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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6화 (856/978)

856화. 배후자의 계략

한편, 이목청도 진옥의 편전에 다다랐다.

사방화는 어제 진옥이 두었던 바둑을 홀로 복기하는 중이었다. 어제 진옥의 손놀림은 매우 빨랐지만, 사방화의 기억력도 만만치 않았기에 그녀는 모든 과정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이목청은 문 앞에 조용히 서서 잠시 사방화를 지켜보았다.

얼룩덜룩한 나뭇잎 그림자가 사방화의 얼굴을 뒤덮었지만, 그 사이로 스며든 햇살 아래 사방화의 미모는 더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침 사방화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이목청은 도성 최고의 미인이라 칭송받는 이여벽의 친남매인 만큼 그 역시 매우 아름답고 수려한 용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언제나 빛나던 그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아주 고단한 모습만 남아 있었다. 거기다 왠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표정까지, 여러모로 참 짠한 마음이 들게 했다.

“고작 열흘 넘게 못 봤을 뿐인데 어찌 그리 야위셨나요?”

사방화가 먼저 말을 붙였다.

“그간 몸조리는 잘하셨나 봅니다. 당최 소왕비마마를 뵐 면목이 없어…….”

미간을 문지르며 쓴웃음을 짓는 이목청을 보고,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동생이 한 일에 왜 오라버니가 면목이 없어 하세요.”

이목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동생이고 가족인데 당연히 제게도 책임이 있지요.”

사방화는 이목청에게 앉으라 손짓한 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과거를 다시 꺼내 뭘 해요? 목청 공자를 탓하겠단 것도 아닌데.”

“제가 스스로를 탓하고 있습니다.”

한숨 섞인 이목청의 말에, 사방화가 다시 연하게 웃었다.

“사랑하는 마음은 잘못된 게 아니지만, 그 마음을 강요한다면 잘못이겠지요. 인연은 이미 월로묘(*月老庙: 인연을 맺어준다는 신화 속의 절) 삼생석(三生石)에 새겨져 되돌릴 수 없는 거라 생각해요. 그러니 얻지 못한다고 집착하다 보면 결국 나만 다치게 되는 것이지요. 스스로 한평생을 망친 것보다 더한 형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목청 공자도 더는 자책 마세요.”

이목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 동생이 소왕비마마의 반만큼이라도 선한 마음을 가졌더라면 지금 이 꼴이 나진 않았을 겁니다.”

“네? 난 선한 사람이 아니에요. 본래 세상이 살아가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단하고 힘든 법 아니겠습니까.”

이목청은 입술을 깨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사방화도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바둑에 집중했다. 이목청 또한 사방화가 바둑두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직 요양 중이면서 어찌 이리 살기가 느껴집니까? 몸에 좋지 않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두는 게 아니라, 복기하는 겁니다.”

“예? 누가 둔 것을요? 폐하께서 두신 겁니까?”

“네.”

이목청이 재차 바둑판을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폐하께선 가슴 속에 엄청난 울분을 품고 계시는군요.”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남진 명운이 바람 앞의 촛불과 같으니까요. 여기서 대세를 뒤바꾼다면 남진은 다시 300년간 성세를 이룰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남진은 몇십 년 안에 사라져 북제에 먹히고 말 텐데 어찌 부담이 없을까요.”

“황제라는 자리도 참 쉬운 게 아닙니다.”

이목청이 한숨을 내쉬자, 사방화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제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요. 폐하께선 단순한 부귀영화가 목표도 아니고, 남진을 안정시키고 북제를 물리치는 걸 넘어 더 큰 꿈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부국강병과 남진의 성세를 다시 이뤄내 천년의 공훈을 세워야 하니 어찌 쉽겠습니까?”

이목청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폐하께선 정말 훌륭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폐하를 든든히 보좌하느냐에 따라 남진의 역사는 폐하의 시대에서 다시 쓰일 것입니다. 북제도 더는 남진을 넘보지 못할 것이고 눈치만 보게 되겠지요.”

이내 이목청이 문득 사방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몸조리 중이니 근심은 내려두세요.”

그러자 사방화는 이목청을 빤히 보다 잠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목청 공자, 여태 내가 매일매일,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그겁니다. 공자께선 좀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이목청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왕비마마, 정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왕비마마를 걱정하고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왕비께서 아프시면 다들 걱정에 잠깁니다. 강산도 중요하나 많은 이들에게는 왕비마마의 목숨이 더 중요할 겁니다.”

“알겠어요, 알겠습니다. 공자도 언제부터 이렇게 잔소리 많은 스승님이 되신 건지……. 그러나 공자, 다음에 만날 때도 이리 힘없고 야윈 모습으로 오시면 내게 이런 말할 자격도 없다는 건 잘 아시겠죠?”

이목청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사방화가 곧 복기를 마치고 이목청에게 물었다.

“이 끝마무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목청이 바둑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말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요?”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짊어지게 해선 안 됩니다. 한 걸음 정도는 괜찮지만, 남진이 감당할 수 있을지를 따져봐야지요. 현 상황으로 볼 땐 한 달 내로 전쟁이 일어나면, 남진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은 1년밖에 되질 않습니다. 보급품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사방화는 살짝 인상을 썼다.

“1년은 부족해요.”

“맞습니다. 부족하죠.”

“백성들 말고 더 힘을 빌릴 수 있는 곳은 없을까요?”

이목청이 문득 사방화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북제를 원하시는 겁니까?”

사방화가 담담히 답했다.

“그렇다기보단, 북제가 남진을 함부로 얕보게 해선 안 되잖아요. 고모님이 북제 황제와 깊은 정을 쌓아오셨대도 어쨌든 강요로 벌어진 일이니까요. 북제가 오래도록 계략을 짜는 동안 남진은 너무 안일했습니다. 그 오랜 시간을 걸쳐 비로소 전쟁을 하게 됐는데, 값진 결과를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이 5년, 10년, 20년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기만 하며 일생을 전쟁 속에서 살아갈 순 없잖아요. 전쟁하고 싶다고 마냥 무턱대고 전쟁을 일으키면 백성들의 삶은 누가 걱정해주는 겁니까?”

이목청은 잠시 탄복을 했다.

“왕비마마께선 몸도 좋지 않으시면서 이 와중에 백성들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놓고도 마마가 선하지 않다는 건가요?”

사방화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 내 목숨으로 트집을 잡는 건가요? 당분간은 죽을 일 없으니 걱정 마요.”

이목청이 바로 안색을 굳혔다.

“허튼소리하지 마십시오!”

“알겠어요. 안 할게요.”

이목청은 다시 엷게 미소를 짓다 진지하게 말했다. 

“왕비마마의 문제도 언제까지고 미룰 수만은 없으니, 강 소왕야께서 돌아오시면 폐하께 도성에 남아 계시라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전 연석과 군량미를 마련해 막북으로 갈 테니 마마와 소왕야는 매족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으십시오.”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북제가 그리 오래도록 준비해왔는데 두 분이서 가능하시겠어요?”

“가능합니다. 세상에 마마와 강 소왕야가 사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1년 안에 끝나지 않는대도 겁날 건 없지요. 북제가 아무리 오래도록 준비해왔대도 무너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습니다. 폐하께서도 두 분을 위해 마련해 두신 다른 계획이 있을 겁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아니, 진강이 오면 그때 다시 말해요.”

이목청도 이 제안을 확정할 수 없음을 알기에 모든 건 일단 진강이 돌아온 뒤에 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곧 오후 무예 고과가 열린다며 누군가 이목청을 데리러 왔다.

이목청은 사방화와 인사를 나눈 뒤 다시 편전을 떠났다. 

이목청이 떠나고, 사방화가 시화에게 물었다.

“시화, 외조부님이 떠나신 지도 벌써 반년은 됐지? 소식은 없어?”

시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형 어르신은 북제를 떠나 북서쪽으로 가셨지만, 여태 소식이 없으십니다.”

“운란 오라버니, 운계 오라버니도 소식 없고?”

“네. 파견됐던 두 사람도 증발해버린 듯 아무 종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언신은? 경가도 언신에 관한 소식은 모른대?”

시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소왕야께서 마마를 위해 제운설 공주마마와 언신 공자님을 맞서게 하신 뒤로 두 분 소식도 끊어졌다고 합니다. 수일 전, 마마께서 소왕야께 보내신 매도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희 쪽에선 언신 공자님을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며 높은 황궁 벽을 바라보았다. 

“이 황궁에선 아무도 날 해할 수 없지만, 바람도 통하질 않고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해. 새장에 갇힌 것처럼 외부 소식조차 알 수가 없으니 너무 힘들구나.”

“명 부인께서도 열흘 넘게 소식이 없으십니다.”

사방화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 말이야. 네가 말 안 했으면 까맣게 잊을 뻔했어. 황궁에 들어오던 날 명 숙모님께 말씀드렸는데 지금껏 아무 소식도 없다니,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소인이 사씨 육방에 한번 다녀올까요?”

“넌 내 최측근이야. 네가 출궁하면 모든 이들에게 나와 사씨 육방에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걸 선포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럼……, 왕부에 가서 내 물건을 가져올 겸, 어머님께 사씨 육방에 다녀와달라고 부탁드리자.”

시화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응, 어서 다녀와.”

시화도 편전을 떠나고 고요해진 공간, 사방화는 낮잠을 잘 기분도 아니라 멍하게 있다가 또 습관처럼 탁자에 그리운 진강의 이름을 끄적였다.

* * *

한 시진 후, 시화가 몹시 어두운 안색으로 돌아왔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사방화가 서둘러 묻자, 시화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마마, 누군가 사씨 정탐꾼에 수를 쓴 것 같습니다. 명 부인께서 보내셨던 정탐꾼 두 무리가 모두 소리 소문 없이 죽었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요양하시는 중이라 명 부인께서도 말씀드리기 힘드셨다고 하네요.”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누군가 사씨 정탐꾼에게 소리 소문도 없이 수를 썼다고?”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 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부인께서도 이젠 함부로 누군가를 내보내는 게 두려워 방법을 생각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방화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명 숙모님께선 누가 그랬는지 한번 찾아보시긴 하셨대?”

시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비마마께서 제 말을 들으시곤 사씨 육방에 사람을 보내셨는데 근래 사씨 육방 노부인과 명 부인 모두 몸이 좋지 않으셔서 분위기가 아주 침침하답니다. 밖에선 도저히 아무 소식도 알 수가 없어 왕비마마께서 그 자에게 직접 명 부인을 만나 뵈라 하셨고 그제야 부인께서 말씀해주신 거였대요.”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지금 이 일이 일어난 지 열흘도 넘었다는 거지?”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 부인께선 사씨 정탐꾼 두 무리를 보내셨는데 소식이 끊겨 알아보자 모두 죽었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이 배후자가 사씨 정탐꾼 전체에 수를 쓴 걸 겁니다. 이 일 이후로 명 부인께서도 잘못 움직였다가 사씨 정탐꾼이 모두 발각되어 죽임을 당할까 걱정되시는 마음에 어쩌지 못하고 계신답니다.”

사방화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순간 눈을 가늘게 떴다. 시화도 사방화의 변화를 눈치채고 답을 구하는 듯 눈을 깜빡이자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옥조천이 이여벽을 사주해 날 해치게 만들고 취하와도 관련을 만든 건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쪽을 치려는 듯 하다가 서쪽을 침)였던 거야. 우리 시선을 모두 다른 곳으로 돌려놓은 거지. 옥조천이 진정으로 노린 건 내가 아니라 사씨 정탐꾼이었어.”

시화의 안색이 돌변했다.

“마마, 그럼 이제 어떡하지요? 여태 사씨가 지켜왔던 정탐꾼을 하루아침에 잃어선 안 되잖아요.”

사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겨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는 없지……. 분명 옥조천의 배후에 또 다른 누군가 있을 거야. 옥조천이 도성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이여벽과 우상부 내 사고로 돌린 뒤, 도성을 떠나 막북으로 향하며 진연을 납치해 저 멀리 막북까지 유인한 거야. 그 사이 남진에 남아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손을 쓴 거고.”

시화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나하나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다니 정말 무섭습니다.”

사방화가 말했다.

“진강이 형양 정씨 북제의 정탐꾼을 없애는 동안, 북제도 남진이 북제에 심어뒀던 정탐꾼들을 비롯해 남진의 배후를 휘젓고 다니며 사씨 정탐꾼을 제거하려 하고 있어.

북제도 사씨와 남진 황실은 아주 깊은 관계가 있으니 남진이 기대고 있던 사씨란 큰 나무를 쓰러뜨리면 모든 게 위태로워질 거란 걸 아는 거야. 그러니 사씨를 상대하기 위해 사씨 정탐꾼에서부터 손을 쓴 거지.

참 치밀하기 짝이 없구나. 명 숙모님께서 지금껏 사씨 정탐꾼을 지켜내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볼 수 있어. 내가 몸조리를 하는 동안 숙모님은 내게 알릴 수가 없으셨을 것이고, 뾰족한 수도 없어 애만 타셨을 테니 결국 병까지 나신 거지. 지금 바로 폐하께 출궁해야겠다고 말씀드려줘.”

창백한 안색으로 듣고 있던 시화가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마마! 아직 몸도 좋지 않으신데…….”

“이만하면 됐어. 더 이상 이 황궁에 있다간 내가 미치는 건 둘째 치고, 사씨의 뿌리가 하루아침에 다 뽑힐 지도 몰라. 그럼 서방님께서 힘들게 형양 정씨와 북제 정탐꾼을 제거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꼴이 되는 거야. 어서 폐하께 다녀와.”

시화도 더 지체할 수 없는 큰일임을 깨닫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이내 사방화는 시묵에게 나갈 채비를 명하고 출궁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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