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9화. 패를 새로이 짜다
명 부인은 다시 걱정스럽게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네가 쥐고 있는 게 가장 안전하지. 그렇지만 네 몸은…….”
“거의 다 나았으니 또다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괜찮아요.”
사방화가 말했다.
“그래도 조심해라. 사씨 정탐꾼을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네 목숨은 꼭 지켜내야 한다. 노후야와 사씨 조상님들께서도 네 탓을 하진 않으실 거야.”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침 사은희가 잘 달여진 약을 들고 와 사방화에게 한번 확인시켜준 뒤 명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명 부인이 약을 다 먹고 사방화에게 말했다.
“방화야, 날 따라오렴. 사씨 정탐꾼의 모든 물건을 내어주고 그동안의 상황을 알려줄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폐하도 함께 모시고 가요.”
명 부인이 진옥을 보며 잠시 망설이자 사방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북제가 오래도록 남진을 꿰뚫어 보고 있던 와중에 남진이 이 일대에 와 내우외환에 휩싸인 건 교훈을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황실과 사씨가 서로를 믿고 제때 처리하지 않으면 이 강산은 하루아침에 북제에게 무너지고 말 거예요.
사씨 정탐꾼은 줄곧 우리에게 의지했었지만, 언제까지든 반드시 지켜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순 없습니다. 배후에 있는 자들의 수단이 아주 치밀한 데다 숨겨진 정탐꾼들도 이미 쉴 대로 쉬어버려 더는 사씨 힘만으론 당해낼 수 없어요. 폐하와 손을 잡아야만 합니다.”
명 부인도 고개를 끄덕인 후 진옥을 올려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폐하, 부디 우리 사씨와 방화의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북제를 간파한 이상 절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네. 짐이 살아있는 동안엔 절대 사씨에게 손대는 일은 없을 것이야. 100년 뒤 우리가 죽고 없을 때의 이야기는 다음 일대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두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명 부인이 편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내 사방화가 사은희에게 손짓했다.
“은희야, 너도 같이 가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사씨 정탐꾼은 이제 네가 맡아야 해.”
사은희는 한껏 긴장한 듯 말했다.
“방화 언니, 전 못해요. 전 언니만 한 실력도 없는걸요.”
“넌 가능해. 내가 있는 한 네게 모든 걸 맡길 일은 없어. 만약 내가 없다면 그땐 네가 맞서야 하겠지만.”
그 순간, 진옥이 크게 화를 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오! 그대가 어찌 없을 수 있어!”
“만일을 위해서 말하는 겁니다.”
“만일은 없어.”
진옥이 노려보자 사방화도 더는 대꾸하지 않고 사은희에게 손짓했다.
“방화 언니, 언니는 무사할 거예요.”
사은희도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보고, 사방화는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그래, 나도 열심히 살아볼 거야.”
네 사람은 함께 밀실로 들어섰다.
* * *
명 부인은 밀실 문을 굳게 닫고, 사씨 정탐꾼의 모든 비밀문서와 문건을 사방화에게 넘겨주었다. 또 열흘 전 사고를 당한 정탐꾼 두 무리가 어디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아직 누구 소행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찾아낸 것 중 어느 정도 도움이 될 만한 흔적들은 그녀에게 모두 다 넘겨주었다.
사방화는 문건 하나를 꼼꼼히 살펴보곤 사은희에게 넘겨주었다. 사은희도 그녀를 따라 문건을 읽어내려갔다.
진옥은 한편에서 문서를 만지작거리며 감개무량한 마음에 젖어들었다.
역대 남진 황조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사씨 정탐꾼을 찾아 사씨를 제거하려 힘썼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지난 날 황제들은 언젠가 당신들의 자손이 떳떳하게 사씨 정탐꾼 비밀문서와 문건들을 살펴볼 날이 오리란 걸 상상이나 해봤을까? 사씨와 황실이 손을 잡고 북제의 오랜 계략에 맞서게 될 거란 생각을 해 보기나 했을까?
사씨가 무너지면 남진 황실도 무너질 것이기에 남진과 사씨는 반드시 손을 잡아 함께 적을 물리쳐야만 했다.
사씨 정탐꾼은 아주 은밀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무려 두 시진이 걸려서야 모든 문건을 다 살펴볼 수 있었다.
* * *
두 시진 후, 사방화는 마지막 문건을 덮으며 사은희에게 물었다.
“은희야, 얼마나 기억하고 있어?”
사은희는 잠시 천장을 보며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음…… 반 정도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도 충분해. 다 기억할 필요는 없어. 명 숙모님, 이제 이 문건 모두 다 태워버려 주세요.”
명 부인이 깜짝 놀랐다.
“방화야! 이건 우리 사씨 정탐꾼 모든 비밀문서야. 몇백 년째 내려오고 있는 문서를 다 태워버리면 나중에 어떻게 다 찾으려고…….”
“이제 제가 사씨 정탐꾼을 넘겨받았으니 재정비에 들어갈 겁니다. 수백 년간 북제는 분명 많은 걸 알아봤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 열흘 내 소리 소문도 없이 사씨 정탐꾼 두 무리나 쳐낼 수가 없어요.
전 지금부터 모든 정탐꾼을 다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사씨 정탐꾼을 정비할 겁니다. 패를 새로이 짜는 것이지요. 배후자와 북제 정탐꾼을 일거에 공격해 두 번 다신 남진에서 허튼짓하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
“그래, 태우자꾸나.”
명 부인은 입술을 꾹 물고 문서를 다 태웠다.
세월을 말해주는 누런 표지부터 하릴없이 불길에 타들어 갔다. 명 부인은 평소 목숨보다 중히 여긴 귀중한 문서가 불길에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이는 분명 사방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방화 정도 되는 배포와 패기를 가져야만 이 수많은 세대를 걸친 정탐꾼을 과감하게 재정비할 수 있었다.
지난 세대가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명 부인은 왠지 저 이글이글 타는 불꽃 속에 사씨 미래의 희망을 본 듯했다.
희망은 오직 사방화라는 한 가녀린 여인에게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면 날아갈 듯 너무도 가냘픈 여인이지만 그녀의 어깨에는 사씨의 생사와 존망이라는 무거운 책임이 놓여있었다.
하지만 사방화에겐 사씨의 생존과 존망보다 더 무거운 의미가 존재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을 지켜야 했다. 이는 단순한 삶을 향한 욕구가 아닌, 사랑하는 남편 진강을 위한 일이었다.
부부는 동심주로 서로의 명운을 엮었다. 그래서 반드시 사방화가 살아야만 진강이 살 수 있었다. 또 이 두 사람이 오래도록 살아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남진 강산을 진정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남진은 황제 진옥과 영친왕부 소왕 진강, 그의 아내 사방화가 함께 책임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방화는 한 권, 한 권, 사씨의 지난 역사들을 불길 속에 다 던져 넣었고, 환한 불꽃 앞에 있어도 어쩐지 그녀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보였다.
그때, 사은희가 살며시 사방화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방화 언니, 언니는 반드시 살 거고 우리 사씨도 계속해서 이어질 거예요.”
사방화도 때 묻지 않은 사은희의 맑은 눈동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에 말없이 앉아 있는 진옥의 눈빛에도 짙은 안개가 어렸다. 진씨 황가엔 사씨 적녀처럼 역경에 맞서며 천하를 감당할 만한 여인이 없었다.
* * *
반 시진 후, 모든 문건이 다 타고 밀실엔 풀 내음과 잿더미만 남았다.
곧 사방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명 부인에게 말했다.
“명 숙모님, 이제 폐하께 허 의원의 시신을 성문에 걸어 모든 이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말씀드릴게요.”
명 부인이 깜짝 놀랐다.
“그럼 배후의 놈들이 미쳐 팔짝 뛰며 금세 수를 쓸지도 모르잖니!”
사방화가 말했다.
“그들이 미쳐 날뛰게 만들면 우린 더 수월해질 거예요. 여긴 대대로 진씨 황조와 사씨가 굳건히 지켜낸 남진 도성입니다. 그런데도 배후에 자리 잡은 북제 정탐꾼과 모략을 일삼는 이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들이 아무리 잘났다고 한들 겹겹이 포위된 상황에서 뭘 더 할 수 있을까요?”
명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화야, 부디 조심해라. 난 배후의 그 자들이 손을 쓰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라 네가 다칠까 봐 그걸 걱정하고 있는 거야.”
“염려 마세요, 숙모님.”
사방화가 명 부인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보인 후, 진옥을 돌아보았다.
“폐하, 낭군님이 도성을 떠난 건 도성 외곽 주현의 정탐꾼들을 제거해 도성을 떠들썩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남진 도성을 한 치 틈도 없이 포위해 도성의 정탐꾼들을 다 제거하는 게 좋겠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일단 서산 군영 30만 병마를 동원해 황성 전체를 둘러싸는 게 좋겠습니다. 이왕 나서는 것, 말끔히 제거해 한 치 여지도 남겨둬선 안 됩니다. 우선 도성 물을 휘저으면 제가 사씨 정탐꾼을 정비할 테니 폐하께선 월낙에게 암위들을 이끌라고 해주십시오. 하나가 이끌면 하나는 차례로 죽여가며 독 안에 든 쥐들을 잡는 겁니다. 즉각 행해 숨 돌릴 틈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알겠소.”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방화는 밀실을 나와 옥소(*玉蕭: 옥으로 만든 퉁소)를 꺼내 불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어둠 속에서 18명이 나타나 동시에 예를 갖췄다.
“아가씨를 뵙습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인 후, 진옥을 올려다보았다.
진옥도 손가락을 꼬아 가볍게 소리쳤다.
“월낙!”
“예, 폐하!”
월낙이 나타났다.
“이 호부(虎符)를 가지고 서산 군영 30만 병마를 모두 동원해 황성을 에워싸라. 그리고 모든 암위를 동원해 이 18명을 따라가라. 이들이 배후에 숨은 자들을 유인해 끌어내는 동안 엄호해주고, 암암리에 손쓰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죽이거라.”
월낙은 진옥에게 호부를 정중히 받곤, 얼굴을 가린 18명을 한번 훑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염려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이들을 엄호하고 도중에 손을 쓰는 자가 있으면 힘을 합쳐 기필코 숨을 끊어놓겠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자 월낙이 또 바람처럼 사라졌다.
사방화도 즉각 18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든 사씨 암위를 움직여 우선 도성에 있는 모든 북제 정탐꾼들부터 없애라.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곧장 도우러 갈 테니 신호탄을 쏘거라.”
“말씀 받들겠습니다, 아가씨!”
사방화의 손짓에 18명도 바람처럼 떠나고, 사방화는 명 부인을 바라봤다.
“명 숙모님, 우선 사씨 육방의 안전을 위해 어림군들이 집을 지킬 수 있도록 해두겠습니다. 도성의 추악한 것들을 청산하면 그때 다시 해산시킬 테니 억울하셔도 며칠만 참아 주세요.”
“억울할 게 뭐가 있니? 우리야말로 폐하께서 이렇게 어림군까지 배치해 사씨 육방을 지켜주시는 데에 감사해야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곤 진옥에게 말했다.
“폐하, 이제 허 의원을 성문에 걸어두고 우린 성루(城楼)로 가시지요.”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곤 소천자에게 명했다.
“이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성문에 걸어라. 이 북제 암인은 사씨 육방 명 부인과 소왕비를 해한 죄로 사흘간 성문에 걸어둔 뒤 시신 더미에 던지는 형에 처할 것을 만천하에 알리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천자의 손짓에 누군가 달려와 허 의원 시신을 수습해 밖으로 나갔다.
진옥이 곧 사방화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까딱였고 두 사람은 함께 사씨 육방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