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0화. 적을 유인해 내다 (1)
사은희는 떠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명 부인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어머니, 폐하와 방화 언니가 참으로 잘 어울리시는 듯해요.”
명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끔하게 꾸짖었다.
“헛소리하지 말거라!”
사은희는 입술을 살짝 삐죽였다.
“아이, 정인으로서 말고요! 세상에서 방화 언니와 제일 잘 어울리는 건 강 소왕야, 우리 형부시죠. 제가 말씀드리는 건 폐하와 방화 언니께서 저렇게도 침착하게 말 몇 마디로 남진 전체를 다 뒤집으시는 걸 보니 참 위대하단 생각이 들어서요. 전 평생 방화 언니를 따라갈 순 없을 것 같아요. 폐하께서 절 돌아보시도록 만들 기회조차 없을 것 같네요.”
“잘 알면 지금이라도 깔끔히 포기해라. 넌 아직 나이도 어리잖니. 아무리 연회에서 큰소리를 쳤다고 한들 널 진정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이는 없었다. 널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을 찾아야만 해.”
사은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 이렇게 된 이상 전 계속 기다릴 거예요. 한평생을 기다려 기회를 얻지 못한대도 방화 언니처럼 사씨를 짊어질 수만 있다면 헛된 삶을 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명 부인도 더 이상 딸의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지금 허 의원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을 맞자, 고작 몇십 년밖에 되지 않는 이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뒤늦은 두려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딸이 분명한 뜻을 세우고 그 길을 원한다면 다 따라주는 게 옳단 생각이 들었다. 이 삶이 길다면 얼마나 길겠는가. 또 미래의 남진이 어떻게 될지, 사씨가 어찌 될지, 사람 인생이 어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 *
마차에 올라타자 사방화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하지만 진옥도 그런 사방화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진 강산과 사씨는 한차례 폭풍과도 같은 격렬한 전투를 앞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든, 그들이 이 전투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쨌거나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일이었다.
곧 마차가 성루에 다다르고, 진옥이 긴 침묵을 깼다.
“다 왔소.”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갔다.
성을 지키던 사병들은 일제히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성루 계단은 마치 황권으로 가는 길처럼 높고 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아주 조심스레 내딛어야만 오를 수 있는 곳이었다.
이 황제 진옥도 4황자로 태어나 황태자를 거쳐 지금의 제왕이 되기까지 항상 침착함을 유지하며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이 자리까지 올랐다.
성루에서 본 아래의 세상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도성은 평소처럼 수많은 사람과 마차가 오가며 매우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지금 남진이 이토록 성행한 데에는 지난날 역사 속의 수많은 노고가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겉을 둘러싼 포장에 불과해, 도성에 잠입한 좀들을 제때 제거하지 않으면 이 평화도 단번에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원래 이 황성을 극도로 싫어하지 않았나?”
진옥이 황성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황성이 아니라 황실을 싫어했던 겁니다.”
“어찌 그 어렸을 적에 무명산에 갈 결심을 한 것이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단 걱정은 하지 않았소?”
순간 사방화의 눈빛이 짙어졌다.
“누구나 한번 죽고 난 뒤에 다시 돌아오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겁니다.”
진옥이 사방화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담담히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전엔 줄곧 황실이 사씨를 제거하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씨를 위해 남진 황실을 끌어내리고 싶었었지요. 하지만 배후에서 이 엄청난 계략을 세워 선동하는 자는 사씨뿐 아니라 남진 강산 전체를 원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진옥도 얼굴빛이 바뀌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아바마마께서도 평생 영명하다고 자부하셨지만, 임종 전에야 그 모든 걸 깨달으셨었지.”
사방화도 선황제가 임종 전 제게 한 말을 떠올리며 또 한동안 침묵했다.
약점이 생긴 자는 언제나 마음먹은 이에게 휘둘리게 되는 법이었다. 남진 황실은 몇 대를 걸쳐가며 사씨를 제거하는 데만 힘썼기에 북제는 비로소 그 틈을 타고 황실 암위에 침투했다. 그렇게 국세를 휘젓고 황실과 사씨 사이에 충돌을 일으켜 더더욱 서로만 겨누게 만든 것이었다.
선황제는 평생을 전전긍긍하다 죽음 앞에서야 깨달았으니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 강산엔 새 황제 진옥이 있었다. 진옥이 늦지 않고 깨달은 덕에 사씨와 남진은 그 참혹했던 전생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었다.
“벌써 걸렸군.”
진옥이 성문을 보며 말했다. 사방화도 시선을 돌려 높은 성벽에 걸린 허 의원의 시신을 확인했다. 백성들도 호기심에 달려왔다가 사씨 육방의 허 의원임을 알아보고 손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어림군이 사씨 육방을 포위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허 의원 시신이 성문에 걸린 것이었다. 이렇게 도성에 누군가의 시신이 걸린 건 아주 드문 일이었고, 이는 황제 진옥이 직접 내린 황명이었다.
혹 사씨 육방이 무슨 죄라도 저지른 걸까? 허 의원은 대체 무슨 죄를 저지른 거지? 누군가 성문을 지키던 사병에게 묻자 그가 차가운 얼굴로 답했다.
“북제의 정탐꾼으로 소왕비마마를 해친 자요.”
백성들은 오래도록 사씨 육방에서 지낸 허 의원이 북제 정탐꾼이었단 말에, 북제를 향한 악감정이 불타듯 고조되었다.
사방화가 임안성 백성들을 구해준 뒤로, 그녀는 이미 백성들 마음에 아주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그런 그녀가 두 번씩이나 북제의 계략에 의해 다치게 됐으니 어찌 격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백성들은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화가 풀리지 않자, 허 의원의 시신에다 달걀과 썩은 채소 이파리를 비롯한 똥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허 의원의 시신은 눈 깜짝할 사이 만신창이가 됐고, 특히 더 흥분한 백성들은 시신에다 기름을 끼얹곤 그를 에워쌌다. 진옥의 명령을 받은 이들도 그냥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 * *
그로부터 대략 반 시진이 지났다.
어림군은 도성 300리 밖까지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고, 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진옥의 눈빛은 어둡고도 무거워졌다.
“이 정도로 북제 정탐꾼이 모욕을 당하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 자의 수양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겠군.”
사방화도 차가운 눈으로 이야기했다.
“옥조천이 기꺼이 스스로 나서 북제 변경으로 시선을 돌리도록 하고 남진 도성에 남아 사씨 정탐꾼에게 수를 쓴 것만 봐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면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지 않겠습니까?
허 의원 시신이 저리될 때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수양이 아닌 냉혈한인 것이겠지요. 북제 정탐꾼들이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우두머리가 그 정도로 냉혈한이라면 그들도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우리가 비집고 들어갈 빈틈이 생기고 그 틈을 통해 단번에 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자가 이 국면을 꿰뚫어 보든 그러지 못하든 어쨌든 진퇴양난에 빠졌단 건 달라지지 않소. 나오면 우리가 여지없이 참살할 것이고, 오지 않는다면 사씨 정탐꾼 내부인의 마음을 분열시킬 테니까. 저 허 의원이 참으로 좋은 미끼 역할을 하는군. 그대가 괜히 내걸어두자고 한 게 아니었어.”
사방화가 담담히 말했다.
“우리를 이 지경까지 내몰았으니 우리도 절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똑똑히 알게 해줘야지요. 제 약점을 잡았다고 해도 쉽게 결판이 나진 않을 거라는 것도요. 누가 죽고 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도 흐려지고 바람도 부는 걸 보니 곧 비가 내리겠군. 비를 맞아선 안 돼. 이만 돌아갑시다.”
사방화도 하늘을 올려다봤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산을 가져오라고 해주십시오. 여기서 기다려야 합니다. 곧 있으면 내릴 듯한데, 이 적시에 쏟아지는 비를 그들이 이용하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진옥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 움직일 것 같소?”
“전 병력을 총동원해 혼신의 힘을 다 하거나 우리를 죽여 도성을 난장판으로 만든 뒤 천하를 휘저을 겁니다. 어느 쪽이든 아주 기대되는데 어찌 이를 두고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진옥이 말했다.
“그럼 내가 있을 테니 그대는 이만 돌아가시오.”
“폐하, 감히 제가 폐하를 함부로 깎아내리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혼자선 배후자를 감당하실 수 없을까 걱정이 되어 그러는 것입니다.”
“짐이 그 정도 능력도 없어 보이는 건가?”
진옥이 순간 화를 내자,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황실과 사씨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는데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어찌 공감대를 만들고 화합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절 노리고 덤벼드는 이들을 두고 어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전 직접 누군지 꼭 확인하고 말 것입니다. 매술을 이용하면 폐하께서도 당해낼 수 없으십니다.”
진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대와 운란 공자 외에 또 어떤 매족이 북제와 손을 잡고 남진을 사지로 밀어 넣으려 하겠소? 설마…… 사운란 아니오?”
“운란 오라버니는 사씨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을 사씨 자손으로 사셨습니다. 물론 사씨와 남진을 좋아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저를 해치거나 제 목숨을 앗아갈 분은 아닙니다.”
“줄곧 그대를 데리고 떠나려 했잖소? 사운란을 어찌 그리 믿는 것이오? 사운란이 아니면 진강이 그 화살비를 쓸 일도 없었고 두 사람이 이별의 위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소. 결국 사운란은 그대를 데려가지 못했지만, 사운란이 그대와 함께 황천길로 갈 생각이 전혀 없다고도 장담할 수 없잖소. 본래 사람의 속내는 알 수 없는 법이니. 정말 사운란에 대해 얼마나 아오?”
사방화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모르십니다.”
진옥은 순간 말문이 막혀 사방화만 빤히 노려보았다.
날은 흐리고 바람도 거세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사방화는 먼 산에 구름이 짙게 깔려 뿌옇게 된 곳을 바라보다 다시 입술을 뗐다.
“제가 운란 오라버니와 함께 죽더라도 같이 황천길로 가진 않을 거란 걸 오라버니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운란 오라버니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사방화는 한순간 먹구름에 휩싸인 듯했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지금의 날씨보다 더 무거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때, 찬 바람이 불어와 사방화의 얇은 옷과 머리카락을 뒤흔들었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진옥이 급히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피풍 하나와 우산 두 개를 가져오너라!”
소천자가 서둘러 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벌써 사람을 보내두었으니 곧 올 것입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진옥은 피풍을 건네받아 사방화 어깨에 걸쳐주었다. 사방화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진옥은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
“그대가 더 이상 아프지만 않으면 그게 가장 고마울 것이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이 없어졌다.
소천자가 곧 진옥에게도 피풍을 걸쳐주었다.
솨아아-
때마침 거센 소리를 동반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은 땅에 몸을 부딪히며 굉음을 냈고, 빗줄기는 순식간에 장막을 마구 내리쳤다.
사방화와 진옥은 각자 우산을 들고 빗속에 서 있었다.
성을 둘러싸고 있던 백성들도 비가 오니 일제히 흩어졌다. 거리엔 순식간에 사병을 제외한 그 누구도 남지 않게 되었다.
순식간에 하늘이 흐려지고 거센 빗줄기에 사방은 빗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성벽에 걸려 만신창이가 됐던 허 의원의 시신도 빗줄기에 다시금 깨끗해졌다.
사방화는 문득 의원의 시신을 보다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복이 있는 사람이었나 봅니다. 백성들이 온갖 더러운 걸 묻혀 놓았는데도, 하늘에서 몸이 씻기게끔 비를 내려주시는 군요.”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오랫동안 사씨 육방에 머물러왔으니 분명 감정이 있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죄책감에 저렇게 죽었을 리가 없소.”
“종조모님과 명 숙모님도 허 의원을 저기다 걸어놓는다는 것에 영 마음이 불편하실 겁니다. 저도 배후자가 이리도 치밀하고 계산적인 데다 저를 두 번씩이나 해치려 하고, 저희 사씨 정탐꾼들을 그렇게만 만들지 않았어도 이미 돌아가신 분께 저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미안한 얼굴을 한 사방화를 보며, 진옥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는 충분히 선하오.”
사방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