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1화. 적을 유인해 내다 (2)
반 시진 후, 비는 더욱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성 밖 30만 군사들은 거친 빗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우뚝 서 있었다. 사방화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문득 그들을 칭찬했다.
“귀하게 자란 귀족 자제들께서 참 강건하시네요. 내내 도성 기슭 군영에만 있어 비바람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끈기나 기백이 부족할 줄 알았는데.”
진옥도 성 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진강 덕이오. 계속 서산 군영에 지내며 느슨했던 군영을 새로이 다잡았으니까. 진강이 아니면 서산 군영에 사건이 터졌던 그때도 그냥 조용히 넘어갔을 리 없소.”
이내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께서 서방님을 칭찬하시는 날도 다 오네요.”
진옥이 사방화를 살짝 째려보았다.
“마음을 꼭 입으로 내뱉어야 하는 건 아니잖소. 평생 진강보다 부족한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시고서야 깨달았소. 이제껏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니 난 역시 진강보다 한참이나 부족하단 걸.
난 그동안의 일들과 배후에 숨은 자의 계략을 꿰뚫어 보지도 못해 줄곧 휘둘리기만 했소. 하지만 진강은 나랑 티격태격한다는 그럴듯한 구실 하나를 세워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많은 일을 해왔지.
지난 일들을 봐도, 지금까지도 난 아무리 봐도 진강이 천하에 제일 뛰어난 인물이라 확신하오. 진정 황좌에 올라 세상을 호령해야 하는 기재가 맞지만, 괜한 내가 이 자리에 올라 꼼짝없이 도성만 지키고 있는 신세가 됐지.”
사방화는 진옥을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폐하, 황좌는 기량과 재주도 없는 분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일국의 제왕이 된다는 건 당연히 능력이 출중하신 분이어야 가능한 일이지요. 아무나 이 강산을 장악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그러다 사방화가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먼 곳을 보며 외쳤다.
“어? 폐하! 성 5리 바깥에 저게 무엇이지요? 누군가 말을 타고 떠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진옥도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가 안색이 돌변했다.
“그렇소. 급히 질주해 떠나고 있는 듯해.”
“어서 쫓아가야 합니다!”
사방화의 말에 진옥이 곧장 품에서 연막탄을 꺼내 성 밖으로 던졌다.
말을 탄 자는 눈 깜짝할 사이 빗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누가 뒤쫓습니까? 월낙인가요?”
사방화가 물었다.
“내 신호탄을 본다면 월낙이 곧장 뒤쫓을 것이오. 월낙이 아니고선 저 엄청난 자를 당해낼 수도 없을 테지. 그런데 우리가 줄곧 도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찌 5리 바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오? 설마 도성을 빠져나가는 비밀 통로 중, 뚫려 있던 곳이 있기라도 한 건가?”
진옥의 말에, 사방화는 말을 탄 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서 가장 가까운 곳은 운란 오라버니 별장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라버니는 사씨 미량을 싫어하고 몸도 좋지 않아, 성 밖에 집을 짓고 지냈습니다.”
진옥이 바로 화를 냈다.
“정말 사운란이라고? 내가 방금 말했는데…….”
“오라버니는 아닙니다. 정말 운란 오라버니였다면 지금 이 시기에 말을 타고 떠날 리도 없고, 도성에 계속 계셨다면 분명 제 사람이 오라버니를 찾아냈을 것입니다. 절대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럼 저 자가 사운란의 별장 쪽에서 나온 건 어찌 설명할 것이오?”
“가서 확인해 보면 알겠지요.”
진옥도 곧 화를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사방화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칫하곤 크게 소리쳤다.
“큰일입니다! 적을 유인해 내는 계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사방화가 막 입을 떼던 그 순간, 무수한 화살들이 쏟아졌다.
진옥은 깜짝 놀라 서둘러 사방화를 감쌌고, 우산을 무기 삼아 내력을 다해 날아오는 화살들을 막았다.
사방화도 진옥의 아래서 화살이 날아든 쪽을 살펴봤다. 화살은 맞은편 포각루에서 빗줄기보다도 더 촘촘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포각루는 남진 도성의 가장 견고한 외벽 보루였다. 그마저 다른 이에게 점령당했다니, 한눈에 봐도 배후는 남진 도성에 매우 깊숙이 자리한듯했다.
진옥은 사방화를 보호하며 가장 앞에서 날아들던 화살을 막아내느라 우산은 이미 말벌집이 돼버렸다.
하지만 화살은 다시금 날아들어, 사방화도 우산을 둥글게 만들어 던졌으나 그녀의 우산 역시 금세 화살이 박혀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다행히 두 사람은 뛰어난 무공고수라 내력을 써 털끝도 다치지 않았다.
화살은 그렇게 눈 깜짝할 새 세 차례나 연이어 쏟아졌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비도 억수같이 쏟아져 내려 자리를 지키고 있던 호위들은 진옥과 사방화를 지키는데 사력을 다했다.
누구도 성벽 맞은편 포각루에서 공격이 시작되리라곤 예상치도 않았다. 거기다 암위들은 거의 도성 곳곳에 고루고루 배치해두어서 정작 진옥과 사방화 주변을 지키는 호위들은 그리 많지도 않았다.
첫 번째 대열이 앞으로 나아갔지만, 빈틈없이 날아드는 고수의 엄청난 화살에 호위 절반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진옥도 이제야 이것이 배후의 엄청난 계책임을 깨달았다. 진옥의 가장 유능한 암위 월낙을 다른 곳으로 파견한 새, 수많은 병력을 동원해 화살을 쏟아냈다. 실로 호랑이를 산에서 빼내는 것 같은 교활한 책략이었다.
진옥은 곧 호위들이 속속들이 빈자리를 메우는 것을 보고, 자신과 사방화를 엄호하던 이들에게 명령했다.
“즉시 맞은편 포각루를 포위하도록 하라! 살아나갈 수 있는 두 곳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라.”
“예, 명 받들겠습니다!”
호위 대령이 서둘러 명을 이행하러 떠난 뒤, 진옥은 격노했다.
“월낙을 보냈으면 안 됐어!”
그러나 사방화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월낙뿐 아니라 사씨 암위까지 모두 다 보냈어야 했습니다. 조금 전 빠져나간 자는 분명 북제가 남진 경성에 심어둔 정탐꾼의 우두머리이자 옥조천 배후의 인물이었을 겁니다.
남진에 있는 모든 북제 정탐꾼들을 버리고 혼자 살기 위해 떠난 것일 겁니다. 그래서 이 모든 정탐꾼이 힘을 합쳐 우리를 죽이려 한 것이겠지요. 우리를 죽이면 가장 좋겠지만 못 죽인다고 해도 우리만 큰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니까요. 참으로 악랄한 수작입니다.”
진옥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허 의원의 시신을 성벽에 걸어두고 진퇴양난에 빠지니 이 짧은 순간에 혼자 살겠다고 몇 년째 남진에 심어둔 북제 정탐꾼들을 버리고 떠난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대거 이용만 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참으로…….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어, 탄복하지 않을 수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배후자는 재빨리 득실을 따져 북제 모든 정탐꾼이 힘을 모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남진의 손실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는 보통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란 걸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방화는 그 배후자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진옥에게 말했다.
“폐하, 어서 낭군님께 서신을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옥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뛰어난 걸 보니 월낙도 뒤쫓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는군. 도성 내 모든 관문도 소용없을 테니 진강에게 서신을 보내야겠어.”
사방화는 곧 호위들에게 둘러싸인 포각루를 보며 말했다.
“예, 서방님이 그 놈을 막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그 놈을 놓치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적어도 남진 도성의 모든 정탐꾼을 다 쓸어 버렸으니 수확은 있지 않습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다만 수단이 어찌나 악랄한지 울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군.”
사방화는 화가 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진옥을 보곤 웃음을 터뜨렸다.
“별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신도 아닌데 당연히 모든 일을 예측할 순 없는 겁니다. 거기다 인간의 본성도 없는 이의 마음은 더 예측하기 힘들지요. 분명 어딘가 빈틈은 있을 테니 언젠가 북제에서 그걸 찾아내면 되는 겁니다.”
진옥의 안색도 다소 편해졌다.
“그대가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그칠 줄을 몰랐고 두 사람의 우산은 모두 화살에 망가져 더 이상 쓸 수도 없었다. 소천자가 서둘러 새 우산을 가져왔지만, 그 잠시 사이에도 두 사람은 이미 홀딱 젖어버리고 말았다.
진옥은 맞은편 포각루에서 정탐꾼을 제거하는 데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라 보곤 사방화에게 말했다.
“이대로 젖어있어선 안 되니 어서 옷 갈아입고 오시오.”
“귀찮게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여기서 무공으로 말리면 됩니다. 지금 바로 운란 오라버니네 별장으로 가야 합니다. 대체 저기가 언제부터 저 놈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된 건지 알고 싶군요.”
진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알겠어, 내가 대신 할 테니 그대는 힘쓰지 마시오.”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진옥이 곧 내력을 써 사방화 등에다 기운을 넣어주었고, 그렇게 사방화의 옷을 말린 뒤 자신의 옷도 말렸다.
소천자는 그런 두 사람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 걱정을 덜었다.
뒤이어 맞은 편 포각루도 진옥이 예상했던 시간과 비슷하게 끝마무리 됐다. 피범벅이 된 옷을 입은 자가 달려와 무릎을 꿇으며 이를 알렸다.
“폐하께 아룁니다. 포각루 내에는 132명이 있었으나 아무도 살아 돌아온 자가 없습니다. 소인의 무능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진옥이 분노했다.
“132명이 짐의 남진에 도사리고 있었다니 실로 적지 않은 숫자구나. 그 놈들이 어찌 포각루로 갔는진 알아냈느냐?”
“포각루는 북제 정탐꾼의 거점이었던 듯합니다. 포각루를 지키던 이들 모두 병사복을 입고 있었는데 오늘 폐하께서 수비를 차출하시던 틈을 타…….”
진옥은 입술을 깨물며 기가 차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단 말이냐? 그 말인즉슨 배후에 사주한 자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죽여주십시오, 폐하!”
“네 놈들을 벌해서 뭘 하느냐? 쓸모없는 것들! 어서 죽은 자들에게서라도 쓸만한 말을 얻어 오너라.”
그는 자신을 벌하지 않는 진옥의 너그러운 덕에 감사하며 곧장 외쳤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진옥은 도무지 화가 가라앉질 않았다.
“병사들마저 정탐꾼 무리에 끌어들이다니 참으로 대단하구나……! 아주……, 아주 대단해……!”
사방화도 진옥의 분노를 이해했다. 천자의 발아래 강산이 짓밟혔는데 황제가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방화는 차분히 그를 다독였다.
“정탐꾼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몇 세대에 걸쳐 심어진 겁니다. 남진도 북제에 정탐꾼을 심어뒀지 않았습니까? 다만 이 정도로 큰 규모의 거점을 지니고 배후에서 계략을 짜지 않았을 뿐입니다. 황실 은위도 포섭한 마당에 이 작은 포각루는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진옥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느 역대 선황폐하께서 이를 아시면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소.”
“이미 세상에 없는 분이 뭘 어찌 생각하시겠습니까? 한 사람이 떠나기 위해 모든 북제 정탐꾼들을 쏟아부었으니 그 계획은 좋았다만 덕분에 우리 남진은 평안해졌습니다. 그러니 화내지 마십시오. 중은 도망갈 수 있어도 절은 도망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큰데 조만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 말이 맞소.”
“이제 운란 오라버니 별장으로 가시지요.”
성루는 격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폭우에 씻겨 금세 말끔해졌다. 또 132명이 죽고 수십 명의 암위와 수천 병사들이 쓰러졌지만, 억수처럼 퍼붓는 폭우에 가려져 놀라는 백성도 없었다.
북제 정탐꾼들의 시신은 포각루에서 형부의 영안실에 옮겨졌다. 진옥은 사방화와 함께 성루를 내려와 죽은 자들에게서 쓸만한 것을 얻어오라 명했다.
관원들은 황명에 따라 그들의 신분, 지위 등 아주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철저한 조사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