 겁니다. 그 거점에서 월낙과 폐하의 암위들을 유인해 일거에 쳐부수려는 계획일 겁니다. 모든 이들이 무너질 것을 대비해 군대를 동원하려는 겁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통령을 보내면 어떻겠소?”
사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목청 공자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어서 알려야해요!”
“나쁘지 않겠군. 이 정도로 대단한 자라면 이 통령도 당해내지 못할 테니.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가고 싶다만 그대를 도성에 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안심이 되질 않소. 몸이 나아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날 따라 같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목청을 보냅시다.
소천자! 당장 목청에게 월낙을 뒤쫓아 가라고 전해라. 월낙이 분명 표식을 남겨뒀을 테니 그걸 따라가면 될 것이다. 부디 최소한의 인명 피해로 월낙과 암위들을 구해내도록 하라고 전해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천자가 서둘러 마당을 뛰쳐나갔다.
사방화는 황급히 별장을 뛰쳐나가는 소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겁게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만큼이나 그녀의 마음도 싸늘히 식어만 갔다.
배후자는 허 의원을 성문에다 걸어놓는 그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치밀하게 연속적인 작전을 짜낸 것이다.
먼저 일부러 모습을 드러내 월낙과 진옥의 암위를 유인한 뒤 포각루에서 공격을 쏟아붓곤, 사방화와 진옥의 시선을 사운란 별장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그 사이 앞서 사씨 정탐꾼을 죽였던 것처럼 월낙과 암위들을 소리 없이 무참히 쳐부수려는 계획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진옥이 포각루에 있던 북제 정탐꾼 132명을 다 휩쓸었다고 해도 월낙과 진옥의 암위를 비롯한 사씨 정탐꾼들까지 그 자의 꼬임에 넘어가 모두 다 죽게 된다면 어디까지나 손해를 보는 건 진옥과 사방화뿐이었다.
아주 세심하게 상황을 살피며 침착하고도 확실한 병법을 동원하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대체 누구일까? 어떻게 지금껏 남진에 숨어 있었던 거지? 거기다 진옥과 사방화의 계획을 읽고 또다시 상황을 뒤집는다는 건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사방화의 가슴은 차디찬 빗줄기처럼 싸늘해졌다.
과연 옥조천 같은 인물을 유인할 수 있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진옥 역시 배후자를 잡아내려다 오히려 역습을 당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서 두 사람은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 * *
한참 후, 사방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폐하, 월낙도 옥씨이지요?”
진옥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사방화는 쏟아지는 빗발 사이로 멀지 않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월낭과 똑같은 옥씨네요. 옥씨 가문이 월낙을 한 번만 구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옥의 눈빛은 성난 비보다 더 심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짐이 제위에 오른 이래, 가장 심각하게 밑으로 곤두박질친 것이라 할 수 있소. 그대가 영친왕부에서 다친 건 짐이 곁에 있질 않았던 것이라 쳐도, 이제 와보니 바로 내 발밑에 있었어……. 어찌 이리 무능할 수가…….”
쾅-
진옥은 무력감에 맨주먹을 그대로 단단한 기둥에 내려쳤다. 곧바로 진옥의 주먹에선 피가 쏟아져 내렸다.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사방화는 진옥을 보곤 바로 눈을 크게 떴다.
“폐하! 지금 뭐 하시는 것입니까! 옥체를 생각하셔야지요! 폐하께서 대체 뭐가 무능하시다는 겁니까? 그 놈은 음지에 있고 우리는 양지에 있습니다! 이미 많은 목숨을 앗아간 그 자는 반드시 철저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양심을 갖고 움직이니 그 놈과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진옥은 아주 깊고도 어두운 눈빛으로 사방화를 내려다보았다. 사방화도 그런 진옥의 눈을 힘껏 쏘아보다 바깥을 향해 외쳤다.
“여봐라! 어서 폐하의 상처를 봉해드리거라!”
진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나라의 제왕과 황권이 눈앞에서 누군가의 도발에 놀아나고 있는데 그 어떤 황제가 분노하지 않을까. 하지만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미처 계산하지 못했던 것일 뿐, 이제 다시 앞으로의 방법을 찾는 것 외엔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누군가 약상자를 가져와 진옥의 상처를 감싸주었다.
진옥은 줄곧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방화 역시 제왕의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갈지 이해하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폐하, 제발 스스로를 탓하지 마십시오. 이는 오로지 제가 다쳐서 폐하께 폐를 끼친 것입니다. 저만 없었다면 폐하께선 진작에 모든 걸 눈치채고 직접 손을 쓰셨을 테니 지금처럼 이렇게 무력해하진 않으셨겠지요.”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리는 그녀를 보고, 진옥도 미안함에 미간을 문질렀다.
“그래, 그러니 내가 이토록 그대 한 사람을 위해 노력하고 있단 것만 기억하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서 짐의 은혜를 갚아야 하오.”
사방화도 진옥을 올려다보며 끄덕였다.
“당연합니다.”
진옥은 한숨을 한번 내뱉고 말했다.
“이제 궁으로 돌아가지.”
하지만 사방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왜, 여기서 살 건가?”
다시 이어진 진옥의 말에, 사방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자에게 제 마음을 읽혔다는 게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운란 오라버니가 도성에 있지 않은데도 운란 오라버니를 이용해 절 함정에 빠트린 것이지 않습니까. 정말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사씨 사람일 수도 있지 않소?”
사방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것 같진 않습니다. 사실 사씨엔 우리 묵함 오라버니, 운란 오라버니, 운계 오라버니, 임계 오라버니를 제외하고 특출난 분은 없습니다. 이처럼 악랄하고 빈틈없는 계략을 짠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고요. 절 이렇게까지 잘 아는 사람이 대체 누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진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신이라면?”
“언신이요? 서방님이 열흘 전 언신과 연락할 방법을 달라기에 매를 보내줬는데 지금쯤 연락이 닿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언신이 도성에 있다면 낭군님이 모르실 리도 없고 지금껏 아무 소식조차 없는 걸 보니 분명 도성엔 없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어찌 언신일 수 있겠습니까?”
“언신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군.”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전 언신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도 언신은 그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지 않소?”
“네,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언신은 아닙니다, 그럴 리 없어요.”
“어찌 그리 장담하는 것이오? 언신은 본래 북제 소국구고, 옥조천 친조카에 옥조연 아들이오. 옥가의 눈에서 벗어나 무명산으로 가게 됐고 옥조천처럼 일찍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허 의원도 사씨 육방에 몇십 년을 머무르면서 육방 가주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줬더라도 매번 때를 노렸을 거란 말이오. 언신이 그간 그대에게 잘 대해준 것도 깊은 신뢰를 쌓아야만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여 일격을 가할 수 있으니 그랬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소?”
사방화는 미간을 문지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는 마치 그녀의 마음속을 뚫고 서늘한 풍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폐하, 이 세상엔 서로를 알아주고 아껴주는 사이가 있지 않습니까? 정인으로서 사랑하진 않아도 가족처럼 깊은 사이가 있다면요? 언신과 저는 그런 사이입니다. 언제, 어느 상황에 처하더라도 전 언신을 믿습니다. 언신이 북제 소국구라는 것과 저희 사이는 아무 관련도 없습니다.”
진옥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신을 이야기하는 사방화의 눈은 너무도 맑고 투명했다. 진옥도 그런 사방화의 반응을 보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폐하, 이제 가시지요.”
이어진 사방화의 말에 진옥은 고개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